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들의 학교는 매주 수요일은 12시 20분에 수업이 끝난다. 매주 수요일은 대부분 수업이 일찍 끝나는지 YMCA에 1시 30분부터 시작하는 어린이 대상 수업들이 진행된다. 12시 20분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의 하루는 너무 길다.
집 마당에서 축구를 하고 농구를 해도, 근처 공원에 놀러 가도, 키즈카페에 데려가 놀아도 저녁시간까지 너무 긴 시간이라 늘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이 적지 않다. 궁하면 통한다고 며느리가 이리저리 검색을 해보더니 시애틀 도서관에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으니 가보자고 한다. 비용도 들지 않는다니 더욱 마음에 든다.
집에서 도서관까지는 차로 15분 거리. 세종시에 살 때도 도서관을 가려면 비슷한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 손주들은 걸음마를 하면서부터 도서관에서 놀았다. 책을 읽지 못하더라도 도서관은 아기들에게 좋은 놀이터다. 특히 요즘 도서관은 조용히 책만 보는 곳이 아니라 아기들과 함께 소리 내서 책을 읽거나 놀이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마련해 두어 엄마들에게 사랑받는 장소가 되고 있다.
어린이 코너는 예쁘고 편안하다
손주들에게 도서관에 가겠냐고 물어보니 단박에 그러자고 한다. 한국에서 가 본 도서관의 기억이 즐거웠던 모양이다. 미국 도서관은 나도 처음이라 손주들만큼이나 기대가 컸다.
미국의 어린이들은 어떤 책을 읽는지 궁금했다. 손주들이 읽으며 배워갈 책의 내용은 어떤 것인지 알아도 볼 겸 매주 수요일에 진행되는 레고 놀이터도 참여할 겸 겸사겸사 찾아간 도서관은 한국의 도서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레고 놀이 시간이 되니 많은 아이들이 부모들과 함께 즐겁게 레고 조립을 한다. 우리 아이들도 한동안 레고에 몰두하더니 문득 한국말로 된 책은 없냐고 묻는다. 한국말로 된 책? 큰 손주가 다섯 살이 되면서 한글을 떼어 동화책 읽는 재미를 알게 되었는데 미국 도서관에 오니 한글책보다는 영어로 된 책들이 많아서 아쉬웠던 모양이다. 며느리가 이리저리 찾아보더니 한글로 된 책이 몇 권 있기는 한데 어른들 보는 거라 아이에게는 적당치 않다고 했다.
레고놀이를 하는 아이들
책을 글로만 보나. 요즘 책들은 그림도 일러스트도 너무나 아름답고 이해가 쏙쏙 되게 그려져 있어서 그림만 봐도 책 내용이 이해될 정도다. 한국 책들도 그렇지만 미국 책의 그림들은 왜 그리 독특하고 예쁜지 손주 책을 찾아주다가 그만 내가 책에 빨려 들고 말았다.
너무 예쁜 그림이 그려진 책의 이름은 ‘리맴버’.
조이하조라는 시인이 쓴 시이며 미카엘라고드라는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을 그렸다.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그림에 시선이 끌려 나도 모르게 펼쳐 본 책에는 아름다운 시와 그림이 꿈처럼 그려져 있다. 아주 쉽고 단순한 문장의 왜 그런지 마음이 뭉클하며 눈물이 나 올 듯하다. 어린이용 그림책을 보고 마음이 뭉클해지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조이 하조의 리멤버
문득 작가가 궁금해졌다. 작가 조이하조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한 부족인 무스코기(Muskogee)족으로 백인들로부터 행해진 오랜 핍박과 차별, 배척의 역사를 아름답고 슬픈 언어로 노래하는 음유시인이었다. 단순하고 쉬운 영어로 써낸 그녀의 시 한 편이 이방인의 마음을 울린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담백한 언어 뒤에 깊이 감추어둔 아픔과 슬픔 고통과 연민 그리고 인디언으로서의 높은 자존의식이 어쩐지 일제강점기를 살아 낸 우리네 어머니들의 마음과 다르지 않아서 그랬을까 알지 못할 깊은 공감이 내 마음을 뜨겁게 달구었던 것 같다.
“할머니 왜 울어?”
“안 울어. 책이 너무 예뻐서 오래 보고 있었더니 눈이 아파서 그런가 봐”
조이 하조의 리멤버
내 손을 잡아끄는 손녀딸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책들이 놓여 있는 책꽂이로 가보니 비로소 다양한 인종과 문화에 대한 책들이 눈에 보인다. 그렇지 여기는 다인종 다문화 국가인 미국이지. 그러고 보니 여러 인종이 모여 살고 있는 나라답게 여러 나라의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 나와 있다.
한국에서라면 쉽게 볼 수 없었던 인디언은 물론 이란이나 아랍과 같은 중동지역과 티베트,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소수민족들에 관한 책들도 어린이용으로 나와 있다.
규중칠우쟁론기 어린이용 영문판
다양한 종교나 피부색,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들 사이에 한복을 입은 여성이 표지에 등장한 책이 있어 살펴보니 한국의 전통 소설 규중칠우쟁론기(LADY HANN and her SEVEN FRIENDS)다. 나도 모르게 뿌듯함이 밀려온다.
손주들을 위해 온 도서관인데 오히려 내가 더 많이 배우고 느끼고 감동을 받는다. 공자님이 말씀하셨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매일 배우고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나이가 들어도 배우는 일은 소름 끼치게 즐거운 일이다. 어쩌면 오늘부터 인디언 역사와 문학에 빠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