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장종지만 한 너그러움.

by 기묘염

비염이 심해서 새벽 여섯 시에 기상했다. 살기 위해 마신다는 작정으로 출근길을 한참 돌아가야 하는 스벅에 들렀다. 생각보다 줄이 길지 않아서 기분 좋게 들어갔는데 이십 분을 대기해도 커피가 나오지 않았다. 드라이브뜨루의 특성상 차 사이에 끼어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초조함은 분노가 되고 분노는 체념이 된다. 여섯 시에 기상했지만 결국 지각하게 된 어이없는 상황이 황당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25분이 지나서야 내 차례가 되었다. 이미 앞과 앞과 앞에서 엄청난 컴플레인을 받은 것 같은 종업원이 사색이 된 얼굴로 거듭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앞에서 커피를 너무 다량으로 시키신 분이 있어서 너무 죄송합니다.

가 그렇게 사과할 일은 아니다 싶어서, 여유를 가장하며 괜찮다고 웃어주었다.

물론 그렇게 여유로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냥 한번 웃고 관대한 척을 하니, 정말 관대한 인간이 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아르바이트생의 잘못도 아니고, 그저 오늘 그 시간에 거기서 커피를 산 내 운이었을 뿐, 관대할 것도 말 것도 없는 일이다, 내가 베풀 권리도 없는 관대함에 도취되어 기분 좋게 커피를 마셨는데,

아뿔싸 담배꽁초가! 는 아니고, 담배꽁초 맛이 나는 아메리카노였다. 것도 아주 뜨거운.

나는 라떼를 시켰는데.. 생각지 못한 향과 뜨거움의 폭격에 입천장이 다 데인 나는 내가 잘못시켰는지 어플을 확인했다. 영수증에는 카페라떼라고 나와있고 결재도 카페라떼 가격이었다. 순간 벌컥 화가 나서 다시 돌아가 라떼로 바꿔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이미 그곳을 벗어났고 심지어 지각이었다. 다행히 커피 한잔보다는 직장이 중요하다는 이성 정도는 남아있어서 혼자 차 안에서 중얼중얼 욕을 하며 가던 길을 갔다.


기분 잡쳤다며 혼자 욕을 지껄이다가 곰곰 생각해보니. 이게 이렇게 욕을 지껄일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커피 한잔이 잘못 나왔을 뿐이고 인간은 누구나 실수한다. 심지어 그 애는 오늘 힘든 아침을 보냈고, 수많은 사람들의 질타를 받았으며 본인은 최선을 다했고 잘못한 것이 없지만 눈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게 수십 번의 사과를 한 상태였다. 그런 정신에서 라테 한잔을 아메리카노 착각해서 준 것이 뭐 그리 큰 잘못이라고 나는 운전 내내 화를 내고 있는 걸까.

물론 나는 원래 아메리카노를 먹지 않는다. 하지만 못 먹는 건 아니고 안 먹는 거라서, 그냥 오늘 하루 정도 마실 수 있는 일이다. 내가 더 낸 금액은 천원도 안되는데 그 정도는 그냥 더 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나는 내가 싫어하는 성질 급하고 화가 많은 다혈질의 고객님들을 닮아가고 있는 것인가?

뭐시기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뭐시기가 된다더니 나는 진상이 되어가려는 것인가?! 

잠깐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생각을 거듭해본 결과, 나는 아메리카노에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막연한 기다림의 시간과 지각에 대해 책임질 누군가가 필요한 거였다. 관대한 척했지만 사실은 그때부터 화가 나 있었던 거다. 이건 나의 탓도 아니고 그의 탓도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다량을 주문한 고객의 탓이었고 사실상 다량을 시키든 한 개를 시키든 그건 그 사람 맘이다. 그러니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기에 나라는 인간은 너무 옹졸했던 거다.

간장종지만 한 나의 마음을 들여다본 후 더욱더 더러워진 기분으로 출근을 했다.


덕분에 나의 고객들에게 오늘은 좀 더 관대해 질 수 있었다

평소라면, 왜저래.. 왜저렇게 화가 많아. 이게 내잘못이야?? 하고 날카로워 졌을 일이 더 너그럽게 이해되는 기분이였다. 나 때문이 아니다. 저 사람은 그저 오늘 하루종일 되는 일이 없었던 거고 그걸 탓할 누군가가 필요 한데 그 앞에 하필 나란 인간이 앉아있었을 뿐이다.

저 인간이 화를 내는 것은 저인간의 지랄 같은 성품 때문이라기 보다는 ( 물론 성품이 지랄 같은건 사실이지만) 저 인간의 예의 그 티스푼만한 마음 때문이다. 인간이 덜 된 것을 누굴탓하랴. 티스푼을 이해하는 간장종지의 너그러움으로 오늘 하루를 보냈다.

담배꽁초맛 아메리카노를 준 알바생에게 고마움을 돌리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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