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목적
여행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있을까?
코시국 전에는 주기적으로 여행을 다녔다. 여행을 다닌다고 해서 딱히 견문이 넓어진다거나, 내 인생의 가치관이 바뀐다거나 하는 대단한 경험은 해본 적이 없다. 나는 그저 여기가 지겨워서, 일상이 답답해서 평소와는 다른 새로운 이벤트를 만들고 싶어서 나갔을 뿐이다. 여행지를 찾고, 계획을 세우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갔다. 나름대로 뭔가 하고 있다는 느낌. 평소와는 달리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한다는 그 기분 때문에 충동적으로 여행을 계획하곤 했다.
막상 나가면 별것도 아니었다. 여행은 일종의 쇼핑 같았다. 내가 사는 것이 계획적이든 충동적이든 간에 막상 사고나면 닳거나 지겨워지는 소모품 같았다. 차이가 있다면 내가 사는 것이 물건이 아닌 공간이라는 것뿐이다. 모두가 좋다는 곳을 찾아 비슷하게 코스를 짜고, 유명한 것을 먹고 평이 좋은 숙소를 찾아 예약한다. 후기와 사진들은 또 어찌나 자세한지, 막상 그 자리를 찾아가 보면 이미 와봤던 것 같은 식상함까지 경험할 수 있다. 여행에서 현지인과 나눌 수 있는 대화는 고작해야, 이것 좀 깎아주세요 너무 비싸요. 어떤 게 맛있나요? 고수는 빼주세요. 택시 타는 곳은 어딘가요? 박물관 출구를 못 찾겠어요. 정도다. 여행이 가치관을 , 때론 생각과 행동까지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걸까? 경험의 확장이란 그저 많은 것을 보고 새로운 음식을 먹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 핸드폰이 없는 시절이라면, 낯선 곳에서 들은풍월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 나가야 하는 그 시절이었다면 뭔가 달랐을까?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약간 회의감이 들었다. 아주 비싼 쇼핑을 하고, 백화점을 나설 때의 그 기분. 좋으면서도 후회스럽고, 약간의 죄책감과 뿌듯함이 뒤섞인 이상한 기분이었다.
코 시국이 시작된 후로는 국내여행을 많이 다닌다. 이제는 아이를 데리고 하는 여행이기도 하다. 아이를 데리고 여행을 다니는 것은 쉽지 않다. 굳이 나가라고 등 떠미는 사람도 없지만, 이제 여행을 다니는 핑계가 좀 더 다양해지긴 했다. 일과 육아에 지쳐서 휴식이 필요하니까, 혹은 아이에게 뭔가 새로운 것을 많이 보여줘야 할 것 같아서. 막상 나가면 휴식이 아니라 고행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고, 집에 있는 냉장고도 매일 새롭게 열어보는 아이가 나간다고 딱히 더 새롭게 즐거워하는 것 같지는 않다.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서부터는 여행은 더 확실한 쇼핑이 되었다. 아이를 데리고 가도 불편함이 없을만한 더 깔끔한 숙소 (반드시 수영장이 있어야 한다. 어떻게든 에너지를 빼놓지 않으면 잠자는 법을 잊어버린다.) 아이가 먹기에 무난하고 익숙한 맛의 음식, 비상시 대피할 만한 편의점(여기서 비상이란 이유를 알 수 없는 아이의 난동이다. 아직까진 마이쭈나 막대사탕 정도면 대참사는 피할 수 있다.), 주변에 아쿠아리움이나 케이블카나 자전거 대여소, 하다못해 근방에 키즈카페라도 있는 곳을 선택한다. (거기까지 가서 키즈카페에 처박힐걸 왜 기를 쓰고 집에서 나가 여행을 하겠다고 용을 쓰는지 나 자신이 이해되지 않는다)
이상한 건 예전보다 더 만족스럽다는 거다.
예를 들면 순천만 습지에서 가운데 아이를 태울 수 있는 이인용 자전거를 탄다. 쓸데없이 지붕이 많이 달려서 동남아에서 내달리는 화려한 관광객용 리어카를 개조해 놓은 것 같이 생긴 거다 ( 그곳에선 흥정을 잘하지 않으면 택시보다 비쌀 수 있다. 오토바이 사이를 리어카 위에서 덜컹거리며 여왕처럼 고상하게 손을 흔들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한다. 내향적인 사람은 얼굴도 못 든 채 먼지만 뒤집어쓴 안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 여하튼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논밭 사이를 헉헉대며 자전거 페달을 굴린다. 오른쪽 귀로는 쥐처럼 찍찍대는 철새소리를, 다른 쪽 귀로는 신난 아이가 부르는 로보카폴리 주제가를 열 번 정도 들으면 이상하게 아무 생각이 없어지면서 가슴속에 고요와 평안이 찾아온다. 그러다가 잠시 자전거를 멈추고 망원경이 설치된 정자로 올라가서 멀리 날아다니는 철새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 깊은 곳에서, 아 나 지금 빡세게 살고 있구나 싶은 충족감이 올라온다.
혹은 커다란 아쿠아리움에 아이를 데리고 들어간다. 저것 좀 봐 바다사자 아저씨네? 인사해. 우와 하얀 고래잖아? 엄청 크다. 바다사자 아저씨 발가락 다섯개네?? 거북이 좀 봐. 아니야 큰 달팽이 아니고 거북이야. 응 쟤들은 펭귄이야. 이 물고기는.... 형광색이네?? 아 이건 해파리다 해파리. 하는 말도 안 되는 설명을 곁들이다 보면, 아 나는 아는 것도 없는데 상상력도 없는 인간이구나 하는 자아성찰을 할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공감이라고는 이런 데 갇혀 사는 물고기들은 답답하겠다 하는 정도고 , 내가 할 수 있는 긍정적인 생각이란 그저 아 그래도 난 물고기는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의심이라곤 근데 그게 다행이 맞나? 하는 정도의 상황에 몰리면 별일 없는 일상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도 있다.
침대 크기나 어매니티의 생산지 차이를 빼면 어딜 가나 거의 비슷비슷한 호텔에 누워서 잠든 아이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으면 어쩌면 행복 비슷한 감정이 느껴질 때도 있다. 상전의 비위를 맞추러 온 것 같은 이 여행 같지 않은 여행이 뭔가를 기대하며 다녔던 여행보다 더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중요한 건 어떤 공간을 구매하느냐가 아니었던 것 같다. 시간을 되돌린다면 매번 더 나은 여행을 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