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꿈 13
체르니 30번까지 진도를 나가는데야 나이가 어리든 많든 뭐 그리 중요한 사항은 아닐 것이다. 누군들 몇 년의 시간을 들인다면 그럭저럭 건반을 뚱땅거리는데 익숙해지고, 어디 가서 취미 삼아 피아노를 친다고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어질 터였다. 그러나 피아노에 심취하여 제대로 배워보겠다, 피아노를 전공으로 하겠다 마음먹는 순간 일은 한없이 복잡해진다.
나만 좋다면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피아노를 치며 보내는 것쯤이야 무슨 문제가 있으랴. 그러나 전문적인 피아노 연주자가 되겠다는 한발 더 나아간 진지하고도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한다면, 더는 나 혼자만의 일에 국한되지 않는다. 예술 분야에서 흔히 요구하는 재능의 영역에 발을 들임과 동시에 어린 시절부터 연마하여 체화된 기술 없이는 진입하기 어려운 새로운 국면에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진지하게 뛰어드는 순간 새로운 장이 열린다. 정말 좋아서, 하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했다 할지언정 단지 이 선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정도면 됐다'며 자위하는 수준에 만족하지 않고, 한 분야에 깊게 발을 담근다면 확연히 좁아진 길목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피아노 콩쿠르에 나간다 한 번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콩쿠르를 준비하며 직접적이지는 않아도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교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굳이 콩쿠르라는 경쟁과 비교에 특화된 경우가 아니라 해도) '피아노'라는 하나의 동일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 여럿이 마주하는 환경에서 한 번쯤은 나와 상대의 처지를 번갈아가며 돌아보기 마련이다. 비슷한 목표를 가진 타인의 존재로 말미암아, 현재 내 위치를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 사는 일에 비교가 생활은 아닐 테지만, 목표로 하는 곳 어디나 경쟁은 있을 터이다. 잘했다, 못했다 절대적인 평가 기준이랄 게 없는 예술의 영역에서 또한 '경쟁'은 나와 아무 연이 닿지 않는 일이라고 똑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다. 타인, 즉 비교 대상에게 자극받아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자라는 건 딱히 새로운 일이 아니다.
단지 일정 수준에 이르기 까지라면, 발만 살짝 담근 채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만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한 분야를 그저 향유할 뿐인 대다수의 사람에게 그 이상의 무엇은 필요치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잘하고 싶고, 최고가 되고자 한다면 경쟁과 비교의 세계에 진입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보다 더 나아지길 갈망하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특정 분야에서 뛰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쉽게 떠오르는 방법은 남보다 더 일찍 어릴 때 시작하는 것이다. 드문 일이지만, 뒤늦게 뛰어들었음에도 압도적인 재능으로 단기간에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혹 식사와 수면 등 생활 전반적인 부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연습에만 할애하는 식의 뼈를 깎는 노력을 한 결과일 수도 있다.
만약 비등한 재능을 가진 여럿이라면 고려할 사항은 하나뿐이다. 설혹 뛰어난 재능을 가진 경쟁자가 있다 해도, 아무리 빛나는 자질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열외로 취급해야 한다. 한낱 사람인 입장에서 타고난 재능은 손댈 수 없는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려할 수 있는 하나, 사람의 뜻으로 바꿀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진부한 대답이지만 바로 개인의 노력이다. 그리고 노력이 의미가 있으려면, 시간이 병행되어야 한다. 단발성으로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열의를 펼치는 기간이 필요하다.
경쟁에서 이기고자 한다면, 탐해도 구할 수 없는 재능보다 시간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 시간의 양과 질을 함께 고려한다면 더 좋을 것이다.
경쟁과 비교의 관점에서 볼 때 '시간'은 그 어느 것 못지않은 중요한 자원이 된다. 어느 영역이든, 일찍 시작할수록 그리하여 고지에 이르게 도착할수록 경쟁에 유리하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제아무리 열심히 한들 그 시간 동안 다른 사람이라고 마냥 놀고 있진 않을 테니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열정적인 부모가 2세의 조기 교육에 열을 올리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이의 성과도 곧잘 따라온다) 이르게 시작하면, 같은 나이를 기준으로 더 많은 시간이 투입된다. 확률적으로 또래보다 앞서 나갈 수밖에 없다.
