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의아니게 좋은 시작!

by 기묘염

오늘은 날씨이슈도 있고 하여 하루종일 집에 있었다. 굶주린 하이애나처럼 냉장고 주변을 어슬렁대며 눈에 보이는 모든 걸 먹어치우다가 아주 오랫동안 들여다보지 않던 신선박스에 손을 대고야 말았다.

신선박스가 다 거기서 거기지. 그냥 요만한 서랍에 대충 뭐있는지 밖에서 보여도 알고 그런거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생을 부지런히 잘 살고 있는 사람이니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물론 평송에 안 열어 봤던 것도 아니다. 수시로 여닫으며 위에 물건을 얹기도 하고 꺼내 쓰기도 하고 나름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믿었다. 문제는 그냥 열어봤다는 것이 아니라 손을 댔다는 거다. 일테면 우리가 지질학자라고 생각해보자. 지구의 표면을 잘 걸어다니다가. 굳이 이 지층을 확인해보고 싶은 거다. 고생대엔 어떤애가 살았고, 중생대에 살던 어떤애가 죽어서 곤죽이 되어 우리의 소중한 석유가 되었는지 뭐 이런걸 알게되는 순간과 맞딱뜨리게 된거다.

냉장고 신선칸이 그렇게 넓고 깊은지 몰랐다. 저 안쪽 바닥에서 문자 그대로 석유같은 것이 나왔다. 그 곤죽이 살아생전 어떤 형태를 갖춘 애였는지 유추할 수 없었으나. 일종의 식물.. 아니 열매 뭐 그런것이 아니였나 추측만 하고 있다. 애도를 표한다.


냉장고를 싹 뒤엎고 신선박스를 꺼내서 박박 씻어 말리면서 함께 사는 인간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생겼다. 7세 남아는 아직열외로 치고, 퇴근 후 서로보다 냉장고를 더 자주 살피는 두명의 인간이 어떻게 합의 없이 냉장고를 퇴적층으로 만들 수 있는지. 암묵적 동의라고 하기엔 서로 전혀 의식하지 못했고, 너가 어디까지 가나 보자 하고 오기를 팠다고 하기엔 아예 인지조차 못했다. 그냥 둘 다 아무 생각 없이 눈 앞에 보이는 것만 집어서 먹고, 대충 사고 대충 먹고 대충 쌓고 대충 넣고 대충 살다보니 냉장고에서 유전이 터진 것 뿐이다. 한마디로 아주 결이 비슷한 두 명의 인간이 소꿉놀이 하 듯 대충 살다 보니 생긴 일인데 유전이 냉장고에서만 터지라는 법 있나. 원래 한 번 터지기 시작하면 내전 일어날때까지 풍족하게 터지는 게 석유아닌가.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누가 언제 사서 그걸 거기다 묵혀뒀는지 서로 모르는 것처럼, 누가 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치울 때도 그냥 먼저 발견한놈이 군소리없이 대충 치우고 만다는 점이다. 내가했을 가능성이 서로 높으면 상대방을 탓할 겨를이 없다.


간만에 냉장고를 치우고 보니 더 간만에 요리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냉장고에서 있는 지도 몰랐던 야채들을 모두 꺼내서 토마토를 때려넣고 해독스프 한 솥을 끓여보았다. 하필 냉장고에 감자가 없어서, 말이 스프지 전분기 없는 토마토국이 되었다. 냅다 넣고 소금으로 간만 맞추면 맛있댔는데, 풍미를 더하기 위해 버터도 넣고 , 치킨스톡도 좀 털어 넣고, 깊은 맛을 위해 소고기도 좀 많이.. 넣고 그냥 넣으면 냄새날까봐 후추에 소금간하고 다진마늘도 넣어서 기름기 좔좔 흐르게 구운 다음에 넣었따. 이름은 해독 스픈데, 전해 해독이 되지 않는 맛이였다.맛있었단 얘기다. 만족한다.

요리는 못하는데 손은 크고 손은 큰데 자꾸 뭘 더 넣다보니 한 솥이 되었다. 소분해서 냉동해두면 한 오십그릇 나올 거 같아서 대분해서 냉동해두었다. 한 삼십그릇 나왔다. 매일 아침 한달 정도 먹으면 다른거 할 수 있을 것 같다. 같이 사는 인간에게 같이 먹자고 권했으나 거절당했다. 몸에 좋은거랬더니, 과정을 다 봤다고 알지 못할 소리를 지껄였다. 참내 남들도 다 그정도는 때려넣고 요리한다 휴먼.

새해에는 내 손으로 청소도 하고 요리도하고

어찌됐든 좋은 시작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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