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독서모임에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재독했다. 재독하면서 들었던 생각을 좀 정리해 보고 싶었다.
주인공인 데이비드를, 그리고 데이비드가 표상하는 질서 행위를 나는 결벽증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흔히 대상을 정의함으로써 대상을 인지한다. 이름을 붙이는 명명화는 일종의 문명화다. 그리고 화자는 데이비드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의문을 던지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문명화를 수용해야 하는가?
데이비드의 스승은 종교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다. 그 또한 문명화의 신봉자였으나, 이전 시대에서 문명화는 신학에 속했다. 사실 아주 오랫동안 인류의 문명화는 종교에 속했다. 인류는 신화를 만들고, 제단을 만들고, 종교를 바탕으로 국가 체제를 완성했다. 이윽고 그 지위를 과학과 기술이 물려 받았다. 과학이 새로운 종교가 된 시대다.
데이비드의 수집 행위는 바벨탑에 비유된다. 데이비드가 사랑하는 모든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자 한다. 그런데 이런 행위는 결벽증에 가까워 보인다. 그렇다, 사실 무질서를 견디지 못하고 혼돈에 강박적으로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는 결벽증이다. 이곳에서 데이비드 개인으로 축소했지만, 인류는 사실 강박적일 정도로 명명화를 지속해 왔다. 우리의 명명화 범위는 우리가 사는 땅을 넘어 심해로, 더 나아가 우주까지 확장된다. 그리고 그 끝에, 우생학이 닿아 있다.
명명화가 우생학을 낳는다니. 황당할 정도의 비약이다. 그러나 책은 이 비약을 해낸다. 데이비드를 통해 설명한다. 질서화, 명명화. 이 모든 것의 끝에는 다양성의 소멸이 있다. 가장 깨끗하고 화려한 도시에서는 빈민도, 이주민도, 병들고 나약해진 노약자도 존재할 수 없다. 가장 문명화된 도시에서는 언제나 개인의 소외가 발생한다.
결론적으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데이비드의 명명화는 실패한다.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그 통제의 끝에는 더 거대한 자연이 있다. 카뮈의 『페스트』에서 인간이 아무리 자원보건대를 조직하고 페스트에 저항했을 지라도, 끝내 페스트는 자연의 힘으로 사라졌던 것처럼. 인간이 자연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그 욕망의 끝에는 결국 인간의 한계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마치 감기에 걸린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