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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Oct 24. 2024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

딱새우회 한 팩을 털레털레 들고 게스트 하우스 문을 열었다. 딱새우를 난생처음 먹을 생각에 들떠있었다. 문을 열고 같이 들어간 사람은 없었다. 제주도에 나 홀로 사흘 밤 묵으러 간 첫날. 이 여행 내내 혼자일 것이기에 고독을 즐겨보기로 했다. 혹시 나처럼 혼자 온 여행객과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을지 내심 기대하면서 말이다. 혼여족(혼자 여행하는 사람)을 반갑게 맞이하는 듯 제주도 어딘가에서 불어온 실바람 내음은 푸근하고 따스했다.


방을 배정받고 대충 싸 온 짐을 대충 내려놓고, 일단 올레 시장에서 소중하게 데려온 딱새우회를 먹으러 로비로 갔다. 딱새우 15마리가 양쪽으로 가지런히 도열해 있다. 마치 전쟁을 끝내고 돌아온 왕을 맞이하는 한양 서민들처럼 다소곳이 말이다. 딱새우 씨께서 태어나 잘 자라주시고 어부에게 잘 잡혀주셔서 감사드리며, 그중 하나를 손으로 잡아 올렸다. 딱딱한 머리와 꼬리가 장식처럼 붙어있기에 잘 떼내고 먹어야 한다. 손으로 꼬리를 비틀어 떼고 머리를 잡고서 초장을 꼬리 쪽에만 살짝 묻혀 한입 베어 물었다. 오도독. 어찌하여 이 작은 생명체가 날것으로 생명력을 잃었는데도 이렇게 탱글탱글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냐. 씹히는 식감에 감탄하고 있다 보면 입안에서 사르르 없어졌다. 아 벌써 한 마리가 뱃속으로 다 들어가다니. 남은 딱새우 씨들을 경건한 마음으로 천천히 음미하며 입안에 모셨다. 아, 내일도 또 사 먹고 싶었다. 그때였다. 여행하러 와서 좋은 점을 머릿속으로 가만히 떠올려보기 시작한 게.

- 첫 번째, 맛있는 거 먹는다.


그렇게 7~8마리쯤 먹고 있는데, 어떤 외국인이 눈인사하며 지나갔다. H는 처음부터 서글서글한 인상이었다. 검은 머리에 후덕하고 웃음이 많고, 에스파냐계 특유의 자유분방한 매력이 느껴졌다. 나는 이 외국인이 이 성스러운 딱새우 씨를 먹어봤는지, 안 먹어봤으면 먹여야 한다는 어떤 사명감이 갑자기 생겼다. 그래서 물어봤다.

"밥 먹었어? 괜찮으면 이거 한번 먹어볼래? 너무 맛있다."

그녀 H는 괜찮다고 했다. 그러고는 혼자 왔냐고 물어봐서 혼자 왔다고, 너도 그렇냐고 되물어보고 그렇다고 서로 대답했다. 그런 그녀는 제주도가 처음이 아닌 양 여유로워 보였고 딱히 분명한 목적으로 온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한국말도 제법 듣고 말할 줄 알고, 영어로도 유창하게 말했다. 대화가 되는 외국인이라니. 왠지 이 친구랑 놀면 재밌을 것 같았다. 내가 먼저 내일 뭐 하는지 물어봤다. 예상대로 H는 별 계획이 없었다. 게다가 뚜벅이란다. 어휴 제주도에서 차도 안 빌리고 돌아다니면 진정한 제주의 아름다움을 보기 힘들 텐데.

"내일 나랑 같이 사려니숲길 갈래?"

H는 어디든 상관없이 좋단다. 자기가 여기서 만난 같은 방 메이트도 혼자 온 것 같던데 같이 가자고 물어보겠다 했다. 이렇게 된 이상 동행인이 한 명이든, 두 명이든 상관없었다. 내 작고 소중한 렌터카 모닝에 다 탈 수 있다면야. H의 같은 방 친구 A도 내일 어디든 괜찮단다. 이 게스트 하우스는 뭐든 오케이인 사람들이 모인 데인가? 사실 나도 어디든 상관없는데. H는 부산 한 대학교에 교환학생으로 지내면서 주말에 제주도로 놀러 와 있었다. 그날의 여행과 볼거리, 먹을거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좋아하는 부산에 대한 썰도 많이 풀었다. H는 기본적으로 유쾌한 친구였고, 나 역시 영어와 우리말을 섞어가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날 저녁 우리의 웃음은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우연한 만남과 신남. 그래, 이게 여행이지.

