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은 내가 한다. 너는 그저 느껴라.
어제 아침엔 출근 준비를 하느라 잠에서 깬 아이가 나를 찾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씻고 나가니 시무룩해진 아이가 아빠품에 안겨서 거실로 나오고 있었다. 아이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엄마가 이미 출근해버린 줄 알았을 테니 나를 발견하면 기뻐서 달려올 줄 알았는데, 나를 보더니 입을 씰룩거리며 '저리 가!' 라며 서럽게 울어버렸다. 내가 집에 있으면서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서운함을 느낀 것 같았다. 미안하다고 사과했는데도 한참만에 서러운 울음을 그쳤다.
애들은 잘 운다. 애들의 울음은 다 같아 보이지만 모두 다르다. 이 작은 인간이 느끼는 감정은 어른의 것만큼이나 다양하다. 서러움 억울함 놀람 슬픔 기쁨. 아직 표현에 서투른 애들은 이 모든 것을 울음으로 표현할 뿐이다. 그저 단순하게 내가 없는 줄 알았는 데 있어서 기쁘겠지?라고 생각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단순한 건 아이가 아니라 나다. 나는 아이를 동등한 인간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보다 단순하고 쉬운 애일뿐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많은 노력과 눈치가 필요한 일이다. 내가 아이에게 그만큼의 노력과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나는 아이를 아이로 대하는 것에 익숙해 나와 아이가 동등한 인간이라는 것을 종종 까먹는다.
나는 약자를 대하는 강자의 익숙한 방식으로 아이를 대한다.
아이의 감정을 신중하게 헤아리기보다 내 감정을 섣불리 표현하는 일이 더 많다.
아이의 감정을 쉽게 지레짐작해 판단하면서 아이가 내 감정을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답답해한다.
아이를 충분히 존중하기보다, 훈육을 빌미로 아이에게 존중을 강요하는 일이 더 많다.
아직 미숙한 인간이 더 미숙한 한 인간을 길러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지만, 아이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내 허를 찌른다. 어른은 아이를 가르치는 존재가 아니다. 어른과 아이는 상호작용 속에서 서로를 가르치고 함께 성장하는 존재다. 가끔은 아이의 한마디가 나를 부끄럽게 하고, 때론 나를 모방하는 아이의 행동에 나 자신을 돌아보곤 한다.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노력과 성실은 내가 특별히 잘하는 일은 아니지만, 아이를 기르면서는 나에게 부족한 이 덕목들이 특별히 아쉬워졌다.
저녁엔 남편과 아침에 일어난 일을 얘기했다. 아침에 나에게 저리 가 라고 하면서 그토록 서럽게 운 걸 보라고, 그 조그마한 존재가 느끼는 감정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고. 인간의 복잡한 감정들을 이 작은 인간들은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고. 우리가 좀 더 섬세할 필요가 있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남편이 불쑥, "그래 아침에 배신감 느낀 거야 애가."라고 했다. 아니 이건 또 뭔가.
나는 서운함이라 표현했는데 남편은 배신감이라고 표현했다.
아이가 느낀 감정은 서운함인가 배신감인가.
서운함과 배신감은 애초에 같은 감정인데 표현하기 나름인 건가?
우리는 이 미세한 감정들을 다룰 만한 감수성이 부족한 건 아닐까. 아니면 인간이 느끼는 감정들은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방식으로 느끼고 표출하는 걸까? 애초에 감정이라는 것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규정하기 나름인 걸까? 그러니까 그런 순간에 내가 느낄만한 감정은 '서운함'이고 남편이 느낄만한 감정은 '배신감' 이였던 걸까?
우리는 답을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스스로가 붙여놓은 감정의 이름에 근거하여 타인의 감정을 추측할 뿐이다. 곰곰 생각해보니 서운함과 배신감은 맞닿아 있고, 어쩌면 같은 감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이에게 어떻게 감정의 이름을 붙여 주어야 할까.
"어이구 우리 아기 서운했어? 엄마가 미안해 "
"어이구 우리 아기 배신감 느꼈어? 엄마가 미안해. "
아무래도 서운함쪽이 낫지 싶다는 것엔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있었다.
아이는 우리가 붙여준 이름대로 감정을 느낄 것이다.
아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의 이름은 '서운함'이구나.
배신감은 좀 더 농익은 다음에 느껴보도록 하자 아가야.
역시 부모 노릇은 어렵다. 감정 감별사까지 되어 심사해서 이름까지 붙여 준 후 알려주기까지 해야 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