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가 내린 어느 오후

by 소금별


겨울비가 내린 어느 오후



아파트를 나서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모처럼 겨울비가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고 있으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오랜만에 비가 오니까 기분이 좋은데."

갑자기 내린 비에 우산을 뒤늦게 챙겨 온 남편이 말했다.


우산을 나란히 쓰고 누렇게 보이는 논을 배경 삼아 걷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 푸릇하게 올라왔던 벼의 싹들이 어느새 땅 빛깔에 물들고 있었다.

논들을 스치며 걷자 눈앞에 개천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심의 하천이 용틀임을 하듯 구불구불 이어지고,

그 너머에 아파트들이 성냥갑처럼 보였다.


반도체 공장에서 흘러나온 따듯한 물에 온천을 하듯 새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물이 따듯한지 모두 저기 모여있네."

남편과 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새들에게로 옮겨갔다.


하천 주변으로 머리를 풀어헤친 갈대들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따르릉 경적을 울리며 자전거 한 대가 우리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드러낸 몸이 부끄러운지 메타세쿼이아 나무들이 빗속에 흔들거렸다.

쥐똥나무의 새까만 열매, 낙상홍의 빨간 열매가 대비되어 겨울풍경을 매력적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그 순간, 중백로 두 마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하천 위로 날아갔다.

"오늘은 물이 맑네. 어, 저거 물고기지?"

어린 시절을 회상하듯 물만 보면 물고기를 찾는 남편이 물속을 바라보며 말했다.

물살을 헤치며 어른 팔뚝만 한 물고기들이 유영하고 있었다.

저것은 잉어인가, 붕어인가 남편과 나는 답이 없는 실랑이를 하고,

생각할 것도 없이 나누는 대화에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비가 내려서인지 하천 산책로를 걷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우산을 쓰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고요한 산책로를 계속 걸었다.

포근한 날씨 탓인지 공원 한 켠, 푸릇푸릇한 잔디 사이로 잡초들이 보였다.



드디어 나타난 저류지에는 다양한 물새들이 평화로운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노랑부리저어새, 오리, 왜가리들이 무리를 지어 먹이를 찾는 모습이 정답게 느껴졌다.

바닥을 드러낸 자리에는 새발자욱이 어지럽게 지도를 그려놓았다.



"오늘은 황새가 안 보이네."

나는 지난주에 보았던 황새 한 쌍이 보이지 않아 마냥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키가 최대 100cm가 된다는 왜가리가 큰 날개를 펼치고 저류지 위를 활공하고 있었다.



주말 오후 겨울비가 내린다.

이번 주는 마음에도 겨울비가 내려서 이렇게 무작정 걷는 날들이 많았다.



입시에 대한 강박감 때문인지,

오래전 충격적으로 보았던 드라마 <SKY 캐슬>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날 한 엄마가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그 먹먹한 마음이 떠올라, 방황했던 시간이 겨울비가 되어 내리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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