- 두 번째,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생각지 못한 즐거움을 마주칠 수 있다.


다음날, 그렇게 만난 인연과 도착한 사려니숲. 빽빽하게 우뚝 솟은 나무들이 울창했다. 나무로 만든 데크 위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었다. 삐그덕삐그덕. 데크를 밟을 때마다 나를 받아들인다는 듯이 눌어져 줬다.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데크가 0.01센티미터 아래로 사뿐히 내려가 줘 포근했다. 어릴 때 이파리 몇 개 따다가 돌로 으깨고 주섬주섬 모아서 밥이라고 동생한테 먹으라고 소꿉놀이하면서 나던 나뭇잎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잎사귀가 바람에 날려 서로 부딪치며 숲의 바다가 되어 쏴아 파도쳤다. H랑 새소리 흉내를 내봤다. 씨릉씨릉씨씨릉. 찌이찌루찌루찌. 우리는 서로 낸 소리에 그게 뭐냐며 한바탕 크게 웃었다. 새 지저귀는 소리는 따라 해주는 게 제맛이지.

- 세 번째, 낯선 향기와 소리를 내 코와 귀로 맡고 들으며, 과거도 회상하며 현재 이 순간에 만족할 수 있다.


저녁이 되자, 다른 일이 생겨 숲에 같이 가지 못했던 A가 합류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나기로 했던 터라, 로비에서 만나고 있는데 숙소 매니저 B가 눈에 띄었다. 이 근처 00 전집에 가려고 한다. 올 수 있으면 오라고 했다. B는 흔쾌히 오겠다 했다. 이 게스트 하우스는 다 '오케이'하는 사람들이 오는 데인가? 아니, 여행이라는 특별한 상황이 모두의 뇌를 흐물흐물하게 만들어서 이것저것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일상에서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들은 '노'를 답했을지도 모른다. 여행지에서 타인의 무조건적인 친절에서 나오는 뜨끈뜨끈한 온기가 기분까지 말랑말랑해지기에 다 좋아진다. 아무튼 좋다.

전집에서는 우리 표면적인 각자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어렴풋한 사는 곳, 대충의 직업과 나이 같은 어느 정도 알아두면 서로 이야기 나누는데 편해질 정보들을 주고받으며.

그러고도 여운이 남아, 우린 숙소에서 마저 2차를 했다. 웃고 웃기느라 몇 시간 새에 벌써 서로 편해졌다. 이때부터 진솔한 이야기, 요즘 겪는 고민을 나눌 수 있다. 외국인 H는 요새 학교 기숙사 룸메이트가 자기와 놀지 않으려, 일부러 거리를 두는 것 같다고 속상해했다. 언니 A는 매달 바디프로필 찍는 인플루언서인데, 몇 달 전에 찍은 사진이 생판 처음 본 헬스장에 퍼스널트레이닝 광고에 쓰여서 초상권 침해 신고를 해두어 심란해했다. 그리고 B는 남자, 여자 모두에게 이성적인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고 자기가 이상한 건지 걱정했다. 나는 아이가 잘 지내고 있는데, 이게 잘 자라고 있는 건지 판단할 수 없어 늘 고민이라 했다. 사실은 회사 선배랑 안 맞는다, 과제도 이상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런 내 고민은 이들 앞에서 한없이 작아 보였다.

- 네 번째, 누구나 각자의 고민이 있고, 내 고민도 그중 하나일 뿐인 사실을 느낀다.


다음날 우리는 숙소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 다섯 번째,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헤어지는 순간에 아쉬어하며, 다시 만날 다음을 기대하게 된다.


일상에서 힘들다고 느끼는 기억은 흐릿하고 모호하다. 여행지에서의 특별한 순간은 또렷하고 반짝인다.

10년 후에 돌아보면 이 또한 청춘이었다고 생각할 것 같다. 청춘을 쌓으러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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