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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게가 버거울 때 꺼내보는 이야기 2

우리들의 막내 고모 이야기

by 권영순

그 사건은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어났다. 그 일이 일어난 50년도 더 전에는 우리 동네에도 갯벌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밀물과 썰물도 볼 수 있고 배도 드나들었다. 엄마는 가끔 뱅골에 살던 그 시절 이른 아침이면 생선을 팔러 오던 사람들 이야기를 하셨다.

일제부터 계속된 간척 사업으로 남양 만을 막으면서 우리 동네의 넓은 갯벌은 모두 논이 되었다. 만조 때면 마을 근처까지 일렁이며 드나들던 바닷물이 개울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당시 고종 사촌 오빠는 인하 공대를 다니고 있었다.

큰오빠는 광택 오빠를 이렇게 기억한다. 중키에 안경을 쓴 미남이라고. 아버지 대학 시절 사진에 안경만 씌우면 딱 그 얼굴이라고. 나는 고종사촌 오빠의 얼굴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하는 게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나에게 시골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소꿉놀이 세트나 원피스 등을 사다 준 다정한 친척 오빠로.


남양 고모네 사촌 오빠들은 바다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심지어 뱃일도 익숙하다. 내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닐 때 남양에 놀러 가면 배를 타고 제부도에 갔었다. 그곳 갯벌에서 망둥어나 새조개 등을 잡으며 어울렸던 기억이 선명하다. 바다는 남양 사촌들에게는 놀이터였다. 수영도 잘했다. 그런 사촌들과 바다에 갔던 오빠만 왜 그런 일을 당했을까? 나는 그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과정을 전혀 모른다. 갯벌에서 싸죽이라는 조개를 잡다 들이닥친 밀물에 휩쓸려 그 오빠만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들었다. 오랜 세월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고 당시에 대한 아버지의 설명은 약간 달랐다. 광택 오빠 스스로 수영 연습을 한다고 밀물로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갈 때는 잘 갔는데 돌아올 때 다리에 쥐가 났는지 깊은 물속으로 빠졌다는 것이다. 결국 오빠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물이 빠지고 나서야 깊은 웅덩이에서 오빠를 찾았다고 하셨다.


큰오빠의 기억이다.

- 형이 강도 방죽에서 헤엄을 치더니 갑자기 물로 쑥 들어갔어. 어! 하는 사이에 밀물에 휩쓸리듯 떠내려가는 걸 보고 난 울면서 어른들을 부르러 집으로 달려갔어. 유조 아저씨네 집 앞 작은 도랑을 뛰어 건너는데 거미 한 마리가 줄을 타고 올라가더라. 울면서 형이 거미줄 정도의 운만으로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

강도 방죽에서의 사고 당시를 회상해 그린 작은 오빠의 그림


현장에 남아 발을 동동 구르던 작은 오빠는 광택 오빠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 큰형이 울면서 어른들을 부르러 갔는데 광택이 형이 두 번 팔을 물 밖으로 내밀었어. 안경이 들린 팔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 나. -


강도 방죽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막내 고모에게만 충격적인 상처로 남은 게 아니었다. 우리 가족에게도 평생 아픈 기억으로 남을 상처였다.


내가 마음 아프게 기억하는 해난 사고는 하나 더 있다. 그건 작은 오빠 친구 일이다. 그 오빠의 집은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는 제기시장 근처였다. 나는 제기시장에서 장사를 하시는 부모님에게 갈 때 그 집 주변을 지나갔다. 그 오빠 이름은 희영이다. 그 오빠도 유난히 수영을 잘했다. 한강 왕복은 기본일 정도였다. 강원도 속초에 놀러 갔을 때 바다 수영도 얼마나 능숙한지 사람들이 구경할 정도였다고 했다. 그 오빠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해군에 자원입대했다.

오빠가 해군에 입대하기 얼마 전에 그 집에 강아지가 한 마리 태어났다. 치와와였다. 몇 대를 거친 잡종 개들 사이에 태어난 강아지였다. 내 손바닥보다 약간 큰 그 강아지는 나를 보면 손가락만 한 다리로 마루에서 달려 나왔다. 나는 우리 가게가 있던 시장을 오가는 길에 자주 그 집을 들락거렸다. 오빠들이 친구였던 덕에 어른들까지 잘 아는 사이여서 별 거리낌이 없었다.

1974년 경남 통영 앞바다에서 해군 예인정(YTL정) 침몰 사고로 순직한 해군과 해경 159명 속에 그 오빠가 있었다. 예인정은 1974년 2월 22일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통영 충렬사를 참배하고 돌아가던 중 돌풍으로 장좌섬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이 유례없는 사고로 배에 타고 있던 해군 신병 316명 가운데 159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그 사고로 물개 저리 가라 하게 수영을 잘하던 오빠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오빠가 죽은 뒤 그 어느 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오빠의 집을 지나가며 혹시나 치와와를 볼 수 있을까 대문 사이를 살짝 엿보았을 때였다. 대청마루에서 오빠의 어머니가 서랍장에서 옷들을 꺼내 쓰다듬고 계셨다. 아들의 옷을 꺼내 놓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들여다보시던 모습. 차마 버리지도 못하고 꺼냈다 넣었다를 반복하셨을 텐데. 아들을 앞세운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마음 아프게 느껴지던지. 다음 날부터 나는 가능하면 그 집을 멀리 돌아서 다녔다.


