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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낭송 Sep 03. 2024

악령이 든 마을, 도스토옙스키 『악령』


출처를 모르는 어느 짤. 러시아 문학의 굴레




1. 들어가는 말


안녕하세요, 찬연한입니다.


우리에게 러시아는 익숙한 듯 무척 낯선 나라입니다. 교류가 많은 나라가 아니기도 하고, 언어나 문화가 그다지 익숙지 않은 탓이지요. 그럼에도 우리에게 러시아 문학은 꽤 잘 알려져 있습니다. 꼭 읽어본 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 톨스토이의 이름은 들어보았을 겁니다. 러시아 문학은 정말 유명하지만, 동시에 커다란 장벽이 있습니다. 바로 이름입니다. 러시아 문학을 읽다보면, 애칭과 별칭, 호칭이 뒤섞여 화자를 알아보기 힘든 경우가 생깁니다. 글을 읽다가 앞장으로 다시 넘어가, 그 이름이 가리키는 사람을 찾아봐야 하는 경우도 대다수지요. 학창 시절 국어 시간, 고전 문학 문제를 풀다 보면 반드시 화자를 확인해야 하는 때가 생기는데요. 마치 학창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도 듭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도스토옙스키도 러시아의 대문호 중 한 명입니다. 우리가 흔히 러시아 문학의 황금기라고 말하는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부흥을 이끌었던 작가이지요. 도스토옙스키의 글을 읽다 보면 마찬가지로 이름을 연신 확인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상당히 귀찮고 번거로운 작업인데요. 그럼에도 도스토옙스키의 글은 반드시 읽어야 할 명저로 꼽히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악령Demons』의 주인공은 단연코 니콜라이 스타브로긴으로, 세상을 권태로운 시야로 바라보는 신비주의 청년입니다. 처음 니콜라이를 본 사람들은 그의 말솜씨와 잘생긴 외모에 호감을 가지지만, 재미로 동네 사람의 코를 쥐고 질질 끌고 다니는 기행을 보며 곧 경악하게 되지요. 그는 때로는 아주 매력적인 동시에 속을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마을을 떠났던 스타브로긴은 표토르 베르호벤스키와 함께 등장합니다. 표토르 베르호벤스키는 처음에는 얍삽하지만 나름 현명하고 중재적인 인물로 보입니다. 스타브로긴과 표토르는 꽤 친한 벗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어쩐지 이상합니다. 스타브로긴과 표토르가 마을에 도착한 이유로, 이상한 일이 하나둘씩 자꾸 벌어지지요.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은 성경 마가복음 5장에 등장하는 돼지와 귀신 모티프를 사용한 정치 소설입니다.    

…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나 나오라 하셨음이라. 이에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라. (…) 마친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이에 간구하여 우리를 돼지로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검은 사제들에서도 모티프로 등장했던, 악령이 돼지 떼에 들어가는 장면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마을 속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악령이 깃든 돼지 떼에 비유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을 과연 비극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2. 기계로 만든 신     


만일 여러분이 서양 음악 역사서를 펼치신다면, 제일 먼저 그리스 제례에 대한 설명이 보일 겁니다. 음악의 첫 기원은 고대 그리스로, 아폴론적인 음악과 디오니소스적 음악으로 분류되지요. 그 중에서도 우리가 볼 비극은 바로 디오니소스적 음악입니다. 비극이 바로 디오니소스 제례에서 아울로스라는 악기와 함께 노래하였던 시dithyramb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비극이 탄생한 이유에 대해, 니체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더 이상 어떤 위안도 소용없으니 염원은 신들을 넘어 죽음 이후의 세계를 항하며, 신 혹은 불멸의 피안이라는 찬연한 신기루와 더불어 삶은 부정된다. 단 한 번 보았던 진리를 의식하며 이제 인간은 도처에서 오로지 존재의 끔찍함 혹은 부조리만을 발견한다. (…) 예술만이 끔찍함 혹은 부조리의 역겨움을 삶을 살게 할 표상들로 수정할 수 있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하찮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실존은 잔혹합니다. 영원한 인간은 없으며, 우리는 몰락을 향해 달려가는 개체이지요. 그런 점에서 삶은 참으로 부조리합니다. 희랍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러한 삶의 부조리를 경험했습니다. 이것이 비극이 태어난 이유입니다. 반면 희극은 도리어 불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희극 작가 에우리피데스는 불안의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부러 예언자를 삽입했습니다. 또는 갑작스럽게 전지전능한 존재가 등장해 역경을 해결해 버리지요.


