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쪼록 건투를 빕니다

by 기묘염

새해니까. 연초에 한 해의 계획을 세우거나 다짐을 하는 일은 해본 지 너무 오래돼서 이미 전생의 기억같다. 해가 가고 오는 것에 감흥이 없어진게 언제부턴지도 잘 모르겠다. 그냥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아 한해가 갔구나. 시간이 빠르구나. 새해구나. 그런가보다하며 보낸 지 오래다.
그래도 해가 바뀐다는 것은, 나이를 세는 인간에겐 좀 특별한 일인지라 새해라는 말이 질주하는 인생의 브레이크가 되어주는 효과는 있는 것 같다. 일테면 이런거다. 아 정초부터 이러지 말아야지 브레이크.
어제 왔던 진상이 죽지도 않고 또 와서 까꿍 하면 아 정초부터 열내지 말자.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기름진 야식이 땡기면 아 정초부터 막 살고 후회하지 말자.
늘 그랬던 것처럼 아무것도 하기 싫고 누워만 있고 싶어도 아 정초부터 너무 게으르지 말자.
요즘들어 더욱 흔하디 흔해진 무지성의 향연을 눈 앞에서 관람하고 누가 저런 개소리를 씨부리나 싶을 때도 아 정초부터 지적하지 말자.
그러니까 정초부터 살찌지 말고, 게으르지 말고, 욕하지 말고, 화내지 말고, 과소비하지 말고 여튼 뭐 아주 꼴리는대로 살지 말자라는 어떤 최후의 사이드브레이크 같은 게 작동하긴하는 것 같다.

1월1일엔 영풍 문고에 갔다. 아마도 이걸 신정특수라고 해야할 지 모르겠는데 맙소사 서점에 사람이 많았다. 책을 계산하는 데 그렇게 길게 줄을 서보긴 처음이였다. 책 진열대 사이의 통로를 오가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실례하면서 가야 한 적도 처음이다. 잠시만요 지나갈께요. 세상에 잠시만요라니. 서점에서 잠시마안? 물론 화장실 줄 서는 데만 인생의 삼분의 일을 소모하는 서울에서야 인구밀도 때문에 서점에 사람이 많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지방의 서점이 이렇게 붐빌 수 있다니.한강작가가 노벨상을 받았을 때도 이런일은 없었다. 왜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니 아마도 새해라서 지금과는 좀 다르게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이거나 혹은 아 정초부터 무식하지 말자 하는 브레이크 효과. 그도 아니면 새해 첫 소비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정초부터 대마초를 사는데 돈을 쓰긴 뭐하니까. 의미있는 소비로 한해를 시작해보자 하는 이 시대에 걸맞는 소비자의 정체성이랄까.

그래서 나도 새해 첫 소비는 책을 사는 것으로 시작했다. 올해의 첫 책은 조지오웰의 정치적인글쓰기 이다. 조지오웰의 에세이를 모았다는데 그가 워낙 또 정치적이였나보다. 계산하면서 보니 무려 32000이라 좀 충격받았다. 작가가 외국인이면 뭐 번역하는데도 환율 반영되나??! 이토록 비싼 책값에 아주 정치적인 의문을 던지면서 집에 돌아와 38000짜리 피자를 시켜먹었다. 마음에 양식에는 돈이 아까웠는데 몸뚱이의 양식에는 돈이 안아까운걸보니 세포는 기억하고 있나보다. 때깔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후자라는 것을.

일단 첫 소비는 영혼의 양식으로 시작해 죄책감을 덜었으니 마음 놓고 새해 맞이 소비를 양껏 했다.
매년 초에 교체하는 수건. 새해니까 분위기를 바꿔줄 장미꽃. 오래되서 뚜껑이 잘 안맞는 쓰레기통도 새로 샀다. 올해는 육아휴직도 계획되어 있고 하니 이제는 집에서도 요리를 좀 해야한다는 압박감에 냄비도 샀고. 요리하려면 육수같은거 필요하지 않나 싶어서 육슈팩도 사고. 그러고보니 집에 참기름이 있나? 요리를 시작하려면 고추장 된장 고춧가루 다진마늘 뭐 이런거 있어야 되지 않나? 뭐든 시작이 어려운 이유는 초기 자본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남편이 어차피 한달도 못갈 거 같은데 가성비 떨어지는 초기 비용 아니냐며 정초부터 초를 쳤다.
솔직히 맞는 말 같았으므로 정초 말다툼은 피할 수 있었다.
내가 또 비교적 인정은 잘 하는 편이다.

여튼 올해는 그렇다. 뭔가 지나친 의지를 보이거나, 거창한 계획을 세우거나, 인생을 바꿔보려는 무모한 시도는 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정도를 넘어서는 나태함은 좀 경계할 예정이다. 그냥 새해 브레이크가 걸린 이 마음처럼 아놔 정초부터 이건 아니지 싶은 일은 정초가 아니여도 좀 자제하며 살 예정이다.
늦었지만 새해니까 다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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