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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묘염 Jan 19. 2023

티만 마셨는데 체할 거 같아요.

연초에는 여러모로 정신이 없다.  무계획 인간이 계획을 세울 엄두도 내기 전에, 세상의 모든 계획들이 나를 향해 쏟아진다. " 2023, 새해 첫 보험 이벤트!!" ,"황금을 잡아라!! 토끼해 예금 이벤트" 뭘 자꾸 드리고 뭘 자꾸 권한다. 며칠부터 며칠까진 뭘 하고 며칠부턴 며칠까진 뭘 한다는 문서들이 쌓인다.  그 장대한 계획들을 미처 다 확인하기도 전에 고등학교 때 벽에 붙여 두었던 모의고사 성적표처럼 형광펜이 좍좍 그어진 성적표가 공람으로 돌아다닌다.  누구는 얼마 누구는 얼마, 이름 옆이 텅 비어있는 사람에게는 은밀한 귓속말이 들린다.  점이라도 찍어야지. 뭐라도 하나 해야지.  


과장님은 자꾸 티타임을 갖고 싶어 한다.  연초에 각국에 부과된 실적을 의욕적으로, 그러니까 작년 초에도 작년 말에도 작년 말에도 늘 반복했던 '이번 한 번만 의욕적으로 해봅시다'  라는 '어떻게'가 빠진 결과론적인 격려가 이어진다.  직원들은 모두가 열람하는 공람 표에 돌아다니는 자기 이름 옆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자기 명의로 필요 없는 보험을 가입하곤 한다.  직원들은 일 년간 열심히 넣은 보험을 한 푼도 환급받지 못하고 해약한 후,  다시 새로운 보험을 넣는다.  진정한 창조경제가 여기 있다.  박봉, 물가 상승률을 고려한다면 실질적 감봉, 그리고 해마다 쪼아대는 실적 압박이라는 밑빠진 독에 들 이 붇는 의미 없는 돈. 하지만 그 돈을 먹고 국의 실적은 차곡차곡 쌓이고, 누군가는 그 돈들의 수혜를 입을 것이다.  농노들이 지주에게 바치는 일종의 소작료라기엔,  그들이 우리에게 빌려준 땅은 너무나도 적다.  


이름 옆의 공란들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어떤 무능은 억울하다. 시간 중에 누구보다 열심히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의 이름 옆에 텅 빈 공란과,  누구보다 놀고먹는 자의 이름 옆에 형광펜으로 강조된 수치. 알고 보니 세상은 그런 식으로 돌아간다.  


이름, 성적표, 거기에 줄을 세워 모두가 열람하는 식의 시대착오적인 인권침해는 그렇다 치자, 무슨 김 씨 오십육 대 손의 160번째 제사상을 차리는  8대 독자의 맏며느리도 아닌데  이렇게나 닥치고 따르라는 권위적인 조직문화도 이해할 수 있다. 원래 근본 없는 집구석일수록 권위는 폭력에 의존하는 법일 테니.  

다만, 우리 모두 타고난 행운이 여기까지라, 아침부터 기어나가 자기 쌀값을 벌러 나왔을 뿐임을 잊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게다가 직원들의 푼돈을 모아 불린 숫자들은 국고로 들어가고, 예산은 늘 다른 곳에 쓰인다.   쓸데없이 길어지는 두서없는 연설에, 어떤 의무감, 어떤 사명감, 어떤 열정, 어떤 의욕이 끼어드는  자의식과잉은 삼가주면 좋겠다. 

뭐랄까. 이 모든 부정의 들을 열심히 참고 견디다가도 그런 말들이 귓가를 폭격하는 순간, 입가에 떠오르는 조소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인내심이 무척 좋은 편이지만, 제발 그것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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