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조심스럽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물론 나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뭐 사고 싶은 옷이 있는데 독단적인 결정을 내리기엔 부담스러운 가격대라던가, 겨울이고 하니 스타일러를 하나 장만하고 싶다거나 (이건 내 욕망인가) , 인터넷에 떠도는 광고에 홀려 새로운 가전이 갖고 싶다거나 그런 종류의 아주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일 것이다. 같이 십 년쯤 살다 보니 표정만 봐도 안다. 지금 얼굴에 뒤집어쓴 것이 공적 자아인지, 사적 자아인지. 소비자의 정체성인지, 아버지로서의 정체성인지 남편으로서의 정체성인지. 남편의 얼굴에 떠도는 욕망은 소비자의 그것이었다.
그는, 피부과에 가고 싶다고 했다. 새해를 맞이하여 남성 수염 레이저 제모를 행사가에! 단돈 오십만 원에! 시술해 준다는 거다. 그것도 무려 10회를!!!!!!
그가 이 말을 할 때의 표정은 ‘이건 기회야!’였고
이 말을 듣는 나의 표정은 ‘얼씨구 조만간 행사가에 거세도 하겠다.’였다.
솔직히 나는 남의 욕망에 권력을 행사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다. 본인이 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지 본인이 하고 싶은 거 한다는 데 굳이 내 허락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공동양육자이자 경제공동체로서 형식적으로나마 서로에게 동의의 절차를 거치고 있다. 욕망에는 돈이 드니까.
당연히 나는 동의할 것이다. 내가 그럴 것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그도 안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몇 가지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
첫째. 나도 아직 안 해본 피부과 시술을 나보다 나이도 어린 니가 (감히) 먼저 시작하는가.
둘째, 여자도 아직 안해본 피부과 시술을 남자인 니가(감히) 먼저 시작하는가.
셋째, 수염도 거의 없는 니가 ( 단돈 오 시 입???? 오만원도 아니고 오십??) 그런 게 필요한 것인가.
넷째, 밖에도 거의 안 나가는 니가 , 술자리도 없고 회식도 없고 친구도 없는( 엄밀히 한 두어 명 정도 있다) 니가, 회사랑 집 말고는 갈 데도 없는 니가, 챔피언 니가, 니가 니가. 굳이 누가 본다고 그런 게 필요한 것인가.
니네 회사에 사람이 많길 하니, 교대라 많이 봐야 세 명씩 근무하지 않니, 그렇다고 회사에 이성이 있니 , 경쟁할 또래의 동성이 있니. 할 거면 진즉 해서 수염자국 없는 미소년과 결혼한단 소리라도 들어봤으면 내가 억울하지나 않겠다. 하는 등의 의문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으나, 심한 놀림과 절제 없는 의문은 일종의 폭력에 수렴할 수 있으므로 자제력을 발휘해 입을 다물었다.
내가 그를 잘 아는 만큼 그도 나를 잘 알아서, 내 얼굴에 떠오른 것이 흔쾌한 동의인지 자제력의 발현인지 금방 눈치챈 것 같았다. 그는 필요 이상으로 말이 많았다. 일테면 면도기가 하나에 몇 십만 원 하는데 이거 일 년 받으면 오히려 가성비가 좋다는 둥 (누가물어봤냐) , 이게 너가 몇 년 전에 사서 처박아둔 뷰티 디바이스보다 싸다는 둥( ..비겁하다 휴먼) , 수염자국이 거칠거칠해서 우리 집 7세가 뽀뽀하면 싫어한다는 둥 (수염 때문이 아니다 휴우먼) .
어쨌든 그는 신나게 돈을 지불하고 첫 번째 레이저 시술을 받았다. 그곳은 남성전용.. 이라기보다는 남성 레이저 제모 전용.. 에 특화된 이름만 피부과인 곳이었는데 젊은 남성들이 바글바글 했다고 했다. 인중 부분은 쥐어뜯는 것처럼 아팠는데 시술을 받는 곳에 제모하는 남성들을 위한 작은 곰인형이 놓여있었다고 한다. 걔를 두 손에 꼬옥 쥐고 아플 때마다 곰인형을 쥔 손에 힘을 주어 곰을 쥐어뜯으면 된다고 했다. 소파에 누워 리모컨을 한 손에 쥐고 고통을 함께 나눈 곰인형과의 추억을 신나게 이야기하는 그의 매끈해진 턱을 보면서 이 시대의 남성성을 고민해 보았다. 쥐어뜯기는 곰인형의 심정으로, 사라져 가는 것이 비단 수염자국뿐인가를 잠깐 고민했다.
이런 시대에 정상가족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함께 사는 가족은 사실 성별이 의미가 없다. 어느 순간 남자와 여자, 성별 나이를 초월해 그저 함께 곰인형을 쥐어뜯는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약하고 다정한 인간들만 남아 있는 것이다.
가족이 그런 거지 뭐. 세상엔 다양한 가족이 필요하고 형태야 어떻든 모두 그렇게 각자의 곰인형을 쥐어뜯고 그 경험을 비웃지 않고 나눌 수 있으면 족하지 않나 하는 아주 인류애적인 생각이 샘솟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