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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낭송 Aug 15. 2024

반항하는 자에게 영광 있으라,『반항인』

알베르 카뮈, 『반항인』


Engagement between HMS Amelia and French frigate l’Arethuse, off the Isles of Loss, 1813



1. 혼모노의 출현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사는 건 저의 소소한 취미 중 하나입니다. 한국 문학이 이제는 어떤 흐름으로 나아가려 하는지, 우리 문단계가 어떤 불의에 관심을 가지는지 알 수 있지요. 올해 2024년, 가장 제 눈에 들어왔던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입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신을 잃은 늙은 무당 앞에 새로운 아기 무당이 이사를 오는데요. 늙은 무당은 자신이 신에게 버려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도리어 그로 인해 삶에서 가장 ‘혼모노[진짜]’스러운 굿판을 벌이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무척 흥미롭지요. 평생 신에게 바친 삶이었지만, 도리어 신에게 버려지는 순간 드러나는 ‘진짜’의 것. 이때 늙은 무당의 혼모노적인 태도를 저는 ‘반항’이라고 명명하겠습니다. 나를 버린 신, 그리고 신이 만든 부조리를 향한 반항이지요.


반항이라는 키워드를 들으시자마자 떠오른 이가 한 명 있으실 테지요. 예, 카뮈입니다. 카뮈는 시대를 넘나들어 많은 사랑을 받은 철학자이자 기자이며, 정치인이자 군인이었습니다. 현 독서 모임에서도 카뮈에 대한 주제가 종종 거론된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오늘 소개를 드릴 책은, 알베르 카뮈의 『반항인』입니다.


*


『반항인』의 원제는 『L'Homme Révolté』 입니다. 현대지성사에서는 이를 『반항인』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일전 민음사에서는 『반항하는 인간』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반항적 인간』이나 『반항인』이라는 표현보다는, 『반항하는 인간』이라는 표현이 카뮈의 의도와 조금 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카뮈가 말하는 ‘반항하는 인간’을 단순히 『반항인』이라는 인간 부류로 범주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어째서 옮긴이가 『반항인』으로 옮겼는지는 이해가 갑니다. 특히 카뮈의 잘 알려진 명서 『이방인』과 연결할 수 있다는 지점에서는요.


이 책을 한마디로 정의하라고 하라면, 저는 ‘반항의 역사서’라고 정의하겠습니다. 태초에 반항하는 자로는 프로메테우스가 있었으며, 카인이 있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신에게 반항하여 불을 훔쳤고, 카인은 비합리한 신의 상벌에 반항하여 아벨을 죽였지요. 신의 시대 동안, 카인은 교훈적 일화에 등장하는 악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카인이라는 기표는 새로운 상징과 함께 계몽주의 문학에 인용되기 시작합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헤세는 『데미안』을 통해 도리어 카인의 명예를 수복하기 위해 시도한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 아래, 카인이 인간과 신의 위치를 전복시키기 위한 계몽주의 운동의 상징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해두어야 할 점은, 카뮈는 카인을 옹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본 책에 다음과 같이 등장합니다.



“논리적으로 볼 때, 살인과 반항은 모순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만약 단 한 사람의 주인이라도 살해된다면, 반항은 더 이상 자신의 정당성을 끌어낸 인간 공동체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 (…) 카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그는 사막으로 달아난다. 만약 살인자가 군중이라면, 그 군중은 사막에서, 혼잡이라고 불리는 또 다른 고독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
(본 책, 408p)


카뮈는 반항을 옹호하였으나, 그가 말하는 반항에는 분명한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으로 인해, 본 책은 카뮈가 사르트르와 이념적으로 대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르트르와 카뮈는 부조리와 실존을 논하는 작가였으나, 그들이 논하는 사상에는 결합할 수 없는 어떠한 지점이 있었습니다. 마치 프랑스 대혁명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사상적인 면에서 대립했던 루소와 볼테르처럼 말이지요. 책 『반항인』을 낸 후, 당대 카뮈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고립되었습니다. 지식인 무리는 카뮈가 완전히 패배하였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훗날의 우리가 바라보는 카뮈와 사르트르의 논쟁은 시대성과 결합함으로써 더더욱 흥미롭게 느껴지는 듯합니다.