『악령』을 읽다 보면 문득 떠오르는 세 존재가 있을 겁니다. 신이 되어달라고 간언을 받은 주인공, 니콜라이 스타브로긴. 신이 되고자 한 남자, 키릴로프. 마지막으로 불행을 예언한 남자, 티혼 신부입니다.

키릴로프는 아주 흥미로운 젊은이입니다. 남을 뒷담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아이를 사랑하는 순수한 청년입니다만. 정작 그는 꽤 과격한 사상을 가지고 있거든요.


“나는 조금도 이해가 안 돼. 지금까지의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자살하지 않고 살 수 있었단 말인가? (…) 나는 아직 부득이하게 신이 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불행하단 말이야. 왜냐하면 자아 의지를 주장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이지. 사람이 모두 불행한 까닭은 자아 의지를 주장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야.”


그는 신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그리고 신을 부정하는 자는 신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부조리라고 말하지요. 그는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리하여 신이 되기 위해 자살을 선택합니다. 반면 니콜라이 스타브로긴은 신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지만, 곧장 거절해 버리지요.


나한테는 자네가, 자네가 필요하네. 자네가 없으면 나는 제로에 불과해. 자네가 없으면 나는 파리이고, 병 속에 든 사상이고, 아메리카 없는 콜럼버스라네. (…) 자네는 신처럼 오만하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희생자의 후광으로 둘러싸인 채 숨어 있는 아름다운 사람일세. 중요한 건 전설을 퍼뜨리는 거야. 자네는 그들을 정복하게 될 걸세.


그렇게 베르호벤스키가 추앙한 대상이었던 스타브로긴은, 도리어 티혼 부부에게 고백합니다. 사실 자신이 악령에 들렸다고 말이지요. 그전까지 도저히 속을 알 수 없어 신처럼 보이던 남자가, 사실 도리어 스위스에서 있었던 어떠한 일로부터 자신이 ‘악령’에 들려 버렸다고 고해한 겁니다.


고해한 스타브로긴은 곧장 티혼 신부에 의해 예언을 당합니다. 마치 기계로 만든 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말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본래 희극의 전형적인 수법입니다. 보는 이로 하여금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 만들어진 예언 ‧ 절대적 존재이지요. 그러나 이 소설 속에서, 신의 이름을 빌린 자는 불안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마치 희극적 요소를 주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극처럼 말이지요. 신의 눈에 ‘악령’으로 보였던 자는, 인간을 신의 자리로 끌어올리고자 했던 혁명가의 시선에선 신이었나 봅니다. 악령이 신으로 보인다니, 그런 세계를 어찌 비극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키릴로프는 신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그가 이를 증명하기 위해 한 행위는 동시에 그의 사상을 부정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단테의 『신곡:지옥』에 등장하는 루키페르는 세 개의 얼굴을 지닙니다. 이는 성경에 등장하는 삼위일체의 패러디로, 신의 이항대립으로서의 악마를 의미하지요. 다시 말해, 악령은 신의 부정不淨체인 동시에 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로서 존재해 왔던 것입니다.


악령이 존재하면 신이 존재합니다. 신이 존재하면 악령이 존재합니다. 키릴로프는 신이 되고자 하였으나, 동시에 신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티혼 신부가 불행을 예언하였고, 키릴로프는 악령에 들려 호수로 줄줄이 뛰어내린 돼지떼가 되었지요.

그렇게 작품 속 신은 존재를 증명합니다. 어떻습니까. 『악령』은 비극입니까, 희극입니까?  



             

3. 혁명과 광기     


이 소설에서 ‘혁명’은 빼놓을 수 없는 소재입니다. 소설 속 중요 인물 중 하나인 표토르 베르호벤스키가 애초에 혁명가로 등장하고, 이 이야기가 실제 러시아에 있었던 젊은 혁명가 5인조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쓰였기 때문이지요.