20대에 청상이 되어 아들 하나 믿고 사시던 고모에게 광택 오빠의 참변은 하늘이 무너지는 날벼락이었을 것이다. 오빠는 구포리 우리 산에 묻혔다. 어렸을 때 오빠의 비석을 쓸며 눈물을 흘리시던 고모를 본 적이 있다. 나는 한동안 오빠의 무덤을 슬슬 피해 다닐 정도로 충격이 컸다. 현장에 같이 있었던 큰오빠는 지금도 그 장소를 떠올리기 힘들어한다. 천금보다 귀했을 그 아들을 잃고 인천 고모는 어떻게 사셨을까? 그걸 생각하면 너무 아득한 느낌이다.


두 언니들이 낳은 아홉 명이나 되는 외손자들을 키우시면서 잊으셨을까? 인천 고모가 손자들을 얼마나 귀애하셨는지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인천 고모는 깔끔하고 단정한 외모에 음식이나 바느질 솜씨도 뛰어나셨다. 고모는 육아를 힘들어하는 큰언니의 맏아들과 둘째를 자주 뱅골에 데려오셨다. 그리고 숯불에 구운 김에 양념간장을 올려 밥을 싸서 직접 먹여 주시곤 하셨다. 대충 김밥을 만드는 게 아니었다. 밥알 하나 흘리지 않게 정성스럽게 싸 주셨다. 나는 속으로 엄청 부러워했다. 그 시절 김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가 아니었다. 맞은편에 앉은 조카딸에게도 쉽게 먹어보라며 권할 수 없는 고가의 음식이었다.


내 첫 발령지는 아현중이다. 부임한 첫 해 두 가지 정도 말실수를 한 기억이 있다. 첫째가 귤 사건이다. 교과서에 실린 나무 타령을 가르칠 때였다. 각종 나무의 특성을 이야기하다 내가 어렸을 때는 귤이 너무 비싸 먹기 힘든 과일이었다고 했다. 오죽하면 대학 나무라고 불릴 정도였다고 설명한 것이다. 순진한 내 제자들은 다음 날 줄줄이 검은색 봉투를 들고 교무실로 찾아왔다. 그리고 수줍게 귤이 든 검정 봉투를 내게 내밀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어렸을 때 귤을 못 먹어보셨다고 하셔서.’

더 당혹스러웠던 건 나이 든 어떤 여선생님이 옆에서 하던 비아냥거림이었다. 귤이 먹고 싶다고 애들 앞에서 별 수를 다 쓴다고 말이다.

두 번째는 꽃에 관한 전설 이야기를 하다 달리아 꽃을 좋아한다고 말한 게 문제였다. 내게 달리아는 추억이 있는 꽃이다. 엄마는 달리아 알뿌리를 뱅골 집 지하실에 보관했다 봄에 꽃밭에 심으셨다. 뒤란에 심은 그 꽃은 색감이 곱고 예뻐 꽃이 피기를 내내 기다렸다. 그런 이야기를 하며 지금도 달리아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라고. 말했다. 다음 날 꽃집에서 값비싼 달리아를 사 들고 올 여학생이 있을 거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벌써 40년 전 일이니 모두 이제는 50대에 접어드는 아줌마들이다. 그 시절은 그런 학생들이 꽤 많았다. 50년도 더 전에 김이 얼마나 비싼 식재료였는지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귤이나 김은 그 시절 내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먹거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고모가 나를 소홀히 여기신 건 아니다. 내가 결혼할 때 목화솜 이불을 몇 채나 해 주신 분이 바로 인천 고모셨다. 고모는 화성 여기저기를 다니시며 목화솜을 직접 구하셨다. 목화를 기르는 집들을 잘 아시는 건 한동안 그 일이 고모의 주요 소득원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결혼할 무렵에는 목화를 기르는 집이 거의 없었다. 산업화로 옷감들도 석유에서 뽑을 기술이 생겼기 때문이다. 고모는 발품을 꽤 파셔야 했단다. 엄마는 힘들게 만들어 주신 이불이니 솜을 틀어서 계속 쓰라고 하셨다. 하지만 목화솜을 틀 수 있는 이불 가게들이 사라지면서 보관조차 어려운 짐이 되어 갔다.

