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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묘염 Mar 05. 2023

노화와 육아 사이

번아웃이 온 것 같다. 번아웃이라고 쓰니 너무 거창해서 대체할만한 우리말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잘 모르겠다. 무기력증? 지겨움? 회의감? 체력고갈? 난 이제 지쳤어요 땡벌. 모르겠다.  인생도 중간에 타임을 외치고 잠깐 링 밖으로 꺼질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줬으면 좋겠다.

와중에 아이는 유치원에 들어갔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힘들거라 생각했는데,  첫날부터 넘나 신나게 놀고 와서 간식으로 나온 떡볶이가 얼마나 맛있었는지를 떠들어댔다.  일을 하면서도 하루종일 초조하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분리불안은 아이가 아니라 내가 겪고 있는 것 같다.


몇 주 전부터 왼쪽 눈 아래쪽에 뭔가 작고 검은 점 두개가 떠돌아다니는 것 같다. 말로만 듣던 비문증인가 . 우리 할머니가 ,그러니까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늙어있던 우리 할머니가 내가 한참 자라서 더 늙었을 때 호소했던 그 증상과 일치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어지간해서는 정말로 병원에 잘 안가는데, 일을 하면서 시간이 없단 핑계로 더더더더 미련할 정도로 병원에 안가는데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병원으로 바로 달려갔다. 하필 대학 입학을 앞둔 방학기간이라 라식을 하러 온 들뜬 젊은이들 틈에서 홀로 우울하게  노안을 염려하며 두시간을 기다렸다.

그 진단명조차 늙고 고루하고 지긋지긋하하게 들리는 비문증이 맞았다. 고도근시자들에게 잘 생기고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일 수도 있다고 했다. 요즘 스마트폰이 어쩌고 컴퓨터가 어쩌고  근시가 어쩌고 하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사실 조금  안도했다. 번아웃을 호소한 인간 치고는 겁이 많다. 소중한 것이 많아서 두려운 것도 많다. 번아웃이라니 ,번아웃이고 나발이고 가진 것 없고 지킬 것 많은 인간은 딱히 대안도 해결책도 없다. 그저  지긋지긋한 일을 성실히 하고 돌아와  그 지긋지긋함에 안도 하고 , 안도하는 자신을 혐오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비교적 훌륭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교 3학년 땐가, 갑자기 한 쪽 눈이 보이지 않았다. 해가 쨍한 여름날이였다.  밝고 선명하고 뜨거운 날에  나무도 잔디도 온통 초록색이던 교정 한가운데 서서 식은땀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너무 믿을 수가 없어서 잘 보이는 한쪽 눈을 한 손으로 계속 가리면서 우두커니 한 자리에 서서 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잘 보이는 한쪽 눈으로 뜨겁고 쨍한 길을 노려보며 걷는데 정문에서 정류장까지 가는 그길이 너무 무서워서 세상이 비틀거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게 기억난다. 서울대병원에  입원을 시켜놓고 아빠 혼자 집으로 돌아가면서 폭우가 쏟아지는 고속도로에서 통곡을 하며 운전을 했다는 얘기는 나중에 그저 지나간 에피소드로 웃음을 곁들이며 듣게 되었다. 삼일간 스테로이드를 링거로 쏟아붇고 돌아왔다. 엄마아빠에게 에피소드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지만, 사실 다 돌아온 건 아니다. 지금도 햇볕이 좋은 날이면 잠깐 서서 한쪽 눈을 가리고 오랫동안 앞을 본다. 스테로이드가 돌려준 작은 동그라미 속으로 들어오는 아주 작은 세상을 보면서, 이 동그라미가 원래 이랬는지 아니면 좀 더 작아진 건 아닌지 불안해하곤 한다. 그 땐 엄마아빠를 떠올렸는데, 지금은 아이를 떠올린다. 익숙해지고 신경쓰지 않아서 잘 몰랐는데 비문증때문에 신경을 쓰다보니 오늘 유난히 동그라미가 작게 느껴져서, 하루종일 우울감이 가시질 않는다. 큰 병원을 다시 한 번 예약해 볼까.


느닷없이 서럽다. 아마 오늘 아이가 저녁 내내 짜증을 내며 서럽게 울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잠이 오면 자면 되지 왜 나한테 화를 내나.  엄마한테 그만 화내라고 한마디 해놓고 나서 서럽게 우는 애를 보니 그냥 받아줄껄 싶어서 애처로워졌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낮잠을 자다가 못자니까 저녁에 피곤하고 졸려서 화낼 수도 있는건데 그걸 못받아주는 내 자신한테 화를 내다 서러워졌다. 암만 생각해봐도 지친게 분명하다.

육아기록을 남기려고 들어왔는데 푸념만 남기고 있다. 그렇다. 나는 이렇게 중년이 되어간다. 자제하자 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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