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화 전 장관을 처음 봤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하얀 머리였다. 나이 들면 저런 머리를 하는 것도 괜찮겠다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는 자연스럽게 나이 들고 싶고, 하얀 백발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고 싶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이가 들었을 때’ 얘기다. 검은 머리 사이에서 한올 두올 돋아나 자기주장을 하는 흰머리를 보는 것은 전혀 괜찮지 않다. 밤에 아이를 재워놓고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미간에 주름을 잡아가며 내 정수리를 올려다보는 것은 내가 꿈꿨던 ‘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초연함 ’과는 거리가 멀다. 어젯밤 세수를 하다 말고 또 거울을 들여다봤다. 정수리에 삐죽 나온 흰머리 하나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미간을 잔뜩 구기고 눈을 한껏 위로 치켜뜬 채 양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더듬어 가며 하나를 뽑아냈다. 하나를 뽑으니 욕심이 생겨 머리털을 들추고 흰머리를 탐색하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한 서너 개쯤 찾아내다 문득 , 거울 속의 나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인상을 잔뜩 구긴 채 눈을 치켜들고 머리 위로 양손을 올리고 있는 저 여자는 누구인가. 인간의 조상은 유인원이거나 오랑우탄이거나 그런 거라더니 과연 그렇군 하는 모습이었다.
흰머리를 뽑는 것은 여드름의 농을 짜내는 것과는 다르다. 둘 다 중독성이 있다는 건 부인하지 않겠지만 수많은 머리털들을 고르고 골라 간신히 가느다란 흰머리 하나를 떨리는 양 손가락 사이에 집어내고 당길 때의 느낌은 하얀 농이 툭 튀어나올 때의 쾌감과는 다르다. 약간의 자괴감과 아주 미세한 농도의 회한, 허무함과 씁쓸함에 더한 이상한 쓸쓸함. 거울 앞에서 쓸데없이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는 혼자만의 고독 , 세상에 혼자 서있는 것 같은 느낌이지만 그렇다고 그 거울 앞에 누군가와 함께 서고 싶지도 않은 기분이다.
어릴 때, 화장대에 앉으면 몇 분이고 앉아서 미간에 힘을 주고 눈을 치켜올려 위에 흰머리를 뽑던 엄마가 기억난다. 그땐 그 광경이 이상했다. 저렇게 뽑는다고 흰머리를 막을 수 있을까. 차라리 염색을 하라고 짜증을 냈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 내가 그 시기를 지나가고 있는 모양이다. 엄마가 나를 목격자 삼아 지나던 그 시기를 나는 어린 아기를 재워두고 홀로 화장실에서 견뎌내고 있다. 그땐 늙는걸뭐쩌겠어 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언제나 담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늙음이라는 것이 강경화 장관의 머리카락처럼 하얗고 단호하게 찾아오는 줄 알았다. 수많은 검은 머리 사이에 몇 가닥씩 돋아나 서서히 잠식하게 되는 것임을 상상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그때 엄마의 나이는 삼십 대였다. 지금의 나 역시 마찬가지다.
아마도 내가 서서히 늘어나는 흰머리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다. 지금은 내 눈에만 보이는 노화의 서막이지만 언젠가 모든 것이 하얗게 변하기도 전에, 그 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새치염색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도 이제 알 것 같다.
그때, 화장대에 앉아 두 팔을 올리던 엄마에게 좀 더 친절할 걸 그랬다. 그 몸짓이 항복의 복선이었다는 것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