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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낭송 Jan 13. 2024

이미상,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을 읽고

2023 제 14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 수록작


도입부에는 세 명의 여자가 있다. 목경은 그 중 세 번째 여자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일회용 비닐봉지와 용지를 쓰지 않겠다고 (고귀한 희생에는 어쩔 수 없는 인위가 묻어난달까요?”) 다짐한 세 번째 여자. 하지만 불우하게도 종종 천 가방을 깜빡하는 바람에, 틈 없는 정신과 틈뿐인 몸의 간극을 메우는 무수한 규칙(천 가방을 챙기지 않았다면 맨손으로 모든 물건을 옮겨야 한다.)을 안고 사는 세 번째 여자. 그 여자를 바라보던 목경은 자연스럽게 모래 고모와의 기억을 상기한다. 그러니까, 틈 없는 정신과 틈뿐인 몸의 간극을 메우는 무수한 규칙 속에 살았던 모래 고모를. 사람들이 세 번째 여자의 팔에 물건을 쌓기 시작하듯, 할 순 있지만 죽어도 하기 싫은 일을 인생 위로 쌓아갔던 모래 고모와의 기억을 말이다.


우리에게 쌀은 언제나 필요한 주식이다. 보리는 쌀만큼 필요하진 않으나, 종종 주식으로 대체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래는 대체조차 되지 않고,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이다. 이처럼 모래 고모는 가족 커뮤니티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모래 고모는 집안의 골칫덩어리로 불렸고, 스스로도 그러한 역할을 자처했다.


가령, 부모님을 부양하는 일 같은 것. 또는 자식들을 돌보는 것. 어린 조카들을 돌보는 괴짜 고모의 역할 같은 것. 사람들이 할 수 있지만 정말 하기 싫은, 결정적인 한 방을 위해 존재하는 그 아래 깔린 시시한 일들 같은 것. 모래 고모는 그러한 역할을 해내면서 스스로 골칫거리를 자처한다. 목경의 부모가 양육으로부터 권태를 느꼈을 때, 고모는 목경과 무경을 돌본다. 목경의 부모와 그들 형제가 부모를 부양할 수 있으나 너무나도 하기 싫었을 때, 마찬가지로 고모는 자신의 부모님을 부양한다. 그러나 목경의 엄마는 그렇게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을 대신 해준 대신 스스로의 보험금을 납입하지 않은 고모를 평면적으로 평가한다. '자기 인생을 방치하는 사람.'


고모의 장례는 기본으로 치뤄진다. "그리고 장례에서 기본은 최저가를 의미한다." 어쩌면 이 가격은 우리 사회가 골칫덩어리들에게 다른 사람들이 할 순 있으나 하기 싫은 일들을 부여할 때 매겼던 값어치처럼 보인다. 고모가 다른 사람들이 하기 싫은 일을 대신 해줌으로써 수행했던 역할은 끝내 최저가라는 평가를 받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고모가 원했던 일'이라고 믿는다. 그런 믿음으로 이루어진 집단 합리화는 편리하다. 고모를 사고뭉치로 치부하면 되니까. 고모는 사고뭉치여서 우연히 가출을 했고, 우연히 목경과 무경을 돌보았던 것이라고. 사고뭉치여서 시집도 가지 못했고, 그래서 결국 부모님을 부양했다고 믿으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은 사냥을 나온 남자들과의 관계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남자들은 '할 수 있는데 하기 싫은 것'이 총을 찾으러 가는 일이라고 말했으나, 정말로 고모가 하기 싫었던 것은 남방들의 대화를 맞춰주는 것이었다. 고모는 모닥불도, 조카도 포기하고 총을 찾으러 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들은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할 수 있는데 하기 싫은 것, 그것이 야밤에 총을 찾으러 나가는 것이라고 믿는다. 희롱을 참으면서까지 남방들에게 의존하고 싶은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틀렸다.


사람들은 그들이 욕망하는 것을 모래 고모가 욕망한다고 생각한다. 모래 고모는 자신의 욕망을 파괴시킴으로써, 고모의 욕망을 타인들의 인정에 종속시킴으로써 그들의 욕망을 실현해주는 존재다. 마치 우리가 두꺼비에게 부르는 노래와도 같다. 우리는 두꺼비에게  “두껍아두껍아헌집 줄게새집 다오.”라고 요구한다. 이 부름은 일종의 주술적 효과이자 우리의 믿음이다. 모래 고모는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두꺼비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물론 모래 고모가 이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는 나름의 나르시시즘이 따른다. 고모는 타인의 욕망을 실현해주는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하는 자기애를 내면에 품는다. ("‘할 순 있지만 정말 하기 싫은 일’에 빠진 사람들 앞에 짠, 나타나는 고모에게는 오만한 고약함도 있었다.")


