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궤도.올빗. 나무관세음,.

by 기묘염

오랜만에 혼자 집에서 쉬고 있다. 달콤한 시간은 자기만의 속도를 가지고 세상과 별개로 흐르는데 좀 과하게 속도를 내는 경향이 있다.

시간이 빨리 흐른다. 아직 오십걸음도 걷지 않은 하루다.

나는 쉬는 날 온전히 집에서 시간을 보낸 경험이 별로 없다.

어릴 땐, 엄마와 성격이 너무 맞지 않아서, 작은 공간에서 시선과 언어의 공격을 받으며 함께 있는 게 괴로웠다. 늘 도망치듯 습관적으로 밖에서 시간을 보냈다. 결혼 후에는 바람을 쐬고 나다니며 밖에서 함꼐 시간을 보내야 할 것만 같았다. 그게 시간을 보내는 거고 노는거고, 그 외엔 집에서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아이를 낳고 나니, 이제 주말에 아이와 함께 집에 있는 일은 말 그대로 노동이자 고역이 되었다. 이런게 습관이 되다보니,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밖에 나가도, 나 혼자 집에 있지를 못한다. 자유시간이 생기면 강박적으로 친구를 만나거나, 혼자서 카페에 가거나 쇼핑을 갔다. 오랜만에 생긴 자유니 누려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 같다.

요 근래 아이가 이주동안 방학을 했다. 남편과 번갈아 연차를 쓰며 아이의 방학을 채웠다. 방학이니 나가서 즐겁게 잘 놀아줘야 할 것 같은 마음에, 혼자서 수영장도 데려가고 사촌동생집에 가서 자고 오기도 하고, 가족여행으로 서울도 다녀왔다. 며칠 전부터 몸이 피곤하고 지친 것 같단 생각을 했는데, 어제는 시도때도 없이 모두에게 화가 난 내 자신을 발견했다.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모두를 내보내고 오늘은 온전히 집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 한시간정도 지나면, 어딘가 혼자서 신나게 카페를 가는 내모습을 예상했는데, 의외로 가만히 있는 이시간이 너무 행복하다. 로봇청소기를 돌려놓고, 청소기님꼐 방해가 될까바 발을 의자에 올려놓고 안마의자위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궤도라는 책인데, 지구의 궤도를 도는 우주비행사의 관점에서 쓴 소설? 이지만 스토리보다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사유라고 봐야할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장르다. 지구의 궤도를 돌고, 내 일상의 궤도를 빙빙 돌고, 돌고도는 요일의 일출을 반복하다 내일 또 회사에 .. 염병할... 다시!

지구의 궤도를 돌고, 내 인생의 순환 주기를 돌고 돌아 왔던 곳으로 돌아가고, 결국 목적지는 무덤인데 나는 지금 뭐 어쩐다고 그렇게 장돌뱅이마냥 외로운 거리를 빙빙 돌고. 모두 돌고 돌고 돌고오 돌고오오오 .. 아 다시!

작년에 왔던 각설이는 죽지도 않고 또 오고, 부처님은 갔으나 부처같은 인간들이 돌아와 묵묵히 삶을 인내하는 이 순환이라니 나무 관세음..


뇌가 빙빙 도는 것 같은 쓸데 없는 생각들을 하면서 안마의자에서 몸뚱아리를 조지고 있으니 잠이 솔솔 왔다. 무릎위에 읽던 책을 올리고 의자 위에 앉은 채 잠을 자다 깨어보니 빙빙 돌던 로보청소기는 제 집을 찾아가고, 시계는 돌고 돌아 아이가 돌아올 시간이 되어가는데, 나만 여전히 이 의자위에서 몸을 떼지 못한 채, 이 자리 그대로다. 이게 꿈인지 삶인지 나비가 난지 내가 나빈지, 그니까 이런 것이 삶인지 살다보니 이런 것인지 난 모르겠다.


여름 휴가를 다녀오고 아이의 방학도 오늘로 끝이 난다. 아직 쨍한 매미 소리와 미친 더위에도 불구하고 나는 벌써 이 여름이 다 간 것만 같다. 벌써 한 계절이, 한 해가, 한 삶이, 한 문명이 인류가 지구가 우주가.

..헛소리를 많이 했더니 ,내가 온전히 쉬고 있다는 이 행복한 시간이 실감난다.

그럼 마저 굿주말.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내 우물 안의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