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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약 Oct 23. 2021

가족의 의미 中

일을 그만두기까지 4

엄마 한정

최근 인터넷에서 '엄마 한정 관종'이라는 제목의 게시글을 보게 되었는데, 나는 '내 이야기는 아니네' 하며 별생각 없이 읽어 내렸다. 

'엄마 한정 관종'은 (평소엔 전혀 그러지 않으면서) 오직 엄마에 한해서만 관심을 끌기 위해 밖에서 하지 않는 엉뚱하고 시선을 사로잡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 거였는데, 읽어보니 정말 왜 저러나 싶을 정도로 별 사람이 다 있었다. (엄마 입장에선 귀여워 보일 수도 있겠네 싶긴 했다만)

그런데 여러 사례를 계속 읽다 보니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면서, 아뿔싸, 마침내 내가 집에서 하는 행동과 사뭇 비슷한 경우도 나와 버린 것이다. 엄마 일하는데 괜히 옆에 가서 춤추고, 관심을 끌려고 하는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 엄마에게만 하는 행동들... 

나를 바라봐 주길 바라며 하는 애처로운 몸짓은 결국 나를 봐줄 것을 알았기에 언제나 흥겨움을 담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랄까) 어쨌든 이를 보아하니, 나도 부정할 수 없는 한 마리의 관종인 것이었다.


왜 나를 안 봐?

난 내가 아프다는 걸 잘 몰랐는데, 내가 아프다는 걸 인식하고 이를 내 입으로 내뱉게 되자 너무너무 원망스러웠다. 무엇이 그리 원망스러웠냐면, 글쎄, 이 고통이? 하필 왜 나일까 하는 생각이? 이를 알아채지 못한 가족에게? 

어쨌든 언니와의 대화를 통해 한 자락 되살아난 이성으로 나는 단순히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가 아니라 지금의 내가 어떤지에 대해 내 입으로 제대로 말할 필요성을 느꼈다. 바로 엄마에게 말이다.

그날도 엄마는 평소처럼 저녁 늦게 퇴근 후, 거실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시청 중이었다. 나는 괜시리 거실 근처를 어기적어기적 배회하며 슬쩍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티브이에는 엄마의 애청 프로가 방송 중이 아니었고, 엄마는 조금 지쳐 보일 뿐이라서 나는 이 정도면 말을 꺼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나는 '할 말이 있다' 말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휴식 중인 엄마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나 나름 힘차게 말을 꺼낸 것과 달리 이미 목소리는 흔들렸던 것 같다. 이상하게 말을 꺼내기 힘들었던 나는 잠시간 엉덩이만 뭉개다 겨우 내가 해야 할 말을 어물어물 내뱉었다. 말을 중언부언 길게 늘어놓으며, 좀처럼 본론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사실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엄마.

나 머리가 너무 아파. 
매일 아파. 
약도 안 들어. 

엄마, 나 아파. 







처음엔 '나 요즘 머리 아픈 거 알고 있지. 아픈지 좀 됐는데, 직장에서도 아프고..' 그렇게 하나씩 이야기를 꺼냈는데, 어느 순간 울컥 울음이 터졌다. 말하다 보니 그냥 아프다는 말을 연속이었다. 


매일 아프고, 너무 아프고, 아픈지 너무 오래됐고, 입원하고 나서도 아팠고, 지금도 너무 힘들다고. 아프다는 말이 지금 내가 얼마나 아픈지를 넘어 나를 좀 알아달라는 말로 들려서 뒤늦은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이게 뭐 그리 어려운 말이라고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  

그러나 그렇게 힘들게 그리고 서럽게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하는 나를 바로 옆에 두고도 엄마는 나를 보지 않았다. 그래, 내가 힘겹게 말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엄마의 시선은 티브이를 향해 있었다.  

가족 모두 거실에 있었고, 언니는 사전에 내가 말할 것을 어느 정도 알았으며, 아빠는 거실과 부엌 언저리에 서서 나와 엄마를 향해 은근히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엄마는 말없이 계속 티브이만 봤다. 내가 진지하게 할 말이 있다고 할 때도, 옆에 앉아 아프다고 말할 때도, 엄마가 나를 바라보길 애타게 기다리며 울먹일 때도. 티브이에 뭐 그리 중요한 내용이 있어서 그러는지 미동 없이 고집스럽게 앞만 쳐다봤다. 나를 보라고 계속 보채는 나를 옆에 두고도 엄마는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엄마의 두려움

나는 엄마가 당장 티브이를 끄고 나를 바라봐 줄 줄 알았다. 남이라도 그럴진대, 아니, 사람 사이의 예의가 그렇고 아니고를 떠나서 나는 엄마가 그렇게 나를 외면할 줄 몰랐다. 항상 내가 부르면 늦게라도 바라봐 줬는데, (그러기를 의심치 않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나를 보지 않는 것이다. 