빨리 시작하면 더 오래 할 수 있다. 오래 하면 더 잘할 수 있다. 아이가 자라 몸소 의사결정을 내리기 전 미리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도록 하는 게 나는 그리 나쁘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솔직히 조기교육이 본인의 의사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필승의 전략이지 않나 싶다. 이 제외사항이 무시하려야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사항이라 막무가내로 강행할 수 없을 뿐이다.
당사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심적, 체력적 부담은 오로지 아이가 감당해야 하며, 훗날 부모의 안배와 아이의 결정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이때껏 겪은 고난이 허망하게도) 아이는 또다시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더불어 아이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한정된 시간 동안 더 우선하여 배워야 할 사항도 많이 있을 것이다.
현실화된 꿈은 꿈이라 말하지 않는다. 현실과 꿈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하며, 현실에 멀리 떨어진 꿈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일찍 시작할수록 나아질 시간이 많고, 더 오래 지속할 수 있으며, 투자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가능성을 높이는데 시간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 자원이다. 절대적인 시간의 총량을 늘린다는 면에서 시작은 빠를수록 좋다.
그러나 시간을 확보한다는 면에서도 그렇지만, 조바심을 내지 않고 일을 지속한다는 면에서도 나는 어릴수록 유리하다는 생각이다. 다른데 한눈팔지 않고 한 가지 일을 꾸준히 이어가기에는 복잡한 어른보다 단순한 어린아이가 낫다.
어린아이는 몇 년 동안 피아노를 배우는 행위에 아무런 의구심을 가지지 않는다. 설혹 재미없다고 쫑알쫑알거릴지언정 대체로 엄마가 하라면 그냥 따른다. (물론 아이가 정말 싫다고 강하게 표현한다면 부모는 그만두게 할 것이다) 이처럼 아무 생각 없이 수영가방을 달랑달랑 들고 몇 년 동안 수영장을 드나들다 보면 아이는 어느새 자유형, 평형, 접영을 마스터하고, 발에는 익숙한 오리발을 낀 채 물속을 유유히 유영하고 있을 것이다.
이미 보고 들은 것이 많은 어른은 아는 것도 많고, 생각할 거리도 많다.
그거 해서 뭐 하는데?
밥 먹여주나?
얻다 쓰려고?
가지가지 생각이 많기도 많아서 일을 하면서도 이 방향이 맞는지, 적당한 속도로 가고 있는지 등 (미리 준비한다, 심사숙고한다는 말로) 스스로 고민거리를 생성해 그 속으로 풍덩 몸을 던지곤 한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고, 딱히 도움도 되지 않을 마음고생을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처럼 앞을 준비하는 자세와 얕지만 광범위한 지식, 넓은 시야가 도리어 일을 지속하는데 방해가 되기도 한다.
태권도를 배우면 날렵하게 뒤돌아 발차기를 하는 나를 상상하고, 검도를 배우면 죽도를 들고 멋지게 휘두르는 모습을 기대한다. 머리가 굵어진 만큼 기준치는 저 하늘 꼭대기에 위치하며, 나보다 나은 비교대상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언제나 존재한다.
본 건 있고, 눈은 높은데 몸은 따라주지 않는다. 무언가를 새로이 시작할 때면 드라마에 나올 법한 멋진 이미지부터 떠오르지만, 그리되기까지 시일이 걸리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이상한 일일 것이다.
성장하든 정체하든, 지겹고 힘들더라도 아무 생각 없이 꾸준히 지속해야 하는 시기가 있다. 아이는 집중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위와 같은 이유로 정신 산란한 성인이 그 시기를 버텨내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 두기 더 쉽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성인의 경우, 생계가 유지되지 않는다면 돈이 되지 않는 일을 지속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생계'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가 우리의 정신을 끊임없이 어지럽히고, 미래를 재단하며, 고비를 넘기 힘들게 하는 가장 큰 장벽일 것이다.
