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를 피울 때 들숨에 담뱃재에 있는 모든 해로운 걸로 내 몸을 절이는 것처럼 깊숙이 들이밀었다가, 날숨에 몸에 있는 담배 연기에 내 근심걱정까지 끼워팔기처럼 죄다 비워낸다는 느낌으로 마음에 있는 말을 공기에 내뱉었다. 후련했다.
내 지인 중 하나는 내 상태를 '감정조절 장애'로 잠정적으로 해석했다. 조금만 슬퍼도 조금만 기뻐도 눈물이 났다. 눈물은 가슴안에 피어나는 감정의 씨앗을 죽이고 어떻게든 하루하루 버텨낸 대가 같다. 감정 조절이 어려워졌던 초반에는 마음이 몽글몽글하고 뭉클할 때만 불쑥 눈 안에 물이 차올랐다면, 이제는 '감사합니다'를 말하려고만 하고 아직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는데도 눈물부터 먼저 몸 밖으로 나왔다. 내가 원하지 않든 원하든 상관이 없었다.
평소 친하지 않던 사이인데도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한 상대와 십 분 넘게 이야기를 나눈다거나, 사람들이 삼사십 명은 족히 넘게 모여 회의하고 있을 때도 감정은 요동쳤고, 내 안의 감정 중 슬픔이 자꾸 주인공이 되었다. 그런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된 이후 사람들을 당황하지 않게 하고, 나를 부끄럽지 않기 위해 말을 하지 않는 방향을 택했다. 점점 더 나를 꽁꽁 싸매 숨겼다. 난생처음 정신과 상담을 받기 전까지는.
상담받으러 가기 전에 가만히 생각해 봤다. 말과 마음의 온도가 달라진 게 언제부터였을까. 머릿속을 헤집어보니, 마음을 둘로 나누기 시작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작년 겨울, 부서에서 업무가 바뀌면서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달라졌다. 그중 하나는 L 부장이었다. 그는 나의 선배였고, 나는 일할 때 웬만하면 선배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따르는 일명 예스걸이다. 하지만 그와 일한 지 1년 반이 넘으니, 그를 받들어주는 내 내면의 선배 존중 의식이 다 타고 사라져 재가 되었다.
"너는 틀렸어. 논리가 부족해. 내가 맞아."
L 부장이랑 한 시간씩 회의하면서 도합 십 분은 듣는 말이었다. 내 일과 중 한주 두세 시간은 그렇게 채워졌다. 여느 때처럼 입으로는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려고 했다. 그러나 눈은 더 이상 들어줄 수 없다고 슬픔이를 끌어들였다.
요즘은 정신과를 마음건강과라고도 하더라. 정신과는 왜인지 치과처럼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 보이니 마음건강이라고 하겠다. 드라마에서나 본 듯한 상담실이었다. 정갈한 인테리어와 은은한 조명이 마음을 차분하게 했다. 의사 선생님 자리 뒤 작은 책장에는 '감정의 이해', '삶이 흔들릴 때 뇌과학을 읽습니다' 같은 심리학 책이 조르르 놓여 있었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또 다 너그러운 법이지. 마음의 문을 열고 요즘 기분을 털어놓았다. 후련했다. 펑펑 울었으면서도 공기가 한결 가볍게 들어오는 걸 느꼈다.
선생님은 내 잘못만은 아니라고 나를 다독였다. 그러고는 L 부장의 자존감이 매우 낮아 본인을 방어하기 위해 자기 생각 좀 받아달라며 떼쓰는 어린아이 같다고 왜 나와 팀원들에게 쏘아붙이는지 차분하게 설명해 줬다.
"어떤 선택을 해도 본인이 원하시는 걸 하시면 됩니다. 약을 먹어도 되고요. 쉬면서 마음을 돌봐도 됩니다. 그런데요. '일'을 되게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좋아하시는 걸 하면서 상황을 바꿔보려고 노력해도 됩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으로 나와 눈 맞춤하며 말을 이었다.