섭섭함이 치밀어 오르고 눈물이 나서, 이후에도 나는 언니에게 몇 번이나 이날을 회상하며 불만을 토로했다. 엄마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어떻게 그렇게, 하라 해도 하기 힘들 텐데 앞만 보고 버티고 있지. 나를 어떻게 외면하지. 평소엔 그리 티브이에 집중하지 않던 사람이 왜 그땐 망부석처럼 꼼짝도 안 하고 앞만 바라보는지 난 정말 이해가 안 됐다.

그러나 이제는 이해를 한다. 엄마는 많이 무서웠던 거다. 내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그리고 자기가 지금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낯설고 무서운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엄마도 나처럼 배우지 못한 것이 틀림없다. 누군가 진지하게 부딪쳐 오는 그 상황이 차마 대면하지 못할 정도로 무서웠을 것이다. (우리 엄마는 지독한 회피형이다!) 하물며 상대가 딸이라니, 무서움의 수위는 한층 더 커질 수밖에 없었을 테다. 소중하기 때문에 더더욱.


별거 아닌 말, 일상적인 분위기라면 눈을 맞추고 서로에게 집중하는 게 영 어색하고 쑥스러워도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그 상황이 그때의 엄마에겐 불가능했다. 엄마는 내가 너무 소중하고 소중한 나머지 나를 바라보지 못했다.

나중에 언니에게 듣기로 엄마는 눈만 앞을 향하고 있을 뿐 모든 감각이, 신체의 모든 레이더가 바로 옆에 앉아있던 나를 향해 있었다고 한다. 지금 와서 보면 '그래, 엄마라면 몸이 굳어버렸을 수도 있지' 싶은데, 그래도 그럴 거면 대놓고 쳐다보면 서로 좋지 않았나 생각하게 된다. 외면받았다는 생각에 나는 가슴이 무너져 내렸는데 말이다. 이상하게 나는 아빠에겐 기대하지 않았던 위로를 엄마에겐 받고 싶었다.







후일 문득 생각하기로, 이런 엄마와 이런 아빠가 어떻게 결혼까지 했을까 싶었다. (외면쟁이 둘이 만났는데) 그리고 감정을 대처하는 방면에 있어서 엄마보다는 아빠가, 아빠보다는 내가 낫다는 생각을 했다. (나아져서 다행이다)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기 멋쩍더라도 나는 할 수 있으니까. 나도 이 방면에 참 취약한데, 눈을 바라보기 힘들어도 그래도 나는 바라볼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감정을 다루는 영역에 있어서 우리 가족 중 제일은 (이미 예상할지도 모르겠지만) 바로 언니이다.













엄마의 대답

언니는 여러 질문을 던져 내 본심을 끄집어냈다. 매몰된 고통과 익숙한 상황 속에서 나를 깨우고, 설득하고, 여러 형태로 나를 두드렸던 것은 언니였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나를 움직인 것은 다름 아닌 엄마였다.

엄마는 꼼짝없이 굳어 나를 바라보기는커녕 한동안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허탈해진 나는 엄마가 내 고통을 알아주길, 나를 위로해 주기를 포기했다. 

홀로 소리치던 내가 입을 다물자 거실에는 한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막막했다. 그렇게 통통 튀던 공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언니였나 아빠였나. 누구였는지는 모르겠다. 


한 명이 굳고, 한 명이 입을 다물자 바통터치하듯 다른 가족 구성원이 대화에 뛰어들었다. 가족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공론화된 이 중요한 일을 그냥 없던 일로 할 순 없었을 테다. 

대화의 주도자가 바뀌었고, 내가 망연자실 앉아있는 순간에도 엄마를 향한 설득은 계속 이어졌다. 나는 멍하니 앉아있다가, 오가는 대화 사이사이에 하나둘씩 말을 얹었다.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니 그때그때 추임새만 넣으면 돼서 말하기 훨씬 편했다. 동시에 오기가 생겼다. 엄마가 대답 안 하면 뭐, 계속 얘기하는 거다. 들을 때까지! 

엄마는 내 이야기에는 반응하지 않았지만, 언니와 아빠의 말에는 반응했다. 내 말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지만, 내 말에 이어 언니나 아빠의 말이 얹어지면 간접적으로 대답하는 식이었다. 이때쯤 나는 엄마가 나를 너무 의식한 나머지, 고의적으로 외면한다는 것을 알았다.


