F

생각없는 남자의 변주

by 유은

나는 꽤 자유로운 경상도 집안에서 자랐지만, 내 인생엔 굳건한 일념 하나가 있었다. '경상도 남자는 절대 만나지 않겠다'는 것. 하지만 그 알량한 일념은 스물여덟에 보기 좋게 깨졌다. 뭐, 각 잡고 정식으로 만난 건 아니니 완전히 깨졌다고 하긴 좀 억울하지만 말이다.


그는 그야말로 경상도 남자 중의 '상남자'였다. 서울 한복판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투박한 사투리가 처음엔 몹시 거슬렸는데, 어느 순간 그 촌스러움이 기묘하게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다. 근래 어떤 이성을 보며 '귀엽다'고 느낀 적이 하도 까마득해서, 나는 그 낯선 감정이 꽤나 귀하고 반가웠다.


두 달간 오며 가며 묘하게 쌓인 정(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처음으로 밖에서 따로 술을 마시게 되었다. 내 인생을 통틀어 나보다 술을 월등히 잘 마시는 남자는 그가 두 번째였다. '아, 나한테 속수무책으로 말려들던 남자들이 이런 기분이었구나.' 묘한 패배감과 호기심이 뒤섞인 밤이었다.


그날 우리는 둘이서 소주 일곱, 여덟 병을 거뜬히 비워냈다. 꽤 짙은 스킨십도 오갔다. 그런데 이 남자, 그 엄청난 양의 알코올을 때려 붓고도 끝까지 기가 막히게 다정하고 완벽했다. 취한 내 짐을 하나하나 다 챙겨 들고, 우리 집까지 대리를 불러 나를 안전하게 데려다주었다. 심지어 내가 수없이 들락거렸던 단골집 화장실 문이 밖에서 실루엣이 비친다는 사실을 나는 그날 처음 알았는데, 그는 그걸 미리 캐치하고는 내가 볼일을 보는 내내 문 앞에서 조용히 보초까지 서주던 애였다.


하지만 감동은 딱 거기까지였다. 이 미친 인간은 나와 입을 맞추고 매너를 다 뽐낸 뒤 나를 안전하게 집에 밀어 넣고는, 기어이 자기 친구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 몇 병의 술을 더 붓는 짐승이었다.

평생 형제만 있는 집안의 투박한 수컷들만 만나왔던 나에게, 위로 누나가 두 명이나 있다는 이 남자는 도대체 어떤 변종이었을까. 나는 복잡한 계산 없이 단순하게 직진하는, 이 생각 없는 테토남의 기질이 오히려 편하고 좋았다. 그런데 이 단순한 짐승이 내게 훈수를 두듯 툭 내뱉었다.


"니는 참 남자를 모른다."


뭐라고? 결국 그 잘난 '테토남' 타령을 하며 그가 단순해서 좋다고 합리화하던 내가, 사실은 그보다 훨씬 더 생각이 없고 멍청한 인간이었던 거다.

홀로 남은 방 안에서 나는 애써 정신승리를 시전했다. '네가 날 좋아하는 건 맞는데, 내가 좀 만나주는 거지.' 하지만 서늘한 직감은 명확하게 속삭이고 있었다. '아, 나 그냥 원 오브 뎀(One of them)이구나.'


사랑이라는 잔인한 판에서 MBTI니, 테토남이니 하는 요즘 유행하는 얄팍한 단어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나는 굳이 사귀는 사이가 아니더라도, 나와 입을 맞추고 묘한 기류를 나눈 상대라면 당연히 나에게 맹목적이고 적극적인 스탠스를 취해야 한다고 믿는 오만한 인간이었다.


'내가 지금 서른한 살짜리 어른을 만나는 건지, 스물한 살짜리 애새끼를 만나는 건지. 아, 역시 어린애들은 안 돼. 아니지, 역시 경상도 남자는 애초에 상종하는 게 아니었어.'


열심히 핑계를 주워 담다 문득 헛웃음이 났다. 결국 이건, 그가 나에게 푹 빠지지 않았다는 명백하고도 쓰라린 사실을 어떻게든 고작 선입견 따위로 덮어보려는 찌질한 발악일 뿐이었다. 나에게 미치지 않은 남자를 탓하기 위해 그의 고향과 나이를 방패막이 삼아버린 옹졸함.


얼마 뒤, 우리는 한 번 더 술을 마셨고 똑같은 일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그는 변함없이 나를 배웅한 뒤 친구들에게로 떠났다. 내가 그토록 진저리 쳤던 '생각 많고 계산적인 남자'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는 그만의 '생각 없고 단순한 방식'으로 더 이상 나와 관계를 이어나가지 않으려 했던 거다.


여전히 나는 남자를 지독하게 모른다. 하지만 이 스치듯 지나간 외로운 인연에서 내가 하나 정확히 배운 게 있다면 결론은 단 하나뿐이다.


그는 나에게 미치도록 반하지 않았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5화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