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고 기다리던 삼차 백신의 날이다. 백신이 달갑든 말든 그런 건 이미 고려사항이 아니다. 오늘이 석가탄신일이든 크리스마스든 중요치 않은 것처럼. 부디 세상을 밝힐 사람들이 더 많이 태어나 쉬는 날이나 늘어났으면 하고 바라는 지친 직장인에게 백신은 그저 공가의 날일 뿐이다.
그렇다. 나는 오늘 공가를 냈다.
평일에 쉰다고 해서 늦잠을 잘 수 있는 건 아니다. 늦잠은 잘 수 없지만 조금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일어날 수는 있다. 좀 더 너그럽게 아기를 깨우고 입히고 먹이면 뭐랄까 좀 더 좋은 엄마가 된 것 같은 착각이 일기도 한다. 마치 늘 그랬던 것처럼 여유를 부리며 아주 천천히 어린이집에 데려다주었다. 집에 돌아와서 내 몫으로 남겨둔 사과 반쪽을 우아하게 베어 무는데 배가 아팠다. 이상한 일이다. 쉬는 날만 되면 몸이 먼저 신호를 보낸다. 오늘은 좀 건강해도 되지 않아? 하는 것처럼 다정하게 배가 아프다. 다정한 신호에 이끌려 기분 좋게 화장실에 들어가면 시원하고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내 장은 과민하지도 않고 너무 둔하지도 않다. 새로운 음식만 먹으면 화를 내는 보수적인 장도 아니고, 그 무엇을 먹어도 편안하기만 한 개방적인 장도 아니다. 나는 적당히 반응하고 적당히 무심한 장을 가졌다. 그런데도 늘 만성 변비에 시달리곤 한다. 아마도 의연한 내 장을 따라가지 못하는 유약한 내 영혼 때문인 것 같다. 일단 나는 회사에서는 큰 일을 볼 수 없다. 9급이건 5급이건 같은 화장실에서 공평하게 똥을 쌀 수 있다는 그 원초적인 평등함에도 불구하고 잘 안된다. 화장실에서 마주치면 서로 밝게 웃으며 안부를 나누는 적당히 친밀한 얼굴들이 불편하다. 언제든 걸맞은 표정의 가면을 뒤집어쓸 수는 있지만 내가 남기는 냄새에는 적당한 가면이 없기도 하고. 꼭 그런 게 아니라고 해도 그 한 칸짜리 좁은 공간에 들어가서 옷을 내리고 변기통에 걸터앉아 있으면 뭐랄까. 적절하지 못한 장소에서 무장해제된 기분이랄까. 나 자신이 약하고 작고 무능하고 고독하게 느껴진달까.
아침에 일어나면 시간에 쫓겨 출근하기도 바쁘고, 막상 출근하면 이런저런 유약하고 옹색하고 멍청한 이유들 때문에 볼일을 볼 수가 없다. 아니 애초에 내 영혼을 불쌍히 여긴 몸뚱이가 신호를 보내지도 않는다. 집에 돌아가면 바로 저녁 먹을 시간이고 우리 집 어린이를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재우고 나면 이미 열 시가 넘는다. 아이가 잠들고 나면 피곤에 절어있는 내 몸뚱이를 간신히 일으켜 스스로 씻기고 입혀야 한다. 그 후엔 이미 모든 욕망과 의지가 사라지고 그저 소파에 좀 몸을 붙이고 제발 한 시간이라도 온전히 내 시간을 갖고 싶다. 아무 생각 없이 멍청히 누워 티브이를 보거나, 함께 먹이고 씻기고 입히느라 고전 분투한 나의 육아 동지와 농담 따먹기를 하거나 정말 드물게는 책을 좀 읽으면 자정이 넘어버린다. 그러면 나의 장이 일으킨 소소한 운동은 또다시 망각 속으로 밀려나 아침을 맞게 되고 똑같은 일이 주 5일 반복된다.
변비란 무엇인가.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생리적인 현상인가. 개인의 식습관 신체적 활동량 혹은 체질 탓인가? 우리의 가장 내밀하고 은밀한 사생활마저 온전히 우리의 것이 맞다고 확신할 수 있나? 나는 쉬는 날이면 쾌변을 한다. 습관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 주말에만 하는 게 아니라 불규칙하게 찾아오는 모든 빨간 날과, 내가 내는 모든 연차와 모든 공가, 때때로 하는 이른 퇴근, 평소보다 한 시간만 짬이 나도 놓치지 않고.
나는 내 노동과 시간을 팔아 나와 내 가족을 부양한다. 내가 파는 시간은 곧 나의 모든 것이다.
이를테면 먹고 싸는 것을 포함해서 그것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들.
여하튼 나는 오늘 쉬었고, 오늘 나의 장은 안녕하다.
나의 시간을 사는 그 누구인지 무엇인지 모를 거대한 것의 장은 오늘 하루 안녕하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