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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낭송 Aug 11. 2024

나는 특별하다. ¿

특별의 본위



특별함은 비단 사람에게만 한정되는 용어는 아니다. 그건 특정 일자를 지칭할 수도 있고, 애장품을 지칭할 수도 있으며, 도시나 지역을 지칭할 수도 있다. 특별함의 주체는 한정되어 있으나, 유일무이를 상정하지 않는다. 특별함은 우열을 전제하나, 우열의 본위가 대체로 개개인의 경험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특별함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로 특별함은 구별되는 것이다. 오늘부터 특별해지기로 결심했다고 하여 특별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특별하다고 구별되는 것이다. 즉자 존재인 사물이 특별해지기 위해선 의미를 부여하는 대자 존재가 필요하고, 인간이 특별해지기 위해선 타자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바흐친이 카니발을 외쳤고, 후설은 현상학을 외쳤다.


우리는 누구나 특별해지고 싶어 한다. 유튜브 채널 <장동선의 궁금한 뇌>에서 김경일 교수가 말했듯, 한국 사회는 개인이 지닌 주인공 의식과 주체성이 범람한 사회다. 이러한 사회는 자연스럽게 자기애성 성격 장애, 연극성 성격 장애 등 자기의식을 과잉 내재한 개인을 만들어 간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에 등장하는 블랑쉐를 보자. 어느 한 집단에 머무르지 못하고 끊임없이 신분을 세탁하듯 관계를 세탁하는. 밥 먹듯이 거짓말을 일삼고, 과거의 영광에 매몰되며, 자신의 특별함을 인정할 또 다른 관객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블랑쉐의 행위를 과연 탓할 자 누구인가. 우리 사회는 매양 새로운 블랑쉐를 양산하는 자기 과시의 시대일진대.


며칠 전, 특별함이라는 주제로 지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아주 오랫동안 특별해지고 싶었던 나와 당신 자신에 대해. 대체 특별함이란 무엇인지 아주 오랫동안 곱씹었으며, 특별해지기 위해선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다시금 머리를 맞댔다. 그러다 문득, 인간이 특별해지기 위하여 발악하는 모든 총체적 행위들이 얼마나 진부한가, 라는 문장으로 우리는 수렴했다.


그랜드 스탠딩grand standing은 제 도덕성을 과시하기 위해 타인을 비난하는 행위다. 내가 이토록 도덕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상대의 도덕성을 끌어내리는 수법이다. 타인의 윤리성을 타락시킴으로써 나의 도덕성을 인정받는 대화 속에서, '나'의 선행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는 건 오로지 분노와 비난이다. 팔로워는 그가 올린 예리한 비난에 공감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그가 특정한 수준의 윤리성을 내재했다고 여긴다. 사실 비판이 곧 화자의 행위를 표면화했다고 말할 수 없는데도. 언어로서 비난은 그토록 쉽고 피상적인데도 불구하고.


타락한 자를 언어적 단두대에 올리는 행위는 전혀 특별하지 않다. 인터넷 속 모두가 동일한 행동 양상을 보인다. 전혀 특별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특별해지기 위해 적어 내리는 몇 자의 가치는 얼마나 무가치한가. 타인의 가치를 훼손시킴으로써 나의 가치 또한 훼손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 피상성은 너무나도 평범하다. 특별해지기 위해 행위했던 언어적 과시는 그토록 평범하다.


또 다른 과시의 양상이 있다. 삶의 희곡화다. 우리의 삶은 드라마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생각함으로써 보이는 어떤 행동 양상들. 자극은 우리가 마치 주인공인 것처럼 우리의 눈을 가린다. 그러므로 자극을 추구한다. 또는, 스스로를 정체화하지 못하기에, 도리어 특별함이라는 가치에 매달린다. 만났을 땐 그저 특별하고 환상적으로 보이던 화법을 파고들다 보면, 열매로 발아하지 못한 개별성이 보인다. 특별한 행위를 함으로써 특별성을 인정받고자 했던 그 모든 행위 기반에 피상성이 존재한다.


과정적이고, 극적이었으나 도리어 피상적이었던 그 삶은 얼마나 진부한가.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과시하지 못해 안달이 난 양태를 범주화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우스운가. 우리는 MBTI라는 16개의 틀로 인간을 가둘 수 없다고 말하며, 인간은 아주 입체적이라고 말하지만. 스스로의 입체성을 입증하기 위해 보이는 모든 증상들이 사실은 아주 단면적인 정서적 양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가장 진부한 형태의 과시는 바로 소유다. 어쩌면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마치 한정된 것을 소유하는 자가 특별해지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 얼마나 보편적이고 평범한 욕구란 말인지. 이 사회의 모듈에 최적화되어, 자본주의적 모델로 전락한 인간이 정말로 특별하단 말인가? 소유로 과시하는 화법이 일상적인 세계에서 어떻게 소유가 '특별함'을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이장욱 작가의 『크리스마스 캐럴』에 등장하는 남자처럼, 최신 트렌드에 민감하며 고급문화에 박학하되 자신의 욕망을 포장할 줄 아는 인간이면 과연 특별해 보일까. 그런 모습을 동경하고 따라 하면서도 정작 그 속으로 삽입되지 못하는, 또는 삽입되었다고 믿는 그 욕망을 특별하다고 여길 수 있나. 그것이야말로 이 세계에서 가장 진부한 형태의 욕망일진대.


특별한 인간은 존재하는가. 우리는 누구를 특별해할까.


종종 나는 그런 문장을 내뱉곤 했다. 삶의 주인공이 아닌,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다. 이 세계에 주인공은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웹소설 속 세상처럼, 이 세계가 주인공을 위해 만들어진 세계였다고 가정해 보라. 우리가 엑스트라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살아왔던 삶은 과연 부정당하는가. 누구에 의해서? 우리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작가와 독자에 의해서? 그렇게 삶은 포기당해야만 하는가? 삶의 주인을 타자의 박수에 앗겨버리는 삶이란 얼마나 공허한가?


불우하게도 영웅의 시대는 사라졌다. 조금 진부한 구절이기는 하나,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신은 죽었으나, 신자유주의는 소멸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평생을 특별해지기를 바랐건만, 어떤 특별함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는 진리만을 발견한 순간. 과연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 사르트르의 말대로, 자유란 인간에게 주어진 형벌에 불과한가. 형벌로부터 도피하기 위하여, 끝내 진부한 특별함을 추구하는 보편성에 굴복해야 하는가.


주인공은 부재한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선택만이 정답이 되는가.*







* 게오르그 루카치, 『소설의 이론』

* 드라마 『도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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