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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순 Jul 10. 2024

장맛비 내리던 어느 하루

 나는 소녀시절부터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쓰고 제법 고즈넉한 제기동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다. 마지막은 항상 제기동 성당이었다. 신자는 아니지만 성모상 주변 화단에 가득 심긴 꽃들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비를 맞아 새초롬한 모습으로 나를 맞이해 주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비 오는 날 더 성스럽게 느껴지는 성당의 느낌이 좋아서였다.


 나이가 들어서도 비 오는 날을 특별히 버거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원으로 냥이들 밥을 주러 다니게 되면서 비 예보가 있으면 하루 중 비가 비교적 덜 내리는 시간대를 찾아 움직이는 게 버릇이 되었다.


 장맛비가 제법 내리던 날.

 종일 비 예보였기에 빗줄기가 살짝 약해지는 느낌이 들어 서둘렀다. 비나 눈이 온다고 냥이들 배꼽시계가 멈출 일이 없다는 건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병과 건사료 각종 캔이 든 비빌 봉투와 가방을 둘러메고 집을 나섰다. 하늘은 컴컴한 구름이 넓은 지역으로 퍼져있어 비 올 양이 만만치 않다는 걸 짐작하게 만들었다. 마음이 조급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장화때문에 걸음이 여의치 않다.

 비가 자주 오면 풀들이 금방 자란다. 풀을 자주 깎는 것 같은 데도 어느새 쑥쑥 자라 있다. 이날도 많은 비 예보가 있어 지난해에 신던 장화를 꺼내 신었다.


 벌써 빗물이 여기저기 작은 시내가 되어 흐른다. 장화에 우산 그리고 각종 물품을 들고 있어서인지 빠르게 걷기 어려웠다.

 

 은토끼님의 휴무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냥이들에게 하루 두 번은 가 봐야 한다. 비는 내리고 들고 있는 짐도 만만치 않은 데 편하라고 신은 장화가 걸리적거렸다. 문제는 예민한 내 피부. 장화의 발목 부분부터 자꾸 피부에 쓸리는 느낌이 들었다. 바지를 아무리 끌어내려도 걷는 습관이 나쁜 탓인지 자꾸 말려 올라간다.

 간신히 박물관 뒤로 올라가는 계단에 도착. 비가 내려도 우산 쓰기를 포기. 지난밤 비가 많이 내려서인지 물통의 물까지 더러워져 있다. 다 털어버리고 물휴지로 대충 닦았다. 빈 건사료 통까지 채우고 캔도 따서 놓고 움직이려는데 땀과 빗물이 얼굴과 머리카락까지 흠뻑 젹셨다. 이제 초반인데.

 비가 오니 박물관 계단 앞 벤치에서 여름을 나시는 노숙인이 안 보인다. 비닐에 싼 봉투가 벤치에 두 개 덩그러니 놓여 있다. 계단 아래에 갈 때마다 그분이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연달아 떠오르는 고니에 대한 아픈 기억. 유별나게 사람을 잘 따르던 고등어 무늬 고니는 작년 여름 어디론가 사라졌다. 고양이들은 자기 먹이를 챙기는 사람들이 오가는 곳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은토끼님과 내가 고니가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다. 그게 사람의 손이던 고양이들끼리의 서열 싸움이던.

비 오는 날 까미의 자태. 너무 어이가 없어 찍었다.

수컷인 까미를 이런저런 사정에도 집에 들인 건 잘한 일인 것 같다. 서열 싸움에 휘말리면 얼마나 힘든지 공원에 남은 귀요미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은토끼님의 끈질긴 돌봄이 없다면 귀요미도 버티기 힘들었을 터.

가랑비가 내리는 데도 능선에 앉아 있는 귀요미
비가 오면 이 전시물 아래 앉아서 비를 피해 밥 주는 사람을 기다린다.

정산소 입구 기둥 옆에 설치해 둔 급식소는 나에게 정말 중요한 중간 기착지다. 무거운 물건을 거기 두고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거기에 가 보니 이 녀석이 떡하니 비를 피하고 있다.

