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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게가 버거울 때 꺼내보는 이야기 1

- 오 남매의 막내 고모님 이야기 -

by 권영순

살다 보면 삶의 무게가 유난히 버겁다고 느껴지는 때가 있다. 버거운 순간을 나는 어떻게 견뎌냈을까?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순간들을 넘어야 할 때 나는 우리 엄마와 막내고모님을 떠올렸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내 삶의 무게가 가벼워지고 툭툭 털고 일어설 힘을 얻었다.

질곡이라고 밖에 표 헌 할 수 없는 인생을 살았던 분이 어디 한둘인가?

까마득한 절벽 위에 서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 그런 때가 오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한가? 다들 제 십자가를 그 무게만큼 지고 걸어가는 게 인생인데.


우리 막내 고모님 권양순 여사님은 보름날 환히 빛나는 달덩이 같은 외모에 그 못지않게 마음씨도 고운 분이셨다. 이미 고인이 되신 지 오래지만 지금도 막내 고모를 떠올리면 배시시 웃는 고운 웃음이 먼저다. 큰소리 한 번 내신 적이 없을 정도로 행동도 품성도 단정한 분이셨다. 물론 남양 고모님도 고운 외모셨다. 두 분 다 할머니의 섬세하고 윤곽이 뚜렷한 고운 외모를 빼닮으셨다.

하지만 막내 고모에 대한 기억이 훨씬 많고 다양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고모는 할머니를 도와 뱅골 살림을 맡고 계셨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내가 할머니에게 들었던 막내 고모의 결혼 스토리는 이렇다. 당시 남양만에는 대규모 염전이 있어 인천 등 인근에 사는 분들이 소금을 사러 가며 우리 동네를 지나다니셨다. 수인선 꼬마 기차역에서 내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모는 남양(현재는 매립되어 논밭이 되었다)에 소금을 사러 왔던 인천의 부자 아낙이 우연히 보고 며느리 삼겠다고 해 인천으로 시집을 가셨다.

왜정 말이라도 반상이 엄격한 편이었다. 안동 권 씨 집에서 제주 고씨 성을 가진 집으로 왜 시집을 보냈을까? 집이 부자라? 의문(?)만 있었다. 게다가 시집을 보낸 다음에야 고모부가 폐병을 앓고 계셨음을 알았단다. 왜정 때 폐병은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었다. 김 소월부터 이상 같은 많은 작가들이 폐병으로 죽었다. 국문학을 전공했으니 모를 수가 없다. 고모는 혼인해 딸 둘과 아들을 연달아 낳았다. 그리고 고모부가 돌아가셨다. 20대 중후반에 청상과부가 되신 것이다. 제법 가산이 넉넉했던 시부모님마저 돌아가시자 가세도 기울었단다.

할머니는 고모가 친인척들에게 재산을 거의 빼앗겼다고 하셨다.

나는 막내 고모의 사정에 대해 오랫동안 이렇게 알고 있었다.


아버지 이야기는 완전히 달랐다. 인천이 아니라 서울로 시집을 가셨다고 하셨다.

막내 고모부는 왜정 때 공고를 나와 경성 전기에 다니셨다. 돈도 잘 벌고 집안도 부자였다. 그런데 전기 공사를 하러 전봇대에 올라갔다 떨어지는 사고로 심하게 다치셨다고 하셨다. 그 일로 고모부는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경성 전기는 한국 전력의 전신이다. 왜정 때 공대나 공고는 조선인의 입학조차 쉽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식민지 조선인들이 당시 선진 일본의 기술을 배우는 걸 좋아하지 않아 차별을 많이 했단다. 그런 차별을 딛고 경성 전기에 입사할 정도였으니 고모부의 학교 성적이 상당히 우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만약 고모부가 그런 어이없는 사고로 돌아가지 않으셨다면 막내 고모의 인생도 그렇게 험난하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지금까지 잘못 알고 있던 사실에 대해 놀랐다. 우리 할아버지는 고지식할 정도로 강직한 분이시다. 그런 성정에 딸의 혼사를 단지 부자라고 해 함부로 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나는 일제 말이라 정신대 때문에 고모를 급히 시집보냈을 수는 있었겠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의 인품을 간과하다니.


고모가 청상이 되시자 할아버지는 인천으로 딸을 데리러 가셨다. 그리고 고모와 손주 셋을 구포리로 데리고 오셨다. 고모 시댁의 노 할머니 두 분은 할아버지의 정직한 성품을 믿고 비봉에 땅을 사 주셨다. 그 논이 황새골 논이다. 왕재골 주변의 그 논들로 인해 우리 집은 가세를 더 불려 나갈 수 있었다는 게 아버지의 설명이다. 원래 있던 일흔여덟 마지기에 스무 마지기 논이 더 생겼기 때문이다. 엄마가 시집을 오시기 전 막내 고모는 그 큰살림을 모두 맡으셨다.

