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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낭송 Dec 09. 2023

체호프, 『관리의 죽음』을 읽고

독서 모임 시리즈; 체호프 단편선



체호프는 첫 문장(“어느 멋진 저녁, 이에 못지않게 멋진 회계원 이반 드미트리치 체르뱌코프는 객석 두 번째 줄에 앉아서 오페라글라스로 「코르네빌의 종」을 보고 있었다.”)에 주인공의 위치를 분명히 명시한다. 즉 회계원 이반 드미트리치 체르뱌코프, 즉 체르뱌코프는 그가 향유하는 사회로부터 사람으로서의 성원권을 인정받은 존재다. 그는 무려 오페라글라스로 「코르네빌의 종」이라는 오페레타를 즐겨 보는, 체면과 명예가 있는  귀족적 사회의 구성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라는 말을 통해 소설의 갈등이 시작한다. 그가 다름 아닌 “재채기”를 한 것이다. “그 누구라도, 그 어디에서라도 재채기를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주인공 역시 이러한 재채기가 통제 바깥의 영역에 있는 생리적 현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체르뱌코프는 아주 우아하게 재채기를 마무리하며 상황을 정돈하려고 시도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의 당황스러운 사건이 발생한다. 주인공은 그만 앞의 줄에 앉아 있던 노인이 자신의 대머리와 목을 장갑으로 닦으며 투덜거리는 장면을 보고야 말았다. 자신이 실례를 저지른 대상은 무려 브리잘로프 장군이었다.


장군은 그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갑작스러운 상황으로 인해 투덜거렸을 뿐이며, 그건 장군에게 아주 사소한 일상적인 해프닝에 불과했을 뿐이다. 그런데 정작 체르뱌코프는 일상 속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

보기는 봤으나행복감은 더 이상 느낄 수 없었다불안감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그를 괴롭히는 불안감은 통상적으로 일상에서 경험하는 불안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는 “자신이 무례를 저질렀다는” 사회적 상황에 압도되어 병리학적 증세에 가까운 불안을 경험한다.


그에게 불안을 야기하는 근본적인 원인, 그의 심리 기저에 깔린 원초적인 불안은 무엇인가? 그는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가 두려워하는 감정의 실체는 무엇일까?


프로이트는 불안을 세 가지의 단계로 나눈다. 첫째, 외부 자극로부터 오는 현실 불안이다. (외부 위험이 사라지면 해당 불안은 감소한다.) 둘째, 양심과 본능으로부터 야기한 도덕적 불안이다. 즉 자신의 도덕성과 갈등함으로써 야기되는 불안이다. (본인의 양심이 지나치게 발달되었거나 이상적일 때, 또는 초자아가 부정적인 감정에 반응할 때 생긴다.) 세 번째 불안은 신경증적 불안이다. 불안을 느껴야 할 외부적 사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아상이 이성적이기 때문에 본능을 억제함으로써 등장하는 자기검열적 자아이다.


이 소설은 신경증적인 불안이 극도로 부풀었을 때 생기는 불안감을 일종의 알레고리로서 과장하고 있다.


쳬르뱌코프는 집으로 돌아왔다그러나 편지는 쓸 수 없었다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보아도 무슨 얘기를 써야 될지 몰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체르뱌코프 본인은 알고 있다. 재채기라는 생리적인 것으로 인해 저질러진 무례는 어쩔 수가 없다는 것.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무례함이 자의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정받기 위해 집착한다. 자기검열의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무례함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사회적 체면의 실추를 두려워한다. 그의 신경증적 불안은 극적으로 과잉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그의 개인적인 현상일까? 어쩌면 이 사회가 그의 신경증적 불안을 자극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소설에서 논하는 사회는 명예를 마치 자신의 존엄처럼 여기는 러시아 내 특권주의적 사회상을 드러낸다. 대체로 특권주의적인 사상은 민주주의적인 사상과 대치되기 마련인데, 때때로 우리는 이 사회의 일면에서 한국 사회의 일면을 엿본다. 그만큼 한국 사회가 불안이라는 감정으로 작동되는 사회이기 때문일 것이다. 상명하복의 피라미드적 수직관계가 잔존하는 문화, 명예와 체면이 죽음보다 우선시되는 사회, 히스테리적 불안으로 삶의 안정성을 말살하고 경쟁을 발화시키는 세상. 19세기 러시아 문학가인 체호프로부터 우리는 우리 사회의 어떤 모습을 거울처럼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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