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느끼한 이야기.
지친 땡벌은 걷습니다!!
걸었다. 눈 뜨면 무의식적으로 몸뚱이를 옮기기 위한 걸음 말고 걷기 위해 걸었다. 차가 없던 시절, 직업이 없던 시절, 지금보다 어렸을 때, 결정적으로 아직 아이가 태어나기 이전의 시절처럼. 차도 옆에 마지못해 만들어 둔 좁은 보도블록이 아닌, 그저 걸어보라고 만들어둔 강변의 산책로를 혼자서(이게 가장 감격스러운 대목이다) 걸었다. 매일 아침 출근하면서 차창밖으로 힐끔 바라보며 달리던 길을 처음으로 걸었다. 진심으로 프랑스에서 그 유명한 강 옆을 걷던 것보다 좋았다. 나는 좀처럼 느끼한 감상에 빠지는 편이 아니지만 오늘만은 정말로 그랬다.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잊고 있었던 감각 중에 이런 게 있었구나 싶었다. 고등학교 땐, 자율학습이 끝나면 만원 버스를 피해 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먼 거리였지만 친구와 함께 터벅터벅 걸을 때, 그 길은 언제나 짧았다. 그 밤길, 그때의 바람과 색깔이 아직도 떠오른다. 그 거리가 유난히 짧게 느껴지는 아쉬운 밤엔 높은 곳에 위치한 문화회관의 난간에 앉아서 도시를 내려다보며 한없이 재잘대다 갔다. 어떤 이야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의 감정은 지금도 기억난다. 대학교 땐, 술을 마시고 걸었다. 새벽인지 저녁인지 애매했던 안개 낀 축축한 밤길이 떠오른다. 그때 술을 함께 마신 친구와 학창 시절 함께 밤거리에 주저앉아 있던 친구는 같은 친구다. 내 인생 최초의 행운은 어쩌면 그 친구인 것 같다.
내가 일군 나의 새로운 가족과 더불어 내 삶을 지탱하는 하나의 축이다.
가끔은 정말로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 생각할 때가 있다. 온갖 화려한 것들로 가려진 공허한 생존의 본질이 두려울 때면 이런 것들을 떠올린다. 그 밤길. 하염없이 터벅거리던 발소리. 그때의 기분. 발바닥이 땅에 닿을 때의 가벼운 진동. 맞잡었던 어린 손들.
끝내 나를 지탱하게 하는 것은 이런 것들일 것이다. 내 아이의 작고 동그란 뒤통수와 주저앉아 집중하고 있는 완만한 등과 함께 말이다.
이 사실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겠다. 지치는 모든 순간들마다. 사람은 어린 시절 서로의 비밀을 털어놓던 후련함과 그 밤에 느꼈던 든든한 연대감, 인생의 사소했던 순간마다 특별함으로 남은 몇몇 사람들과의 기억들, 아이가 옆에서 감정이라곤 하나도 담기지 않은 해맑은 톤으로 '난 이제 지쳤어요 땡벌!'이라고 고래고래 신나게 노래부를 때 터지는 웃음으로 살아가는 거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