한 동안 안 보여 잘못된 게 아닌지 살짝 걱정이 되었던 못생긴 고등어 녀석


 녀석은 내게 미움받는 중이다. 하필이면 아롱이를 공격하다니. 아롱이와 귀요미 사랑이 고등어가 공원에 없으면 굳이 고양이들 밥 주러 다닐 일이 없다는 걸 모르나? 하도 천연덕스럽게 쳐다봐 사진을 다 찍었다. 녀석은 입맛도 까다롭다. 까미가 먹는 캔을 꺼내 주니 눈치를 보며 먹는다. 녀석 근처에 있는 건사료 통을 꺼내는데 하악질을 하기에 소리를 빽 질렀다.

"야! 밥 주는 사람한테 무슨 하악질이야?"

 소리가 컸나 보다. 지나가시던 분이 흘끔 쳐다보신다. 얼굴에 머리카락이 엉겨 소매로 닦아내며 어색하게 웃어야 했다. 비는 내리지만 거세지는 않다. 못생긴 고등어 녀석이 그곳을 지키면 우리 고등어가 밥 먹으러 나오지 못한다. 그냥 주는 밥만 먹으면 될 텐데 왜 애들을 잡는지 모르겠다.

 하늘 공원 주변에 설치해 둔 급식소를 채우고 올려다보니 점박이 무늬의 사랑이가 보인다.

잔디 쪽 길가 구조물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사랑이
비가 내리는 데도 나를 알아보고 나오는 사랑이

비를 피하던 곳에 먹이를 담아 건네니 맛나게 먹는다. 사랑이는 다소 뻣뻣한 황태포를 상당히 좋아한다. 제 엄마 아롱이가 치킨 트릿을 좋아하는 것처럼.

 못생긴 고등어가 정산소 앞을 지키고 있으니 겁 많은 고등어는 오후 급식이나 되어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포기.

 귀요미는 조각품 아래 앉아 비를 피해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을 타는지 뭘 줘도 잘 먹지 않아 걱정이라 닭가슴살 푸딩을 가져다줬더니 그건 먹는다. 비가 와 그 아래 둔 건사료통에는 고양이가 있거나 말거나 비둘기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먹어치운다. 뚜껑을 덮어놔도 마찬가지. 비둘기의 아이큐가 얼마기에 뚜껑을 부리와 발톱으로 밀어내고 먹는다. 혀를 차면서도 그냥 돌아섰다. 다 먹고살겠다는데~.


 아롱이와 고등어를 찾지 못했지만 비를 맞아가며 한 끼를 기다릴 녀석들이 토성에서 서성거릴 게 걱정스러워 방향을 틀었다.

그릇을 잎사귀가 많은 곳에 넣어줬다. 큰 나무 아래라 비를 덜 맞을 수 있다.
삼색이 녀석도 내리는 비를 조금 더 피할 수 있는 덤불로 데려가 밥그릇을 내밀었다.

 제법 거세게 내리던 빗줄기가 조금씩 약해지는 느낌이라 서둘렀다. 이미 머리와 옷은 우산을 쓰는 것과 상관없이 다 젖었다. 다리와 발목을 자꾸 쓸어대며 피부에 상처를 내는 장화 덕분에 곤혹스러운 것만 빼면 마음은 넉넉해졌다. 어슷하게 맨 내 가방에는 상처에 바르는 약이 상비되어 있다. 그걸 어디서 꺼내 바를 수 없다는 게 난제지만 말이다.

 요즘 삼색이는 닭가슴살을 물고 달아났다 오지 않는다. 물휴지와 캔 닭가슴살 봉투를 쓰레기 봉지에 주워 담는 데도 바로 앞에서 먹는다. 물론 눈치를 살피지만 적어도 자기를 해코지하지 않는다는 건 아는 모양이다.

 단순히 아는 사이에서 이제는 한 끼를 매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음을 새삼 느낀다.


 여름이 진짜 왔구나 싶은 장맛비 내리는 날.

 오후에도 비는 여전히 내렸지만 은거지 주변에서 냥냥거리며 뛰어나오는 고등어를 만나 밥을 먹이고 정산소 앞을 어슬렁거리는 아롱이를 찾아 사랑이와 소수레 위로 데려가 밥을 먹였다. 박물관이 휴무인 월요일. 비로소 한 주가 마무리된 느낌이 들었다.

밥을 다 먹고 내 다리 주변을 빙빙 도는 아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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