"버텨보시겠어요? 아니면 쉬시겠어요?"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마음속에서 냄비에 들깻가루까지 팍팍 넣고 팔팔 끓는 감자탕처럼 여러 가지 감정이 들끓었다. 어떻게 쌓은 내 커리어인데, 남이 나를 힘들게 해서 쉼을 얹는 게 억울했다. 버텨보고 싶었다. L 부장은 똥인데 더럽기 때문에 피해야 좋겠지만, 똥은 밟아 버리고 지나갈 수도 있지 않은가. 아, 내 발에 똥이 묻겠구나. 아무튼. 다음 상담일까지 나 스스로를 격려하는 데에 힘을 쏟고, L 부장은 어린애라고 생각해 보는 연습을 하기로 처방을 받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부장과 피할 수 없이 마주해야 했다. 특히 회식에서는 더욱 피할 수 없었다. 그가 내 앞에 앉아버리면 외통수. 장기 둘 때 왕(王)이 졸(卒) 바로 한 칸 앞에 왔을 때처럼, 거대한 권력을 독점한 왕 앞에서 좋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저 왕의 움직임만을 숨죽이고 바라볼 뿐.
부장은 늘 그렇듯 별생각 없이 회식 자리를 즐기고 있는 듯 보였다. 누구는 그 좋아하는 회식에 와서도 해맑게 웃지 못하는데, 정작 원인 제공자는 어제나 오늘이나 희희낙락하는 게 더 기가 차서 입을 다물고 조용히 구석 테이블에 있었다.
아뿔싸, 옆자리를 사수하지 못했다. 일하느라고 늦게 가는 바람에 자리가 널널한 테이블에 앉았다. 비어 있는 옆자리에 예상대로 L이 소주잔과 젓가락을 들고 웃으면서 앉았다. 그는 앉으면서 같은 테이블에 있던 후배에게 "요즘 살 빠져 보인다? 다이어트 한거야?" 하며 어떻게 보면 무례할 수 있는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시전했다. 그럼, 예전에는 살쪄 보였다는 건가? 더욱더 말 섞고 싶지 않아졌다.
말없이 그저 눈앞의 불판을 바라봤다. 먹지도 못하는 곱창들 사이에 그나마 먹을 수 있는 염통을 천천히 골라서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먹었다. 딱히 할 일도 없고, 그 집 곱창구이 세트에 염통은 8점밖에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써니, 요새 표정이 안 좋아 보여. 왜 그러는지는 조금 알겠는데, 그래도 너무 어두워 보여."
대꾸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도 하나 이야기 해주고 싶은 게 있었다.
"그래도 어제 회의에서는 제 의견 하나 괜찮다고 수긍해주시더라고요. 그러니 좀 나았어요."
버텨보기로 한 이상, 전날 회의에서 마음건강과 처방을 써먹어 봤다.
1. '내 생각이 맞다. 내가 누구보다 많이 안다.' 원래 이게 맞다! 내가 못났고, 내가 틀렸다는 거짓 정보로 내 머릿속을 채웠을 뿐이었다. 내가 실무자인데 내가 더 많이 알지 부장이 더 많이 알겠느냐!
2. 'L은 어린애처럼 알려달라고 징징대는 중학생 같다'고 생각했다. 자세하고 제대로 알고 싶어서 꼬리에 꼬리를 물며 질문할 뿐이다. 대답하다가 모르겠으면 나도 모른다고 해도 되는 거였다. 왜냐하면 그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싫거나, 내 의견을 무시해서가 아니라고 주문을 외웠다. 말하는 싸가지가 없는건 별개 문제였다.
이 치료법을 머릿속에 가장 우선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내 마음을 우선하는 마음으로 L과의 회의 2시간을 버텼다. 그러다 보니, 그도 한두 개 내 의견은 맞는 것 같다며 받아줬다. 나 참, 그거 하나 받아줬다고 또 기분이 좀 나아졌다.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가서 회식 자리에서 무뚝뚝하게 앉아 있다가 그렇게 그가 듣기 좋아할 말 하나를 던져주었다. 이 와중에 선배가 듣고 싶어 할 말을 하다니, 나란 사람 진짜 어쩔 수 없는 건가 생각하면서 L이 종알종알하는 걸 듣는 척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다 그의 이야기 말미에 "나도 고쳐보려고 노력할게"라고 들렸다. 그는 이제껏 여러 차례 여러 사람들이 조심해달라고 부탁해도 고치지 않았다. 이번에도 노력한다고 말만 하고 고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가슴속 응어리처럼 고여있던 말을 차분하게 그의 눈 똑바로 바라보면서 꺼냈다.