두통으로 일을 그만둔 어느 날이었다. 직장을 그만뒀음에도 몸이 나아질 기색이 없었다. 문제의 한가운데 있을 때 나는 상황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때도 나는 '이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거 아닌가' 하는 막연한 낙관 속에 있었다. 몸은 내 생각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음에도 나는 그리 생각했다.
이미 충분히 내 생각 이상으로 아팠기 때문에 바닥 밑에 지하실이 있을 거라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이제 더 나빠질 구석은 없으리라 낙관하며 이렇게 몇 주, 길게는 몇 달을 보내면 차차 나아질 거라 생각했다. (희망 사항이었다. 나는 정말 좋지 않았다)
내가 왜 아픈지, (비유적인 의미라면 좋겠지만) 말 그대로 피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 게 하필 왜 나인지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정말 어떤 명확한 이유가 있다고 해도 당장의 내 통증을 멈추는 데 도움이 되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럴 힘도 없었다) 원인을 찾아 해결하기에 나는 너무 멀리까지 왔고, 질주하는 열차를 멈추기 위해서는 더 강력하고 분명한 한 수가 필요해 보였다.
담배를 일평생 빽빽 피워대도 튼튼한 사람이 있고, 담배 근처에 간 적 없어도 폐에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말도 안 되는 일 같지만, 명백한 유발 원인이 있어도 멀쩡한 사람이 있고 여타 집히는 사항이 없는데도 병에 걸리기도 한다. 질환의 발병 요인으로 보통 유전, 환경, 스트레스 등을 꼽는다. 그러나 이 모든 건 '반드시'가 아닌 '확률'의 문제이다.
내가 왜 아픈지는 그 누구도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설혹 집히는 이유가 있다손 치더라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는데, 이를 인정하는 게 곧 '그때의 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라서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때의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나는 그대로 덮어둘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에 한해선 어설픈 낙관도 나를 찾지 않았는데, 어렴풋한 감으로라도 시간이 지나 (지금보다 나아진 미래의 내가)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가망이 없다 여겨지니 그냥 잊는 것 외엔 도리가 없어 보였다.
내가 아팠던 이유에 대해서는 몇 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천천히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 이유를 모른다 하면서도 나는 일찍부터 내가 꽤나 맞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머리가 인식하지 못했을 뿐, 혹 인정하지 못했을 뿐 은연중에 알고 있었나 보다.
답을 알고 나서 보면 그리 단순한 문제도 없다. 명쾌한 답을 눈앞에 두고도 몰랐던 내가 바보 같지만,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법이니 내게 일어난 일을 알지 못했던 맹추 같은 나를 이해하기로 한다.
원인을 찾는 일 따위 당시의 내게 도움이 되진 못하리라는 것엔 지금도 동의하는 바지만, 이조차 회피였음을 뒤늦게 인정한다. 이때껏 고수해온 지나친 낙관과 본능적인 회피는 내가 처한 상황으로부터 거리감을 유지하여 안정감을 얻기 위한 일종의 자기 방어였을지도 모르겠다.
힘든 일은 하지 않고 원치 않는 일을 피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굳이 겪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그도 좋다.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이 아니더라도 세상엔 굳이 겪지 않아도 되는 일이 있으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내 고통의 인과관계를 자수의 실을 올올히 매만지듯, 진주 목걸이의 진주를 알알이 세듯 굳이 자세히 따져 원인을 알아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내 필요에 의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내가 아프게 된 이유를 찬찬히 정리해 보기로 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 그래도 견뎌 볼 만한 수준으로 잦아드는 데 시간이 걸리고, 제정신을 차리는 데 또 시간이 걸리고, 내 미래를 다시금 그려보기까지 더 긴 시간이 걸렸지만, 이런 시간을 겹겹이 흘려보내며 나는 나를 위해서라도 한 번쯤은 정리해 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느리지만 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왜 하필 나였는지에 대한 그럴듯한 이유는 없겠지만, 내가 아픈 이유쯤은 헤아려볼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이유에 글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