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번 오실 때 혈액검사해요. 고지혈증 약 끊어도 될지. 하루 15000보는 매일 걸으시는 거죠?"
"네에~. 그럼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 톤이 확 올라간 듯했다. 밝고 명랑하게.
이런 말을 듣게 되는 날이 오다니!
혈압약을 반으로 줄인 지 1년이 되지 않았는데.
20년이나 혈압약을 먹고 있는 입장에서 이 말은 기적처럼 들렸다. 보나 마나 얼굴색도 확 밝아졌을 것이다.
학교를 그만두고 2년 정도 지나서야 먹고 있던 혈압약의 양을 반으로 줄였다. 그걸 다시 반으로 줄인 게 작년이다. 기저질환으로 매일 반드시 먹어야 하는 약의 양을 줄이는 게 얼마나 힘든지.
오죽하면 작은 아들이 '엄마는 건강검진 결과표를 성적표처럼 받아 살피네.' 할 때 과하게 고개를 끄덕였을까.
"나이가 들면요. 건강이 점점 더 좋아지지는 않아요. 그렇게 생각하셔야 해요."
고지혈증 약을 안 먹으면 안 되냐고 물었을 때 이런 말을 하셨던 의사 선생님 입에서 나온 말이니 내 기분이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를 그만두고 5년 정도는 병원과 친해도 너무 친한 나날이었다. 그동안 거의 방치되었던 건강 문제가 여기저기 동시다발적으로 터졌다.
도대체 몇 개의 병원을 들락거렸는지 모른다. 심지어 한의원도 수시로 다녔다.
두 달에 한 번 내과나 이비인후과 정도로 줄이게 된 게 언제부터였더라? 되돌아보니 아롱이를 만나고 일 년 정도 이후가 아닐까 싶다.
까미 엄마 아롱이가 새끼 넷을 기르게 되면서 하루 한 번 급식을 두세 번으로 늘려야 했다. 이건 아롱이가 먹이 먹던 모습을 봐야 이해가 기능하다. 허겁지겁 먹이를 삼키는 걸 보고 하루 한 번 급식을 고집할 수 없었다. 더구나 때는 여름으로 가고 있어 먹이를 야외에 더 두고 올 수도 없었다.
당시에는 울며 겨자 먹기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렇게 공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덕에 이런 검진 결과가 있게 된 거겠지.
나는 학창 시절 취미를 반드시 독서로 적었었다. 사실 적을만한 다른 특기나 취미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쓰고 싶었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뒹굴거리며 책이나 만화 보기! 그게 내 취미이자 특기였다. 물론 가정환경조사서에 쓰는 내용이라 만화는 뺐다. 그냥 우아하게 보이는(?) 독서만 썼을 뿐이다.
날씨가 우중충하거나 비바람이라도 치면 따뜻한 방 안에 앉아 간식을 먹으며 만화책을 뒤적거리는 게 세상 제일가는 즐거움이라고 거침없이 주장하는 진상 타입. 그게 바로 나다!
눈에 빤히 보이는 거리도 걷기가 귀찮아 가능하면 차를 타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내가 하루 만 보도 아니고 이만 보 가까이를 끄떡없이 걷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어쩌다 이런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을까?
공식적인 백수가 확실한데도 집에 있을 틈이 별로 없다. 늘 바쁘다.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이 많은 사람들의 심정이 백 번 이해된다.
“너는 고양이들이 살려주는 거 같은데.”
어느 날 친구가 한 말에야 문득 깨달았다.
나는 오랫동안 공원에 사는 아롱이와 그 일당(?)들을 내가 케어하는 줄 알았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간식과 주식을 챙겨 배달까지 마다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은 반대?
하긴 어느 순간부터 병원 가는 횟수가 확연히 줄어든 걸 느끼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병원비 대신 냥이들 밥을 산다는 소리까지 종종 해 왔으니 말이다.
병원을 드나드는 횟수가 확연히 줄어든 이유는 분명하다. 고양이들과 아옹다옹해야 대부분 웃어넘길 수 있는 정도의 일이니 스트레스 받을 일이 거의 없다. 물론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아주 가끔 시비를 걸 때가 있긴 하다. 속은 상해도 그건 의견 차이이니 넘기면 된다.
이름을 부르면 어디선가 온몸으로 반가움을 표시하며 뛰어나오는 녀석들.
그런 녀석들을 보면서 엔도르핀이 나와 나도 모르는 새 건강이 좋아진 게 아닐까?
얼굴 혈색이 불그죽죽할 정도로 건강 상태가 나빴던 과거를 조금씩 떨치고 있는 지금.
행복이 무슨 거창한 게 아님을 배우고 있다. 하루하루 소소하게 주어지는 이런 시간들이 모여 행복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봄날이다. 개나리 노오란 빛처럼 환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