우리는 막내 고모를 인천 고모라고 불렀다. 고종 사촌인 두 언니는 인천에 사시는 분들에게 시집을 가셨다. 그즈음 고모는 우리 동네에 집을 하나 따로 마련하셨다. 내가 비봉국민학교에 다닐 무렵 가끔 큰언니의 아들들이 외가에 왔다. 큰 언니의 맏이 강세현은 나랑 동갑이다. 촌수는 아줌마와 조카 사이지만. 그 애는 나와 자주 어울렸다. 우리 집 사랑채 돌 담벼락에 마주 앉아 소꿉놀이 등을 하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두 언니에게 아이들이 연달아 태어나면서 고모는 거주지를 인천으로 옮기신 것 같다. 언니들은 모두 아들만 낳았다. 큰 언니는 넷, 둘째 언니는 다섯 명이다. 둘째 언니가 넷째를 가졌을 때 이야기다. 언니는 아들 넷은 키우기 힘들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결국 동네 산부인과 의사를 찾아갔다. 딸이 아니면 낳지 않겠다고. 그랬더니 나이 지긋한 그 의사는 분명히 딸이니 염려 말고 낳으라고 했단다. 결과는? 아들 쌍둥이였다. 졸지에 아들이 넷도 아니고 다섯이 된 것이다.

초등학교 다닐 때 인천 고모를 따라 둘째 언니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딸이 하나라도 있는 우리 집과 너무 차이가 났다.


엄마는 내가 딸이라고 여러 가지 일을 나와 함께 하셨다. 겨울 준비로 창호를 다시 바를 때는 예쁜 풀과 나뭇잎을 골라 창호지 중간에 넣고 겹으로 발랐다. 밤에 불빛을 받으면 창호는 아주 예쁜 무늬가 생겼다. 호롱불에 어른거리는 그 무늬들을 나는 정말 좋아했다.

뒤 울안 장독대 주변에는 화단을 만들어 갖가지 꽃들을 나와 함께 심고 가꾸셨다. 채송화. 맨드라미. 분꽃. 나팔꽃. 과꽃. 뒤 울안이 보이는 안방 문을 활짝 열어놓고 철철이 피어나는 꽃들을 보며 라디오 어린이 방송을 듣던 모습이 지금도 환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우리 집과 다르게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남자애 다섯을 상상해 보라. 언니의 손에는 부엌에서 쓰는 빗자루가 항상 들려 있었다. 욕설도 거침없었다. 그날 저녁상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분명 큰 양은솥에 엄청난 양의 콩나물을 삶았다. 그 흔한 참기름도 제대로 안 치고 소금만 넣은 콩나물이 양푼 하나 가득 저녁상에 올라왔다. 그것이 마법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경이로울 정도였다. 내가 젓가락으로 콩나물을 가져올 틈도 없었다. 아들 넷인 우리 집 식사 시간도 정신없었다. 그러나 거긴 차원이 달랐다. 모두 잠들기 전까지 지붕과 마루까지 들썩 거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혹시 집이 무너질까 봐. 내내 겁에 질려 있었다.

시집가기 전 작은 언니는 말소리조차 조곤조곤한 편이었다. 그런 언니가 여전사처럼 사람이 변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언니는 방학에 자주 놀러 오라며 내가 앉을 수 있는 책상까지 보여줬다. 그러나 다시 가고 싶지 않았던 게 내 본심이었다.

인천 고모는 언니들이 모두 아들만 낳자 외손녀가 없는 것을 아쉬워하셨다. 만약 고모에게 외할머니의 외로움을 알아줄 마음씨 고운 외손녀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도 고모를 떠올리면 그게 아쉽다.


우리 엄마는 인천 고모님을 아주 좋아하셨다. 엄마는 인천 고모에게 ‘그런 시누이’가 없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엄마의 힘든 시집살이를 물심양면 도와주신 데다 힘들 때마다 늘 다독여주신 분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고모를 떠올리면 온화한 웃음이 먼저다. 고모는 음식 솜씨가 좋은 데다 조신하다고 소문이 나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일을 많이 하셨다. 엄마는 ‘일은 솜씨 좋은 사람에게 간다.’며 고모가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으시는 걸 안타까워하셨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삶의 무게에 어떤 경중이 있는가 떠올릴 때가 있다. 고모에게 남편을 일찍 잃고 혼자 아이 셋을 길러 자수성가시켰다면 그것만으로도 칭송받을 일이다. 힘들었지만 꿋꿋한 삶이셨을 테니. 그러나 운명은 고모에게 또 다른 끔찍한 시련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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