2.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     


Je me révolte, donc nous sommes. 아직도 이 문구를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이 선연합니다. 당시 저는 철학이라곤 유사 철학만 알던, 전면 무지렁이였는데요. 어째서 이 문장이 유독 제게 와닿았을까요. 이 문장을 가장 철저하게 드러낸 작품이 바로 카뮈의 『페스트』입니다. 페스트로 인해 폐허와 고립만이 잔존하는 마을, 소설은 절망하고 모든 것을 포기할 법한 상황을 묘사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페스트에 반항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조직이 바로 자원보건대입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연대란 반항을 말미암아 태동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보다 더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의 의미를 소설로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요?


그런 점에서 카뮈는 반항 숭배자입니다. 인민의 평등을 외친 프랑스 혁명 이래, 반항은 가장 숭고한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거든요. 봉건제라는 부조리를 깨달은 인민들의 처절한 반항이야말로 이성과 합리적 세계의 토대였으니까요.    

 


부조리의 경험에서 고통이란 개인적인 것이다. 반항 운동을 기점으로, 고통은 집단적인 것이 되며 만인의 모험이 된다. (…) 요컨대 반항은 모든 사람 위에 최초의 가치를 정립시키는 공동의 토대이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본 책, 47-48p)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카뮈는 모든 반항을 옹호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사르트르와 카뮈의 논쟁이 시작합니다. 모든 혁명가는 반항하는 인간입니다. 그들은 부조리를 깨닫고 반항을 결심한 자들입니다. 하지만 반항하는 인간들은 모두 혁명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혁명가는 반항한다’는 명제는 성립되지만, 해당 명제의 역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카뮈는 『반항인』의 제1장에 서술했습니다.

  


한마디로 반항 사상은 반성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영원한 긴장이다. 반항 사상의 과업과 행동을 뒤쫓아가면서, 우리는 반항 사상이 시초의 고결함에 충실히 머물러 있는지, 아니면 권태와 광기 때문에 굴종에 도취한 채 시초의 고결함을 망각하고 있는지 판단해야 하리라.
(본 책, 47p)



혁명이란 쉽게 변질되는 행위입니다. 혁명은 때로 인민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사르트르의 유명한 저서,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등장하는 ‘앙가주망 문학La littérature engagée’을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사르트르는 문학의 본질은 부조리를 고발하는 앙가주망이라고 외쳤습니다. 사르트르는 유명한 공산당 지지자였으며,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한 정치적 활동을 오랫동안 지속해 왔지요. 보부아르의 소설 『레 망다랭Les Mandarins』을 접해본 분들도 계실 텐데요. 해당 소설 속에 등장하는 로버트 뒤브뢰유Robert Dubreuilh는 실제로 사르트르의 흔적이 엿보이는 인물이지요. 뒤브뢰유와 앙리는 실제 사르트르와 카뮈처럼 대립하기도 하고요. 어쨌거나, 『반항인』에 적힌 일명 왜곡된 혁명은 카뮈가 사르트르와 다른 노선을 추구했다는 것을 명징하게 보여줍니다.


카뮈가 추구한 문학의 본질은 분명 어느 부분은 사르트르와 유사했으나, 많은 지점에서 차이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독자가 탄생하는 순간 저자는 죽는다’고 외쳤던 롤랑 바르트는 카뮈의 『이방인』을 ‘중립적인 글쓰기’로 극찬한 바 있지요. 순수한 언어로서 가장 이상적인 문체이며, 지배적인 문화에 오염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카뮈가 사회 참여에 무심했던 건 결코 아닙니다. 카뮈의 르포, 『카밀리의 비참』에는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 카밀리에 산재하는 빈곤과 사회 문제가 상세히 적혀 있거든요. 다만 카뮈는 순수한 반항을 추구했을 뿐입니다.