그런 모래 고모의 자기애를 형상화 한 것은 바로 무경이다. 목경이 바라보는 모래 고모가 타인의 시선과 자신의 욕망 속에서 이상화ideal 된 자신이라면, 무경은 모래 고모 내면에 품고 있는 고모의 진짜 욕망이자 진짜 자기 자신이다. (“그러면서 언니는 점점 현실과 멀어져 어딘가로 흘러간 게 아닐까. 수십 년 뒤 햄스터를 두 마리에서 백 마리로 늘리는 사람으로.”) 그러니 무경은 명확하게 꿰뚫어 본다. 모래 고모의 진정한 욕망이 무엇인지를.




반면 목경은 고모를 명확하게 꿰뚫어 보지 못한다. 어린 아이들의 믿음에는 주술적인 효과가 있고, 목경은 고모가 원하지 않는 남자와 고모의 결합을 바랐기 때문이다. 고모와 남자들이 단순히 재미있게 놀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에, 목경은 고모에게 선택을 받지 못한다. 무경은 ‘할 수 있지만 죽어도 하기 싫은’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했지만, 목경은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고모를 보았다. 마치 "믿어주는 대로 행동하게 되어 있다"고 말한 남자들처럼, 할머니처럼, 목경의 부모처럼 말이다.


목경은 상징적인 질서에 순응하는 인물이다. 즉, 목경은 타인의 눈을 대변한다.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모래 고모도 바라고 있을 거야, 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목경은 타자이고, 타자의 욕망이며, 모래 고모의 욕망이 자신의 욕망과 동일할 것이라고 믿는 폭력적이고 어린 아이와 같은 자기중심적인 시선의 형상화이다.     

그러니 그들 사이에 남는 것은 '틈 뿐인 몸'밖에 없다. 무경과 고모 사이에서 일어난 원감과 깊은 이해가 틈 없는 정신이라면, 목경과 고모는 손을 잡거나 살을 비비는 등의 육체적인 유대감으로만 연결된다. 이 간극을 채우기 위해서 어떠한 규칙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고모의 비밀스러운 원칙("고모의 비밀스러운 원칙을 알고 보면 고모의 가출은 다르게 보인다.")인 것이다.   


이 글에서는 계속해서 "똥꼬"라던가 "좌약"과 같은 표현이 등장하고, 자연스럽게 프로이트의 항문기가 연상된다. 항문기는 기본적으로 자기자신의 "행동 통제"를 숙련하는 단계다. ( “자기 절제라는 고귀한 희생에는 어쩔 수 없는 인위가 묻어난달까요?”) 항문기 아이는 자연스럽게 공격성이 강해지며, 폭격이나 폭발과 연관된 환상을 가진다. 그리고 이러한 공격성을 중화하는 것이 바로 리비도, 즉 성적 본능 또는 애정이다.


모래 고모는 그동안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듯 굴며 스스로를 파괴했고, 동일한 방식으로 타인의 욕망을 실현해 왔다. 모래 고모가 그러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존재했던 상처와 분노를 대신 터뜨려준 존재가 바로 무경이다. 무경의 실종은 그동안 자기 절제라는 고귀한 희생으로 쌓여 왔던 모래 고모의 공격성을 대신 터뜨리는 매개체이다. 고모는 그렇게 자신 마음 안에 있던 무언가를 구원받는다.


“츄츄! 당신의 서방이지?” 더 나아가 이 이야기는 남근기로까지의 이행으로 나아간다. 남근기는 내면에서 외부의 세계로 나아가는 이행적 과정이다. 그러니 이 글의 제목이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이야기는 목경이 유아론적 세계에서 탈피하여 의도와 현실의 괴리감을 체험하는 남근기적 과정을 성인인 목경의 회상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아마 당시 목경의 나이도 5살 정도일 것으로 추측한다.)


끝내 우리는 고모의 비밀스러운 원칙을 꺼내본다. 고모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할 수 있지만 정말 하기 싫은 일의 수렁에 빠진 사람들 앞에 짠, 나타날 것. 둘째, 그리고 그것들을 정말로 고모 스스로 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굴 것. 그렇게 결정적인 순간을 융기시키는 것. 그리고 우리 사회가 이러한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값어치를 매기는지, 그리고 그들이 정말로 "그것을 하고 싶다고" 주술적으로 믿고 있는지 역시 되짚어 본다.


마지막으로 무경의 비밀리스트는 고모에게 츄츄와 같은 메타포로 등장한다. 즉, 사적이고 남에게 보이지 않는 비밀스러운 사생활의 무엇이다. 과연 이 무경의 비밀리스트를, 고모의 츄츄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우리는 과연 이것을 무엇으로 부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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