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건방짐을 배우는 시간

by 기묘염

이 시간에 집에서 팔자 좋게 일기를 쓰고 있다. 이런 날은 딱히 할 일도 없는데 시간이 야속하다.

오늘은 아침에 총괄국으로 교육을 갔다. 오전 열 시부터 2시까지 출장을 내고 들어오래서 들어갔는데 다시 사무실로 복귀하기 싫어서 반차를 썼다. 오후에 쉰다고 생각하니 교육도 귀에 쏙쏙 들어왔다. 회사에서 하는 교육에 이렇게 집중해 보기는 또 처음이다. 보험 교육이었다. 보험 에프씨들이 받는 교육이었는데, 회사 사정이 영 쉽지 않으니 에프씨들에게만 맡기지 말고 직원들도 좀 보험도 넣고 해 봐라 하는 차원의 교육이었다. 솔직히 나는 누구에게 보험을 권할만한 재주가 못 된다. 일단 잘 모른다. 보험이라는 게 워낙 종류가 많고, 사실 모집과 심사와 청구가 철저한 분업이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 확신을 갖고 보험을 권했는데 하필 이 사람이 걸린 병은 예외에 해당하거나, 약관의 어느 미묘한 부분에서 은밀하게 배제한대도 나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일단 나 자신을 못 믿겠고 그다음은 상대방을 못 믿겠다. 나는 아픈데 하나도 없어하고 호기롭게 사인하는 사람들은 알고 보면 거의 종합병동이라는 건 경험으로 깨우쳤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해줘도 실은 듣는 척만 하고 마음대로 생각하고 해석한다는 것도 알겠다. 나중에 본인의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직원이 알려주지 않았다. 직원이 나에게 사기를 쳤다 하면서 덤벼드는 것도 흔하다 못해 일상이기 때문에 보험을 모집하는 거 자체가 좀 두렵다.

영업이라는 것도 결국 이해관계의 충돌인지라, 고객의 이해와 모집자의 이해가 충돌해서 저 정도면 호구 잡은 게 아닌가 아니 저 정도면 사기에 가깝지 않나. 하는 놀라운 장면도 많이 목격했다. 그러니까 고객이든 모집자든 정보의 격차에 따라 발생하는 갑을 관계가 있고, 지위의 격차에 따라 발생하는 갑을 관계가 있어서 어느 한쪽이 온전히 갑인 경우도 다른 쪽이 온전히 을인 경우도 없다. 서로 속고 속이고, 밀고 당기고 누군가는 등을 치고 누군가는 덜 치고 누군가는 최대한 안치고 정도의 차이일 뿐, 결국 교육에서 강조하는 서로를 위한 공생과 실제 현장은 괴리가 있다.

그래서 금융권 종사자이면서도 늘 보험과는 좀 거리를 두고 살았다. 모집으로 얻는 금전적 수익보다, 포기에서 얻어지는 정신적 편안함을 추구하는 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얼마나 계급적인 사고인지, 오늘 문득 깨닫고 왔다. 물론 내가 뭐 대단히 계급적 우위에 있다 이런 말이 아니다. 재력으로 따지면 나보다 에프씨님들이 훨씬…. 월등하시다.

그런데 내가 취하는 태도. 금전적 수익보다 정신적 편안함을 추구하겠다 하는 자족적 포기가 실은 포기가 아니라는 것, 해서 안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래도 되기 때문이라는 것을 번뜩 깨달았다. 뭐 월급이 많든 적든 그 액수를 떠나서 비교적 안정적인 직장에서 생계에 위협을 느끼지 않으며 살아가는 제도권 안의 사람이 갖는 어떤 고고한 오만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계에 임하는 태도, 자기 직업에 갖는 적극성 같은 것들이 오늘 하루 교육에 참석한 직원들과 에프씨님들이 너무 차이가 나서 그 열정이나 경쟁적이고 맹렬한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좀 반성을 하게 된 하루였다. 어디 가서 건방진 소리 찌끌이지 말고, 조용히 성실하게 살아야겠다. 에이 난 그 수당은 포기하고 말지 난 이런 거 못해 이딴 소리는 입밖에 낼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어차피 입밖에 내나 안내나 못하는 건 못하는 것이므로 못하더라도 입 다물고 그냥 못하면 된다. 못하는 것이 마치 선택인 것처럼 (사실 성격이나 체면이나 다른 이유들 때문에 선택이 아니라 진짜 무능한 거면서!!) 나 자신을 포장하는 일이 , 타인의 생계에 대해 나는 못하네 하네 왈가왈부하는 일이 얼마나 무례한 일인지 생각해 보게 된 시간이었다.

이 정도면 진짜 성공적인 교육이었다고 본다. 당장 달라지는 스킬은 없더라도 여튼 뭐라도 배웠으니까.

게다가 오후 휴식까지 얻었으니, 이토록 완벽한 하루가 어디 있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오후가 저녁이 되고 있다.

아무래도 우리 집 어딘가에 시간도둑놈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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