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조 들어오세요."
대기실이랄 것도 없었다. 나는 행정실 앞 복도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면서 안쪽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곁눈질로 힐끔 바라봤다. 경쟁자들은 나보다 서너 살은 족히 많아 보이는 복학생 선배들이 대다수. 간혹 조금씩 사람들이 꿈지럭거릴 때 들리는 소리 말고는 적막만이 공간을 채웠다.
그때가 내 인생 첫 면접이었다. 학교에서 주관하는 해외봉사단을 모집하는 면접. 주변에 비슷한 대외 활동을 해본 사람이 없어서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깜깜이였다. 그래도 인터넷에 면접 후기가 몇 있어 주요 질문에 대해 준비는 해뒀다. 이제 곧 내 차례라는 생각에 심장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리는 것 같이 떨렸다.
"안녕하세요, 화학공학과 써니입니다."
한 번에 네 명씩 한 조였고, 앞에 앉아 있던 면접관은 두 명. 왼쪽은 만화 슬램덩크에 나오는 농구부 감독님과 닮아서 온화한 미소로 안경을 쓰고 후덕한 인상의 남자분이었다. 오른쪽은 여자였는데, 여자기숙사에 깐깐한 사감님처럼 생겨서 나오는 아우라가 날카로웠다. 일단 남자 면접관을 슬램덩크 감독님이라고 여기고 너그러운 분이시길 바라며, 주로 그분만 바라보고 결연한 표정으로 면접을 받기로 마음먹었다.
"써니 학생은 왜 해외 봉사를 가고 싶은가요?"
오 다행히 준비한 질문이 나왔다. 이제부턴 다른 사람을 연기하는 배우로 변신해야 한다. 속은 자신이라고는 한 통도 없었지만, 겉은 세계라도 정복할 수 있는 패기를 지닌 것처럼 보여야만 했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이미 여러 해 동안 봉사에 깊은 뜻을 가지고 꾸준한 활동을 이어온 사람이 되어야 했다. 사실은 그렇게 오래, 깊이 있게 하지 못했어도 말이다.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나면 마음 깊이 크게 뿌듯함을 느끼며 지냈습니다. 대학생이 된 후로는 직접 도움을 줄 수 있어 여러 봉사활동을 해왔습니다. 특히, 1년간 토요일에도 출근하는 맞벌이 부부를 대신하여 아이들을 돌봐주고 체험학습을 인솔하면서 더욱더 봉사에 대한 보람을 느꼈습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 태국 봉사에서 아이들에게 편하게 다가가, 즐거움과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 지원했습니다."
짧은 답변이었지만, 사실 내 의지를 긴 호흡의 여정과 함께 요약하여 담았다. 돌이켜보면 중고등학생 때 사회복지과를 진학할지 고민했을 만큼 어려운 이웃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생각을 많이 했던 듯하다. 먼저 주는 행위에서 받을 수 있는 행복을 위해 내 체력과 정신을 온전히 헌신할 만큼 강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고, 복지과로의 진로 고민은 접었지만 말이다. 텔레비전에 가끔 광고로 해외에 위생이 좋지 못한 환경에서 어렵게 사는 아이들 영상이 나온다. 영상을 볼 때마다 내가 그 아이들에게 무언가 보탬이 되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아주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막연한 생각의 끝자락에서 나는 내 손을 내려다 보곤 했다. 내 손으로 직접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좋을텐데, 하는 생각을 삼키면서.
그렇게 대충 그려놓은 스케치처럼 흐릿했던 상상은 대학생이 되고서는 점점 채색하고 덧칠을 해갔다. 이제 그 기부 광고 왼쪽 위에 쓰여 있는 080-769-1004로 전화해서 천 원씩 내지 않아도, 어엿한 성인으로 직접 도와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실상 해외봉사단을 지원하려고 알아보니, 지원서를 내려면 국내 봉사를 남들보다 많이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내가 재단 이사장도 아니니, 기준조건을 만족시키려면 뭐든 할 수 밖에.
그래서 YMCA에 청년봉사단으로 돌봄 사각지대에 있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한 학년 동안 담임선생님처럼 한 해 동안 박물관이나 체험관에서 투어를 인솔했다. 6학년을 맡아 사춘기에 접어든 애들은 방향을 안내해 줘서 자기들 가고 싶은 길로 가기도 했고, 친구들끼리 놀다가 걸음이 느리거나 혹은 뛰어가 버려서 늘 정신이 없었다. 체험학습에는 1학년부터 6학년 모두가 같이 돌아다니는 통에 북새통, 시장통이 따로 없이 시끌시끌했다. 그럼에도 깔깔거리는 청량한 웃음소리는 나를 언제나 미소 짓게 했다. 돌봐줄 손길이 부족했던 아이들은 봉사를 그만두지 않고 꾸준히 하는 나를 점점 믿고 곁을 내주었고, 나는 어느새 언니같이 잘 놀아주는 선생님으로 자리 잡았다. 해외로 봉사하러 가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뜻밖에 마음이 통하는 울림을 얻었다.