도스토옙스키는 반反레닌 주의자였습니다. 그가 ‘혁명’을 반대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는 혁명의 부작용을 누구보다 명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내용이 『악령』에도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젊은 혁명가 표토르 베르호벤스키가 니콜라이 스타브로긴과 대적하는 과정에서, 표토르 베르호벤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금은 한두 세대 정도 방종의 시대가 필요하다네. 인간이 추악하고 비겁하고 잔인하고 이기적인 쓰레기로 전락하는 그런 전대미문의 비열한 방종의 시대, 바로 그것이 필요하단 말이지! 그런데 그것에 익숙해지려면 ‘약간의 피 한 방울’도 필요하다네. (…) 온 대지에 ‘새롭고 올바른 법이 도래하고 있다’는 신음 소리가 울려 퍼지고, 바다에는 파도가 일고, 가건물은 무너져 내릴 것이네. 그때 우리는 어떻게든 석조 건물을 세우겠다는 생각을 하는 거지. 세상에서 처음으로! 우리가 세우는 것이네, 우리가, 우리만이!


악령 속에 등장하는 혁명을 하나의 키워드와 연결 짓자면, 바로 ‘광기’입니다. 이는 러시아의 시대적 배경과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가 태동하던 시기와 맞닿아 있습니다. 러시아는 당시 혼용무도의 시대였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만들기 위해, 대의를 위해 존재하는 ‘약간의 피 한 방울’을 젊은 혁명가들이 외치던 시기였지요. 젊은 혁명가 베르호벤스키는 그러한 당대 젊은 사회주의자들의 모방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나아가기 위해선 모조리 타버려야 한다는 사상적 믿음을 광기 어린 베르호벤스키로 표현한 것입니다. 책 『반항인』을 통해 혁명의 부작용을 나열했던 카뮈 역시 도스토옙스키의 『까라마조프의 형제Братья Карамазовы』를 인용한 바 있지요.


표토르가 가진 사상은 광기와 맞닿아 있습니다. 무언가를 파괴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겠다는 광기로 인해 살인과 방화를 저지르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스타브로긴에게 새로운 시대의 신―이반 왕자가 되어 달라고 애걸하지요. 단순히 그가 신을 부정하는 것을 넘어 마치 새로운 시대의 개척을 신 대신 광신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요. 마치 현대인에게 종교가 이성으로 대체되었듯, 표토르의 종교는 혁명으로 대체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실제로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일종의 정치적…… 야심가란 말인가?”
“사기꾼이라네, 사기꾼……. (…) 우리는 파괴를 선언할 걸세……. 왜냐고? 왜냐고? 역시 이 하찮은 사상이 너무 매력적이거든! 그러나 미리 뼈를 좀 주물러서 부드럽게 해둘 필요는 있지. 우리는 화재를 일으킬 걸세……. 전설도 좀 퍼뜨리고…….”



표토르는 이 매력적이지만 하찮은 사상에 몰두해 있으면서도, 자신을 사기꾼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마치 사회주의가 아닌 혁명 그 자체를 추종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상이 수단에 앞서 믿음이 될 때, 베르호벤스키의 전형은 도스토옙스키가 말하고 싶었던 것을 참 명징하게 드러내는 듯합니다. 그런 점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의 선지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전히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명작 고전입니다. 러시아 사회의 시대상을 담긴 하였으나, 우리는 생각 외로 수많은 베르호벤스키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전이란 늘 시대상을 반영하면서도, 시대를 뛰어넘어 인간을 고찰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때로는 니콜라이 스타브로긴을, 때로는 표토르 베르호벤스키를, 때로는 키릴로프를 발견할 수도 있겠지요.


비극이 존재하는 것은 발견한 부조리를 우리가 살아갈 삶의 표상으로 수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악령』을 통해 이 시대의 어떤 부조리를 발견하셨습니까? 우리는 이를 어떤 삶의 표상으로 수정해야 할까요? 이 질문은 우리 스스로에게 내려지는 질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그 정답을 하나씩 찾아나가겠지요.









* 성경 마가복음 5장 27절

** 『비극의 탄생』, 니체, 열린 책들

*** 『악령』,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박혜경 옮김, 열린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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