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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낭송 Oct 04. 2024

피의 역史사『피, 생명의 지문』

라인하르트 프리들 · 셜리 미하엘라 소일 지음


메멘토 모리


      

몇 달 전, 가끔 숨을 쉬기 벅차고 손과 발이 부었다. 빠르게 한국에 들어와 병원에 가니, 심한 빈혈이 있고 저장철 수치가 2로 떴다. 저장철 수치는 최소 50이어야 하고, 정상 수치로 회복하려면 100까지는 올려야 한단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으니 따뜻한 물을 연신 마셨다. 물을 마시면 전신이 따뜻해지며 피가 돈다는 기분이 비로소 들었다.


피. 우리의 몸은 피로 이루어져 있다. 손끝 하나하나까지도 피가 돌아야만 우리는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피가 돌지 않으면 우리의 몸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정작, 이 피라는 것에 꽤나 무심한 듯하다. 나 역시 지난 날의 기억이 아니었다면 아마 무심코 지나쳤을 가능성이 높다.


현대 의학에 익숙한 우리는 늘 죽음을 잊고 산다. 우리에게 죽음이란 마치 먼 존재 같고, 젊음은 우리를 하루하루 새로이 탐험하는 모험가로 만든다. 그러나 피는 우리에게 죽음을 상기시킨다. Memento mori메멘토 모리, 피를 보면 죽음을 기억하라는 유명한 격언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그만큼 피는 우리에게 죽음의 이미지이자 동시에 생명을 연상게 하는 단어인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라인하르트 프리들로, 심장외과 분야의 의학박사이다. 심장을 연구하고 수많은 수술을 집도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마주치게 되는 것이 바로 피. 저자는 바로 이 피라는 존재를 집착하다시피 징하게 파고든다.


“표면적으로 보면, 피는 그저 체액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여러 체액과 마찬가지로 피의 이미지 역시 그다지 아름답지 못하다. (…)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동물이고, 순전히 쾌락을 위해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연쇄살인마 백작부인 엘리자베트 바토리는 흡혈귀라는 악명을 얻었다. 그녀는 피라냐만큼 피에 굶주려 있었고, 전설에 따르면 수많은 어린 소녀들을 고문하여 죽였다. 그리고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죽은 소녀들의 피를 마시고 피로 목욕을 했다. 이런 피의 욕구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포식자인 인간의 피의 욕구는 충족될 수 있을까?”



어느 날, 라인하르트 박사의 수술실에 한 환자가 당도한다. 그의 이름은 하미트. 병명은 우심실 자상, 환자는 눈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다. 의사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은, 하미트를 치료하는 것이다. 라인하르트 박사는 하미트의 상태를 확인한다. 검사를 할 시간은 없다. 조금의 시간 지연으로도 하미트의 목숨은 경각을 달릴 것이다.


자, 라인하르트 박사는 당장 심장의 상처를 봉합해야 한다. 하미트는 과연 살아날 수 있을까?

  

“의사가 이런 죽음의 소용돌이에 개입하여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는 기간이 있다. 이 기간은 오랫동안 ‘골든타임golden time’이라고 불려왔다. 그러나 복잡한 생물학적 시스템이 항상 인간의 상상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고, 어떤 환자의 생명 시계는 조금 더 빨리 가고, 또 어떤 환자의 생명 시계는 조금 더 느리게 가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골든아워golden hour라고 부른다. 골든아워의 길이가 정확히 얼마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엄밀히 말해, 며칠 또는 몇 주가 지나야 알 수 있다. 그때가 되어야 비로소 환자의 생존 여부를 알 수 있다.
 하미트의 생존 여부는 이제 내 손을 떠났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라인하르트 박사의 수술을 따라가며, 피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의사의 시선에서 탐험한다. 역사적으로 아주 오래 전, 우리는 피를 어떻게 여겼는지. 피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하미트라는 환자의 시선에서 하나둘씩 따라간다.


라인하르트 박사는 마치 우리가 하미트의 수술실에서 함께 집도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장면을 설명한다. 칼에 찔렸지만 방어흔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 하미트. 분명 하미트에게는 무언가 숨겨져 있다.


칼부림은 일상적인 폭력 범죄에 속한다. 칼은 생활 도구이고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금세 살해 도구나 흉기가 될 수 있다. 나의 환자 하미트는 가해자였을까, 피해자였을까?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이 책이 과학서임에도 불과하고 마치 에세이처럼 이야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피’를 하면 위험한 직업이나 흡혈귀를 연상하지만, 사실 현대 이 시대에서 가장 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로 의사를 논하지 않을 수 있을까? 라인하르트 박사는 환자 하미트를 통해 마치 가지치기처럼 이야기를 얽어 나간다. 피에 얽힌 기나긴 역사와 관념을 하나씩 파헤쳐 나간다. 죽음의 의미에 불과했던 피에 더 다양한 이미지를 삽입하여 순식간에 우리가 흐름을 따라갈 수 있도록 만든다.


과학서이지만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꼼꼼하게 여러 용어를 설명해두었기 때문에, 전혀 불친절하지 않고 도리어 흥미롭다. 흡입력이 좋은 과학서 『피, 생명의 지문BLUT:Der Fluss des Lebens』가 한국으로 발간된 것이 무척 반가울 따름.


     



* 해당 서적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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