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초월한다는 것
시대가 다르고 배경이 다른 문학작품을 읽을 때, 시대적 배경이 아무리 특수하고 그 역사가 아무리 생경하다 하더라도 모든 이야기에 기시감이 느껴질 때가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북 아일랜드의 역사라고는 김정일의 가정사보다도 모르지만 그 모든 이야기들이 마치 우리를 설명하는 거울처럼 느껴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번도 이름으로 불리운 적 없는 이름없는 주인공과 나의 공통점이라고는 여성이라는 점밖에는 없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책이였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 어디서나 모든 여성들의 삶이 비슷하다거나 같은 경험을 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성이기 때문에 그것이 언제이고 어디이냐에 따라, 더욱 천차만별의 삶을 살 것이다. 주변을 둘러싼 환경이 보다 많은 영향을 미치는 삶, 자신의 의지보다 타인의 의지에 더 많이 휘둘리는 삶, 그것이 약자의 삶이기 때문이다.
다만 사회의 약자들은 사회적 약자라는 그 보편성 때문에 보다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다.
공감능력이라는 것이 약자들에게 더 발달해 있다는 슬픈 사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약자들에게 행해지는 억압과 폭력의 결이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책장이 넘어가는 것이 아까워서 천천히 읽었고 아끼면서 읽었고 되새기면서 읽었다.
책을 핥아서 먹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이 책에서 이름없는 주인공이 어떤 행위의 주체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야기는 헛소문에서 시작해서 소문이 사실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 결국 소문을 주체가 원하는 대로 주인공의 의지와 다르게 현실이 변형되어 가는 과정, 그리고 마침내 소문이 끝나는 것조차 주인공의 의지가 아닌 환경의 개입과 타의에 의해 끝나게 되는 이야기이다. 그 모든 과정이 어찌나 기시감이 있고 현실적인지, 내 마음이 답답해지고 슬퍼지다가 결국엔 동화되어 버리는 놀라운 소설이다. 소문의 주인공이 된 이름없는 주인공은 소문에 대해 어떤 해명도 변명도 행동도 하지 않는다 . 그것은 주인공의 개인적인 성격적 특성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상 소문의 주인공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도 하다.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소문은 제 나름의 파괴력을 가지기 마련이고, 애초에 자신이 하지도 않은 사실이 아닌 소문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지 가능성조차 의문이다. 소문은 주인공의 침묵 속에서 점차 사실화되고, 사실화 된 소문의 힘으로 주인공을 무력화시키고 현실이 되어간다. 그 와중에 드러나는 인간들의 반응, 신뢰와 믿음의 문제, 가족이라는 제도 내에서 벌어지는 불신과 폭력 , 젠더폭력, 성폭력, 인간이 마주하게 되는 진짜 감정과, 진짜 감정에서 도피하면서 발생하는 또다른 선택의 문제들. 결혼 제도의 맹점, 모든 것들이 뒤섞여 이 곳이 북아일랜드인지 현재 한국인지, 그시절의 문제인지 지금의 문제인지 도통 구분할 수가 없었다. 삶은 언제든 어디에서든 그렇게 보편적일 수밖에 없는지, 인간은 언제고 그런식으로 행동하는 존재들인지, 그럼에도 언제나 인간은 서로에게 제 나름의 방식으로 구원인 것인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소설이였다. 특히나 이름없는 주인공의 가족들 ,특히 엄마의 변화는 나를 진짜 슬프게 만들었다. 엄마와 딸이 아니라, 한 여성으로서, 나이든 여성과 젊은 여성이 공유할 수 밖에없는 어떤 감정들이 마음을 울리는 것 같았다. 누구나 삶을 향유하고 어떤 나이에든 자신의 진심을 맡딱뜨릴 수 밖에 없는데,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였을 때, 스스로를 다시 발견하게 되는 신체적 노화가 , 어쩌면 늙고 죽을 수 밖에 없는 근원적인 인간의 숙명이 내 마음을 좀 뒤흔든 것 같다. 첫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완벽한 책이다.
추천에 추천에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