온 가족이 참여한 대화가 몇 차례 이어지고, 어느 순간 엄마는 굳은 몸을 깨고 언니와 아빠를 향해 몸을 틀었다. 내 반대 방향이었다. 역시나 내 쪽을 보지 않았지만, 난 엄마가 움직인 것만으로 만족했다. (움직일 때의 그 쾌감이란!) 나는 뭐든 상관없으니 그저 어떤 반응을 보이길 원했다. 벽에 대해 말하는 듯한 그 느낌은 사람을 참 무력하게 만들었다. 

비행기에서 폭탄이 투하되듯 일방적으로 연거푸 쏟아지는 말을 엄마는 잠시간 곰곰이 듣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삼대일인 상황이었다. 엉겁결에 불리한 전세에 처한 엄마는 금세 격앙되었고, 그 김에 입이 열렸던 것 같다. 엄마는 뭔가 불만스러운 듯, 내키지 않는 듯 말했다. 

이때까지도 엄마는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옆에서 영 성화를 부리니, 만약이라는 가정 하에 '네가 정 아프다면, 뭐 이렇게 하면 되지'라는 식의 사고를 거쳐 말을 한듯한데, 그 말을 옮기자면, 대충 '뭘 걱정하냐. 영 안 되면 같이 살면 되지'와 같은 말이었다. 엄마는 걱정하지 말고 일을 그만두라 했다.





너 하나 못 먹여 살리겠냐.

평생 같이 살면 되지.




한 번 입이 트인 엄마는 이게 뭐 별 어려운 일인 마냥 그러고 있냐고, 흥흥거리며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언제 굳어 있었나 싶게 말하는 목소리가 힘 있어진 건 덤이었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엄마와 달리,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또다시 무너져 내렸다. 물론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이유였다.










일을 그만둔다는 결단



나는 자녀와 부모가 평생 같이 살 순 없다고 생각했고, 한 사람이 한 사람으로 제 몫을 하고 살아가려면 그리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성인이 되고도 꽤나 긴 시간이 흐른 20대 후반에서야 일을 하게 된 나는 (드디어!) 새롭게 내가 선택한 삶을 살아가게 될 거라 생각했다. 나는 나를 위해 살 생각 만만이어서, 내가 어떻게 잘 살지만 골몰하느라 정말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엄마가 평생 나를 책임질 수 있다는 것을. 엄마는 그럴 생각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엄마의 말을 들은 순간에도 나는 '나도 엄마를 책임질 수 있어'라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정말 불효막심하게도 나는 엄마와 평생 같이 살 생각이 없었다. 엄마가 아플 때 나는 엄마에게 '내가 평생 책임져줄게. 평생 같이 살게'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당연히 나도 도움이 되고 싶다. 도와주고 싶다. 엄마에게 믿음직스러운 존재가 되고 싶다. 그러나 내가 책임진다고는 단정하여 말하진 못할 거 같았다. 엄마의 헌신과 엄마를 향한 나의 사랑이 확연히 대비되는 순간이었다. 

단순히 감동받았다고 말하기엔 충격적이기까지 해서, 나는 엄마가 나를 외면해서 슬퍼한 것이 언젠가 싶게 엄마의 바다와 같이 넓은 마음가짐에 압도되어버렸다. 딱딱히 굳어있던 마음이 다시금 술렁거렸다. 오랜만이었다. 

언제나 나를 흔드는 것은 엄마였다. 나는 엄마를 사랑한다. 그러나 사랑을 넘어서 엄마는 나를 움직이는 마지막의 마지막 사람이다. 나이를 이렇게 먹어도, 갈팡거리는 나에게 결단을 내리게 만드는 사람은 아직도 여전히 엄마인 것이다. 

그토록 멀어지려 애썼건만, 홀로 서고 싶었으나 나는 다시금 찰싹 달라붙고 말았다. 익숙한 안온함에 젖어든 어린아이처럼.   










결단, 그 이후

내가 짊어진 정체 모를 짐들이 어깨 위에서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나는 생각보다 나 하나 건사하는 데 부담을 많이 느끼고 있었나 보다) 몸이 한없이 가벼워져서, 내가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명확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토록 고민했던 것아 무색하게 바로 다음날 퇴사 의사를 밝혔다. 훗날 엄마가 말하길, 어떻게 '그만두라'는 그 한 마디를 기다렸다는 듯 말을 하자마자 바로 일을 그만두냐고 했다. (그동안 나도 몰랐지만) 아무래도 엄마는 나에게 끼치는 본인의 영향력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돈, 독립심과 기타 등등을 내려놓자 억눌려있던 마음이 솟구쳤다. 직장을 그만두기까지 참 오래 걸렸는데, 일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자 하루도 더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일이 필요했으나, 그저 필요에 의해서였을 뿐이었다. 내키지 않았다. 새롭게 얻은 직장은 항상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직장을 그만두었다. 힘들 것 같았는데, 참 쉬웠다. 별 일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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