"그런데요, 왜 그렇게 우리 팀끼리 싸우시려는 거예요? 저는 팀원들끼리 으쌰으쌰 과제를 해나가고 싶어요. 근데 부장님은 왜 싸우고 혼내고 이기시려는 거예요? 그러면 일하고 싶던 마음도 사라지고, 저 스스로가 자신이 없어져요. 부장님, 저는 그만 싸우고 싶어요."
L 옆에 있던 후배가 아주 만족한 듯 씩 웃었다.
"저 이 자리 잘 앉은 거 같아요. 완전 사이다에요!"
사이다라고 말하는 후배의 말이 나에게는 더 사이다였다. 후배 말인즉슨,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고 못 박은 것이다.
부장한테 물어봤지만, 사실 답은 이미 알고 있다. 그는 다른 부서 사람들 앞에서 자기 후배들이 못나 보이길 바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본인이 창피하지 않기 위해 후배들을 채찍질하고 채근하는 게 가장 큰 목적이겠지만. 알고는 있지만 나를 힘들게 하는데 뭔 이유인들 뭔 상관임. 알빠노(리그 오브 레전드 인터넷 방송 관련 유행어 및 밈이자 신조어다. '알 바 아니다', '(내가) 알 바인가'라는 의미로 쓰인다). 후련하다.
그는 역시 바뀌지 않았다. 토요일 저녁 6시, 7시간째 회의하는 나에게, "내가 언제 이렇게 현황 분석해 오랬어! 너, 그만 말해"라며 퍼부었다. 그래서 나는 '아 이 사람 또 시작이구나' 생각하며, 나를 무시하는 말은 주워 담지 않고 무슨 말 하는지만 주워 담으려 했다. 이번에도 무슨 말 하는지, 무슨 일을 시키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도 자기가 정확하게 뭘 원하는지 모르겠단다. 아무튼 이건 아니란다. 잉? 아무튼. 일은 일이고 기분은 기분이다. 기분 나쁜 건 풀고 싶었기에, 한바탕 퍼붓는 소나기가 끝난 후 진중하게 물어봤다.
"부장님, 제가 부장님을 오해할까 봐 물어보는데요. 혹시 저한테 방금 화내신 거예요?"
L은 내가 아는 그의 표정 중 가장 놀란 표정을 하며, "아니? 내가 화낸 것처럼 느껴졌어? 나 화 안 냈는데?"라며 갑자기 태도를 고쳐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으로 돌변해서 네가 시간을 낭비할까 봐 걱정되어 그랬다, 입 밖으로 내면 생각이 굳어질까 봐 그만 말하라고 했다는 둥 퍼부었던 시간을 주워 담으려고 애썼다. 그런 모습이 이제는 엄마 앞에서 변명하는 어린애 같았다. "아 네, 그러니까 제가 걱정돼서 그랬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저는 화내는 것처럼 느꼈어요. 조금 공격적이었어요"라고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왜 나는 하고 싶은 말을 가슴 속 응어리로 만들고, 눈물로밖에 꺼내지 못했을까 생각해 본다. 아마 인정받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으리라. 근데 그 '인정'이라는 게 뭔데. 실체 없는 허상에 마음만 무거워지고 있었다. 하나씩 하나씩 전부터 생각했던 말을 꺼낼 때마다 후련하면서도 허무하다. 왜 진작 말하지 못했을까. 왜 고장 나고 나서야 고칠까. 인정, 성과, 상, 승진. 이것들을 얻은들, 마음은 칠흙같은 어둠 속이면 다 무슨 소용이 있나.
여전히 마음이 아프다. 그래도 후련하기라도 해서 이제 덜 아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