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낭송 Dec 10. 2023

체호프, 『공포-한 친구의 이야기』를 읽고

독서 모임 시리즈: 체호프 단편



이 이야기는 드미트리 페트로비치 실린이라는, 그럴듯한 대학교를 나와 그럴듯한 직장을 가졌으나 감정적인 이유로 인해 농장을 경영하기 시작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 소설은 흥미롭게도 2인칭 관찰자 시점을 표방하고 있는데, 작가가 조금 독특한 시점을 선택했을 때에는 그 작가가 왜 이 시점을 선택했을지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다.


이 소설 속에는 ‘나’에 대한 정보가 없다. 다시 말해서, ‘나’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강 ‘나’가 어떤 사람인지 글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라는 존재가 소설 속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디 ‘공포’라는 감정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숭고와 공포는 동일한 원천으로부터 기원한다. 다시 말해서, 숭고와 공포는 양가적인cons and pros 감정이다. 또는, 숭고의 원리는 공포이다. 숭고가 무엇인가? 신으로부터 느끼는 거룩함, 위대한 자연으로부터 느끼는 압도적인 거대함. 우주로부터, 심해로부터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불가해함. 이러한 숭고는 결국,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더 거대한 무언가, 즉 미지에 대한 공포로부터 작용한다.


실린의 삶은 공포에 기인해 있다. 즉, 그에게 삶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공포스러운 것이다. 불가해하고 미지한 것이다. 우리가 물 한 병을 마신다고 생각해보자. 이 물은 원래 강에 있었을 수도 있고, 바다에 있었을 수도 있고, 지하수에 있었을 수도 있다. 그대로 흘렀을 수도 있고, 산업용으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으나, 식수용으로 분류되어 우리의 앞에 왔다. 식수용으로 분류되었더라도 우리는 이 물로 씻었을 수도 있고, 손을 헹궜을 수도 있으며, 물병이 넘어져 흘렀을 수도 있다.

우리가 물 한 병을 마시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인간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운명의 장난과 선택, 우연이 엮였는가? 이것을 과연 정말 우연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러한 감정으로부터 오는 숭고, 그리고 공포는 맞닿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포의 감정을 원천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또는 이러한 감정으로부터 배제된 두 존재가 있다. 한 명은 인생을 회피한 채로 살아가는 '40인의 순교자'이고, 다른 한 명은 실린과의 무거운 관계를 지양하는 '나'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 소설 속에서 구조적으로 40인의 순교자와 동일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40명의 순교자, 즉 가브류쉬카는 밑바닥 인생으로 살아간다. 그는 술과 방탕으로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회피하면서, 쾌락을 인생의 목적 삼는다. 그 자는 스스로의 문제점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한다. “저는 오로지 한 가지 원인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습죠. 그게 무엇인지는 하나님께 여쭤봐야 할 일이지만 말입니다.”


이러한 화법은 앞서 ‘나’의 표현과도 묘하게 겹친다. "문제의 핵심은 그의 아내 마리야 세르게예브나가 너무도 내 마음에 들었다는 점에 있었다." ‘나’도, '40인의 순교자'도, 우리 삶에 주어지는 문제의 복잡한 얽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40인의 순교자는 세바스티아의 40인의 순교자를 뜻한다. 세바스티아 지역의 총독이 40인의 기독교 군인들을 발가벗겨 얼어붙은 호수에 집어넣으며 배교를 강요할 때, 40인의 군인들이 밤새 노래를 부르며 버텼다는 일화이다. 가장 밑바닥 인생인 가브류쉬카에게 왜 이토록 숭고한 이름을 붙였을까?


우리는 마치 하나의 문제점 때문에 우리의 인생이 꼬였다는 듯이 삶을 이해할 때가 있다. 동일하게, 우리는 마치 하나의 절대적인 존재 덕분에 우리의 인생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기도 한다. 과연 그러한 것이 존재할까? 체호프는 우리에게 질문한다. 정말로 당신의 인생은 단 하나의 요소로 인하여 선택된 것인가? 그게 무엇인지 ‘하나님’이라는 단 하나의 절대자에게 맡겨놓은 것처럼 물어보아야 하는가?


신은 죽었다. 구원은 없다. 그런 상황이 어째서 두렵지 아니한가? 당신들은 신을 잃은 이 상황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이 인생이 정말 두렵지 않단 말인가?

우리는 아는 것이 거의 없어요그렇기 때문에 매일 실수를 저지르고 옳지 못한 짓을 하며 서로 비방하고 남의 일에 끼어드는 겁니다사는 데 방해만 되는 불필요하고 시시한 짓거리들에 우리는 자신의 힘을 소진합니다이것이 무섭습니다왜냐하면 이 모든 일이 무엇을 위해서누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으니까요.”


우리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공포는 아는 것이 없음에서 온다는 공포의 본질을 명확하게 명시한 것이다. 우리는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절대자에게 의지하고,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방치하는 것이다.  밑바닥 인생이지만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야!”, “어이, 이 친구들아. 나는 번듯한 가문 출신이라고. 알기나 하나!”라며 소리치는 40명의 순교자. 무지로부터 획득한 자유는 과연 진정한 자유라고 말할 수 있는가? 회피하는 삶에 진정 자유란 존재한가?


끝내 ‘나’는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실린처럼 이 삶에 엮인, 절대자가 없는 실존의 방식을 두려워 하기 시작한다. “나는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어째서 꼭 이런 식으로 끝나게 되었을까? 다른 방식은 없었나? 그녀는 무엇 때문에 나를 심각하게 사랑해야만 했고 그는 왜 모자를 가지러 내 방에 나타나야만 했을까? 그런데 모자가 여기서 무슨 상관이 있는가?”

정답은 그가 모자를 가지러 왔다는 우연. 이 모자는 불륜 행위를 발각당하는 인과관계가 되었으나 결코 어떠한 상관관계로는 남지 않았다는 사실. 우리 삶에 주어지는 이러한 진실은 얼마나 두려우며 혹독한가? 이 삶의 불가해를 진정으로 마주할 자신이 있는가?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가난과 절대적인 무지 속에 있는 것이라면 이런 가혹한 심판이 누구를 위해서 필요한 일인지 모르겠어요.” 실린은 절대자의 어떠한 가혹한 심판에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 인생의 목적과 의미는 무엇인가? 삶에 드리워지는 절대자의 죽음을 두려워하라. 인생의 실체를 두려워하고, 무지를 두려워하라. 그럼에도 살아가고, 도망치지 말고 절대적으로 맞서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 나아감으로써 삶은 유의미하다.


작가의 이전글 체호프, 『관리의 죽음』을 읽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