면접실을 나오면서는 결과를 낙담할 수 없었다. 면접관의 표정이 애매한 구석이 있었지만, 내 대답도 얼마나 명쾌했는지 스스로도 납득이 안가는 부분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 합격 소식이 들려왔다. 나의 진심이 면접관에게까지 닿았던 걸까? 돌이켜보면, 나중에 회사 합격 했을 때 보다 더 기뻐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처음 치러본 면접이었고, 오랫동안 염원하던 결과여서 더 그러했다. 그때의 남친(지금의 남편)은 행여 그곳에서 내가 다른 남자와 눈이라도 맞을지 걱정되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더랬지.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면접에 통과한 건 기적에 가까웠다. 몇몇은 총학생회와 학부학생회 소속이라 합격이 어느정도 예정되어 있었고, 몇몇은 영상 촬영 역할을 맡기기에 적합해서 미리 점찍어 뒀었나보다. 혹은 학생회 사람들의 지인이면서 국내 봉사를 꾸준히 하던 학생들이 미리 면접관이 알 수 있게 학생회 인원이 면접 전에 이름을 일러두기도 했다. 나처럼 인맥 없이 서류전형과 면접을 통과한 사람은 셋뿐. 그마저도 그중 둘은 취업이력서에 한 줄 적고 싶어서 지원한 터라, 봉사에 관심도 없었다. 학교는 취업률 상승을 위해 졸업을 앞뒀으면서 스펙도 없는 4학년 이들에게 이력을 만들어주자고 자격이 안 돼도 합격시켰다. 해외 봉사를 하러 가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해서 면접관이 이름 모르는 사람으로 제대로 뽑힌 건 나뿐이었다.
어떻게 붙었을까. 당시 면접관 중 그 후덕한 남자분이 행정실장이었는데 면접 때 나를 굉장히 좋게 평가해서 강한 의견을 제시해 선발했다는 후문만 들었다. 내가 선해 보였을까. 아니면 활동을 무사히 잘 마칠 수 있어 보이는 자신감을 보였을까. 학교에서 그분을 우연히 지나가다 마주쳤을 때 반갑게 인사했는데, 정작 그분은 나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를 몰라도 상관없었다. 좋은 경험하게 해준 고마운 은인이기에 항상 인사를 잘해드렸다.
봉사단으로 가서 주로 학교 내 주변 시설을 더 짓거나 아이들에게 미술과 음악을 가르치는 작업을 했다. 햇볕 아래서 담장을 쌓아 샤워장을 만들고, 벽화 그리기와 같이 온전히 내 손으로 마음을 전달하는 봉사의 연속이었다. 내가 바라던 상황이었지만, 내 몸은 안 쓰던 근육을 쓰니 여기저기 아우성쳤고, 소수민족의 음식이어서 위장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국 위경련으로 휘청거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좋았던 시간이 더 기억에 남는다. 동요 '올챙이송' 노래와 율동을 알려주고, 아이들이 따라 할 수 있게 여러 차례 시범을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대목인데, 태국 애들에게 한국노래로 한국어로 춤을 알려줬다니. 무슨 생각이었는지 한편으로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아이들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어떤 곡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따라 할 수 없이 까불거리며 자기 맘대로 춤췄고, 흥겹게 몸을 흔드는 아이들의 모습은 인생이 사실 그렇게 심각한 건 없음을 느끼게 해줬다. 지금, 이 순간 함께하는 사람들과 즐거우면 된다.
내가 만드는 공간을 쓸 아이들과 밥도 같이 먹고 종종 같이 놀았는데, 도와주는 게 고마웠던지 다들 잘해주었고 함께 즐겁게 지냈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해맑은 아이들의 미소와 웃음소리가 아직도 선명하게 느껴진다. 내 인생 찬란했던 순간 중 하나이다.
그때 쓴 일기장을 보니 이런 구절이 있다.
'이 애들은 부모를 잃은 상처를 평생 안고 살 텐데, 나는 사랑니 따위 좀 아프다고…. 역시 오길 잘했다.'
때로 인생에서 '어떻게 붙었나' 싶을 정도로 황공하게 감사인 일도 생기는 법이고, '어떻게 이러지'할 정도로 황당한 상황을 마주해야 하는 법이니까. 그래, 투정 부리지 말고 현실을 마주해서 이겨내 봐야지.
그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얘들아, 사비로 다시 꼭 오겠다고 약속하고 왔는데 마음으로만 수백 번 가서 미안해. 그리고 나에게 대가 없이 따스한 미소를 선물해 줘서 고마워. 아, 면접에 합격할 수 있도록 합격신을 내려주신, 나의 진심을 읽어주신 그때 그 행정실장님께도 마음 깊이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