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출근길은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 자동차 전용 80미터 도로로 가는 길과 강변을 낀 골목으로 들어가 어린이집과 초등학교를 지나는 어린이 보호 구간으로 가는 길이다. 특별히 급한 일이 없다면 언제나 후자를 선택한다. 출근시간과 등굣길이 겹쳐 아수라장이 된 도로를 좋아한다. 아이들은 횡단보도에 불이 켜지면 실내화 가방을 흔들며 냅다 달린다. 잠그지 않은 점퍼는 전혀 각이 맞지 않는다. 어깨에 맨 가방끈도 마찬가지다. 한쪽 가방끈은 점퍼와 함께 이미 팔꿈치까지 내려간 채 뛰는 애들도 있다. 저 앞에 보이는 친구의 등을 때리러 사력을 다해 달려가는 애들도 있고 이미 만난 친구들과 정신없이 얘기를 하며 가는 애들도 있다. 등굣길의 아이들 무리엔 없는 색깔이 없다. 칼라풀한 무더기가 길을 건넌다. 물론 아이들은 누구도 나를 보지 않는다. 다가오는 차도 멈춰 선 차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주변을 보지 않는 아이들을 위해 고령의 자원봉사 어르신들이 교통정리를 한다. 다소 과장된 제스처로 차들의 앞을 가로막다시피 두 팔을 벌리며 횡단보도를 막아서는 어르신과 그 뒤에서 앞만 보고 달리는 칼라풀한 아이들, 그 뒤에 그림처럼 흩날리는 벚꽃잎을 보고 있으면 뭐랄까.... 오그라드는 표현들밖에 떠오르지 않으므로, 그저 출근길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 정도로 해두자.
시속 30킬로의 단속카메라 사이를 브레이크를 밟은 상태로 천천히 운전하면서 이삼십 킬로가 저 아이들을 잘 보호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앞만 보고 입을 벌린 채 뛰는 아이들의 속도가 생각보다 빨라서 나의 삼십 킬로와 아이들의 뛰는 속도가 만나면 무척 파괴적인 속도가 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들을 하다보면 민식이법을 두고 사람들이 했던 폭력적인 언사들도 함께 생각난다. 나는 그 사람들이 등굣길의 아이들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라고 확신한다. 어떤 부모도 자기 자식의 이름이 내걸린 법이 만들어지는 걸 원치 않는다. 법 앞에 걸린 사람들은 김영란 씨를 빼곤 대부분 원치 않는 사건의 피해자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한 부모가 아이를 잃고 다른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잃은 아이의 이름을 내놓았을 때 사람들이 내뱉은 말들은 폭력적이다 못해 파괴적이었다.
민식이 법을 노리고 주차된 트럭 뒤에서 내 차로 뛰어드는 영악한 아이들을 걱정하는 어른들이라니. 부끄럽다 못해 수치스러웠다. 설령 그런 아이가 있다한들 그런 아이로 인해 돈을 갈취당한 어른이 더 많을까 빠르게 달려오는 차에 교통사고를 당한 아이가 더 많을까. 혐오는 정말이지 언제나 닮아있다. 그리고 그 칼날은 어김없이 약자를 향한다. 조심해도 어쩔 수 없는 사고를 걱정하기보다 먼저 속도나 잘 지키면 좋겠다. 조심해서 다니면 사기를 당할지언정 살인은 안 하겠지. 아이들을 위해 어른은 그저 조심하면 된다.
아이들이 길을 건널 때마다 팔을 대자로 뻗어 횡단보도를 지키는 할아버지를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웃게 된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게 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