순수한 반항. 그것은 정치적 의도가 없는 반항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반성 없이 존재하는 모든 반항을 말하는 것입니다. 혁명이 아닌 반항, 의도가 전복되지 않은 오로지 순수한 반항.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 역사 속에 등장했던 순수할 수 없었던 반항의 수많은 사례가 떠오르십니까? 『반항인』을 읽어보신다면, 카뮈가 추구하고자 했던 반항의 용례를 정확하게 찾아보실 수 있겠지요.





3. 인간과 비인간, 그 이후를 넘어     


저는 철학이 수단이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철학자 백상현 선생님께서는 ‘목적이 되지 않는 철학은 모두 유사철학이다’라고 말씀하셨지만, (더 정확히는 쓸모가 있는 철학은 그야말로 유사철학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철학자가 아닌 인간과 사회에게 철학은 수단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철학은 오염될 수밖에 없는 사명을 타고난 것입니다.


춘추전국시대 공자가 유교를 발명했을 무렵, 유교는 그 사회에 가장 적합한 모듈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철학은 시대에 맞추어 태어나지만, 지배자의 논리에 병합되며 전락합니다. 그러나 체계가 전락해도 사상은 남아,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때 철학은 다시 발원합니다. 그런 점에서 ‘학문은 세대를 초월한 보편적 타당성을 지녀야 한다’던 후설의 주장도 유효하다고 보는 것이지요.


더 이상 우리의 시대는 유교로 회귀하길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새로운 철학을 요구합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최근 한국 문학에서 가장 자주 논의되었던 소재가 바로 ‘인간과 비인간’ 담론이었습니다. 많은 글 속에서 레비나스와 데리다가 불판 위를 오갔습니다. 수많은 SF 소설에서 우리 사회의 ‘타자’를 비인간 존재로 환유했습니다. 그리고 2024년, 현재에 이르러 타자 철학과 결합한 부조리 철학이 다시 인용되고 있습니다.


젊은 작가들이 다시금 실존 철학에 주목하고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유의미한 지점이라고 봅니다. 그게 우리가 카뮈를 다시 읽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COVID-19 팬데믹 기간, 우리는 『페스트』의 재현을 경험했습니다. 신자유주의와 자국민 우선주의의 물결 속에서, 우리는 자꾸만 사회의 부조리를 발견합니다.

그 사이에서 수백 년 전, 카뮈와 사르트르가 나누었던 담론 논의가 다시금 우리 사회를 조명합니다. 『반항인』은 사르트르의 말처럼 지나치게 역사를 부정하고, 마치 자신이 관조자인 것처럼 읽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카뮈의 책을 통해, 우리가 반항하는 데 있어서 어떤 방향으로 향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겠지요.


우리는 두 철학자 중 누구의 의견에 동의하는지 논의를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또는 두 사람의 말을 적절하게 수용하거나 반박하여, 나만의 철학을 탄생시킬 수도 있지요. 두 철학자의 논의 중 무엇이 더 우리 시대에 유효한지, 우리의 연대는 어떤 방향성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고민해 볼 수 있겠습니다. 어쨌거나 『반항인』을 읽어보는 것은 분명 유의미합니다. 결국 내가 반항함으로써, 우리는 존재하니까요.



인간은 각자 최후의 낱말을 스스로 창조하거나 모색한다. 그저 사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죽음을 기다리지 말고 하나의 운명을 획득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지금의 세계보다 더 나은 세계를 꿈꾸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
(본 책, 380p)


대성당들의 시대가 무너진 후, 우리 인간은 시시포스로 몰락했습니다.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일 굴러떨어지는 돌을 쌓아 올려왔지요. 어떤가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연 혁명일까요, 반항일까요? 여러분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


카뮈가 시대가 지나도 사랑을 받는 건, 그만큼 카뮈가 우리에게 주는 보편적 울림이 있기 때문일까요. 여전히 우리에겐 카뮈가 필요한가 봅니다.







                    * 본 책은 현대지성 『반항인』을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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