몇 년 전이다. 지금 살고 있는 집 옥상 출입구에 솜이불을 쌓아두고 처리를 고민하고 있었다. 마침 건물 전체 집수리 공사를 하던 분들이 그걸 치우겠다고 하길래 좋다고 했다. 인천 고모가 돌아가신 지 오래전이지만 차마 엄마에게도 이불을 버렸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30년 된 이불을 나는 왜 가지고 있었을까? 그걸 마련해 주신 분의 정성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애지중지 길러 준 외손자들에게 과연 인천 고모도 그런 존재였을까? 인천 고모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고 오신 다음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는 한동안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한 마디로 당혹스러웠다. 이미 돈을 벌 정도로 장성한 고모의 외손자들이 우리 아버지에게 구포리 산에 외할머니 산소 자리를 내놓으라며 큰소리를 냈다는 거였다. 막내 누이의 장례를 치르러 가신 아버지는 화를 내셨다고 하셨다. 구포리 전체 토지 수용령이 떨어져 언제 수용될지 모른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면서 그동안 외삼촌 산소 한 번 돌보지 않았다며 역정을 내셨단다. 적어도 외할머니 묘 자리 하나 사서 매장하는 건 너희들 책임이라고 말이다. 그랬더니 조카 손자들이 떼로 할아버지뻘인 아버지에게 큰소리로 덤벼들었다는 것이다. 결국 장례도 끝까지 못 보고 돌아오셨다고 하셨다.


우리 아버지에게 막내 누이는 어떤 분이셨을까? 아버지는 종종 막내 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 아버지 인생에서 가장 심각한 곤경에 빠졌을 때는 빨갱이로 몰려 수원 교도소에 구금되셨을 당시였다. 6.25사변은 아버지가 대학에 입학하고 두 달 만인 그해 6월에 일어났다. 화성군에서 드물게 서울대에 입학한 아버지에게 전쟁은 말 그대로 전도 유망한 인생을 망치게 한 대사건이었다.

늦둥이 장손인 아버지를 구해내신 분은 인천 고모셨다. 아버지 말에 의하면 큰어머니의 도움이 가장 컸다고 하셨다. 당시 수원고등법원 판사였던 그분의 사촌 오빠에게 아버지의 구명운동을 직접하셨기 때문이다. 고모 역시 동생을 구하기 위해 누구보다 헌신적이셨다.

아버지 말에 의하면 자신은 수감 90일 만에 면제형으로 재판에도 넘겨지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셨다고 하셨다. 두 분의 정성 어린 뒷바라지와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아버지는 더 어려운 시간을 오래 견디셔야 했거나 목숨을 건지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1.4 후퇴 당시 수원교도소에 수감되었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정식 재판도 없이 말이다.

아버지가 큰어머니라고 부르신 분은 화성 만석꾼 집안의 맏며느리였던 분이시다. 양어머니까지 모시고 어렵게 살던 가까운 친척인 우리 할아버지의 고생을 알고 땅을 열 마지기 주신다고 하셨단다. 그걸 거절하신 할아버지의 정직함을 자주 칭찬하셨던 분이시다.



우리 오남매가 명절마다 한 일이 있다. 고모님 두 분을 찾아 남양과 인천으로 꼬박꼬박 인사를 다녔던 것이다. 자가용이 생기기 전에는 버스와 전철을 몇 번이나 갈아타고 다녔다. 일 년에 두 번 우리 집 연중행사였다. 하지만 고모님들이 돌아가시면서 중요한 끈 하나가 소멸되고 그냥 남이 된 것 같다. 먼 곳에 사는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더 낫다는 말은 그래서 생겼나 싶다.


병으로 일찍 돌아가신 막내 고모부의 무덤은 사당에서 과천으로 넘어가는 남태령 고개 그 어디쯤 있었단다. 과천에 종합청사가 들어서면서 남태령 고개에 넓은 길이 생겼다. 고모부의 무덤은 방치되다 무연고 묘지로 처리되어 없어졌다는 말을 들었다. 아들을 앞세운 비극 덕에 고모마저 화장되어 한 줌의 재로 돌아갔다. 그래도 우리 산에 있던 광택 오빠 묘는 구포리 산이 수용된 뒤 새로 마련한 청요리로 모셔왔다.


시련 앞에 서면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시는 예수님을 떠올린다. 나는 그에 더해 내가 지금 겪는 어려움이 아무리 태산같아도 막내 고모의 삶보다 더 막막했을지 떠올려본다. 20대 애 셋 딸린 청상에 40대 다 키운 아들을 앞세우고도 삶을 포기하지 않으셨던 막내 고모님.


아직도 나는 인천 고모의 수줍게 살포시 웃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만만치 않은 시집살이를 하던 엄마의 처지를 이해하고 아껴 주셨던 인천 고모의 선량한 마음 씀씀이와 함께.

고모가 살아 계실 때는 고운 마음씨에 대한 보답을 제대로 받지 못하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후덕하고 선한 일생의 보답을 지금은 천국에서 받고 계심을 나는 믿는다. 그 일생이 눈물로 얼룩졌어도 지금은 천국의 꽃길에서 막내고모부와 광택 오빠의 손을 잡고 걸으실 것을.


우리 오남매는 그분을 이렇게 기억한다.

그렇게 다정하고 고운 분이 우리들의 막내 고모라서 행운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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