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없는 자의 연말 마무리

by 기묘염

연말인데 약속 하나가 없다. 찾아주는 사람도 찾는 사람도 없이 고요한 주말 오후를 보내고 있다. 뭐랄까 너무.. 적성에 맞는다. 오늘따라 눈치를 챙긴 동업자가 어린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식세기를 돌려놓고 격렬한 물소리에 맞춰 우아하게 자판을 두드리는 중이다. 커피를 한 잔 사올까 했는데, 혼자 있는 일분 일초가 아까워서 커피 대신 집에 있는 꿀물을 타서 마시고 있다. 80년대 숙취자도 아니고 꿀물을 왜 마시나 싶겠지만 집을 아무리 뒤져바도 물에 탈 수 있는 거라곤 꿀 밖에 없다. 이마저도 종가집 씨간장마냥 오래된 것 같지만 정신건강을 위해서 유통기한은 확인하지 않았다.
혼자 있는데 할일도 없고 해서 컴터를 켜긴 했지만 사실 딱히 쓸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일개미의 하루는 집 회사 집의 루틴을 벗어난 적이 없고, 주말이면 어린이의 뒤치닥거리를 하느라 바쁘다. 잠깐 짬이 날때면 뭔가 쫓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긴 하지만, 실체없는 것들이 뒤쫓을 때는 깊이 파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
이런 종류의 불안감은 비교적 평화롭고 안정된 일상을 향유하는 사람의 것이다. 어쨌거나 일상은 계급 문제니까. 매순간이 전쟁이 아니라 권태라면, 많은 것을 가진 삶이려니 하고 너무 징징대지 않는 편이 낫다. 그러니 나는 자판을 두들긴다 한들 치열할 수가 없다. 그저 이맘때가 되면,늘 그랬듯이 그냥 그랬던 일년을 잠깐 돌아보고, 내년에도 그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적당히 지루하고 적당이 권태롭기를 바란다.

사실 돌아보니 개인적으로 올해는 잊을 수 없는 한 해였다. 생각보다 시간은 공평하고 익히 알려진대로 힘이 셀테니, 시간의 능력이 치유일 지 망각일 지는 좀 더 두고봐야 알 일이다. 한없이 내려 앉을 것 같았던 날들도 지나고 나면 한없이 가볍게 흩어질 것이다. 세상에 다시 없을 것 같은 감정들, 그게 고통이건 기쁨이건 지나고 나면 흔해빠진 풍문들일 뿐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인류가 존재한 이래 새로운 감정 또한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삶을 축복이라 일컬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인간은 개별적 삶을 산다는 것 뿐이다. 진부하고 흔한 모든 것들이 한 개체에게는 유일하고 특별한 경험이 되는 것. 거대한 하나의 감정이 60억개의 개별적인 단위로 쪼개져 각개인에겐 기쁨이고 고통이고 사랑이고 감동이고 삶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만이 스스로의 삶에 특별함을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동기가 된다.

그래서 잘 모르겟다. 교차하는 순간의 경험이. 함께라고 여겼던 찰나의 순간들이 각자에게 같을 것인지. 그것을 같은 경험이고 같은 추억이라 일컬을 수 있는 것인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하나의 같은 단어로 규정할 수 있으며, 일련의 사건들을 하나의 스토리라 볼 수 있을 것인지. 우리는 각자의 마음속에 각기 다른 관계를 규정하고 서로 다르게 이름 붙인 사건들을 모두 같은 것이라 착각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도덕과 신념이 한 인간을 객관적으로 규정하는 공정한 잣대인지 아니면 그저 스스로를 벌주는 자학의 채찍일뿐인 것은 아닐지. 배움과 믿음이 영혼의 구원인지 아니면 스스로를빠뜨리는 거대한 함정일지. 그런 밑도 끝도 없는 생각을 하면서 한해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다.
참내.. 한해의 마지막 일기가 이토록 현학적일 뿐이라니 배부른 돼지새끼 같다.
어떤 식으로 변화를 주는 것이 위험하지 않으면서 삶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변화에서 안전을 찾다니 역시 싹수부터 틀려먹었나.

keyword
작가의 이전글밀크맨(애나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