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일본에 갔다. 내년에 찍을 영화가 가을이라 미리 감독과 장소 헌팅을 하러 열흘간 동경과 나고야를 들러 본다고 했다. 그리고 작은 아들이 키우는 고양이 돌보미 미션이 주어졌다.
올해 추석 명절 연휴는 무려 열흘!
누군가에게 긴 연휴는 오매불망 기다린 시간일 것이다. 재충전을 위해 여행도 하고 여유 있게 휴식도 취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
하지만 삼시 세끼를 마련해야 하는 주부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아찔하다. 무려 36 끼니를 뭘로 다 때우지?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국내 여행지로 떠나는 공항과 터미널 풍경이 TV 화면을 채우며 술렁일 때 내게 넘겨진 것들이 있다. 모두 자발적 노역이라는 이름으로.
먼저 차례 준비다. 수십 년 교회를 다닌 사람이 뭔 차례 싶지만, 큰집에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아들만 둘인 우리 집으로 시부모님 제사가 자연스럽게 떠넘겨졌다. 일만 가져와야 하는 불합리함을 받아들인 이유(?)는 남편이다.
70대인 남편은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는 애매모호한 소리로 미안함을 에둘렀지만 진심으로 들리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횟수와 절차를 최소화하는 걸로 받아들여야 했다.
연휴에는 은토끼님이 출근하시지 않는다. 6일간 공원 냥이들 급식도 챙겨야 한다. 사람들은 명절이라고 좋은 음식을 일부러 챙겨 먹는데 너희들은 굶으라고 할 수 없다.
추석 당일 날 아침도 설거지와 뒷정리를 남편과 아들들에게 넘기고 공원으로 달려갔다. 비가 부슬거려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배고픈 고양이들은 여기저기 보였다. 나에게 닭가슴살을 얻어먹어 본 녀석들이 대놓고 뒤를 따라다녀 마음이 짠하면서도 바빴다.
벌초를 겸해 미리 시부모님 산소에 성묘를 다녀온 남편이 올해는 천안공원에 있는 아이들 외가 성묘를 가자고 해 서둘러야 했다. 비가 추적추적 종일 내린 데다 길이 밀려 시간이 걸렸다. 내년부터는 이것도 안 되겠다 싶을 정도였다. 일본 출장 기간 고양이 나리를 우리 집으로 데려오기로 했던 작은 아들은 긴 시간 운전을 하더니 전의를 상실했단다. 유별날 정도로 나리는 이동장을 싫어한다. 결국 내가 고양을 오가기로 합의를 했다.
오전에는 공원 고양이 급식을 챙기고 대형 병원의 각종 내과를 드나들며 치료 중인 남편의 저녁과 다음 날 아침 먹거리를 해결해 놓고 고양으로 갔다.
나는 저녁에 가서 다음 날 오전에 왔다 다음 날 저녁에 가는 걸로 약속을 했었다. 그걸로 부족했는지 나리 돌보미로 동원된 사람이 더 있었다. 25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한 <아코디언도어>를 연출한 손감독이다. 작은 아들은 촬영감독으로 그 영화에 함께했다. 나는 그분을 고양이 아빠로 부른다. 무리에서 따돌림당하는 길냥이를 입양해 키우고 있어서다. 그러다 보니 서로 급할 때 고양이 돌보미로 돕는 사이라나 뭐라나? 손 감독은 내가 없는 늦은 오후와 다음 날 오전을 드나든다고 했다.
고양이만 있는 작은 아들 집에 와서도 시나리오를 쓰는 걸 직접 본 나로서는 둘이 왜 긴 시간 마음이 잘 맞는지 알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연히 뭘 그렇게까지 하냐는 훈수는 두지 않았다.
남편은 송파에서 고양을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어이없는데 매일 두 사람이 교대로 고양이를 돌보냐며 시비를 걸다 다 자기 탓이라며 포기했다. 작은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 생일 선물로 원한 건 고양이 한 마리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에 아무도 없어 쓸쓸하다며. 아들과 모란시장에 고양이를 사러 간 사람이니 할 말이 없긴 할 것이다.
공원 냥이들 급식을 하고 집에 돌아와 고양으로 출발하려는데 잠시 소강상태였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이런 날은 금방 어두워진다. 가방에 이것저것 챙겨 넣을 때 명절 직전 인근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도 한 권 가져갔다.
표지가 조금 촌스러워 보여 별 기대하지 않았는데 금방 빠져들었다. 술술 읽혔다. 우리 민족과 친숙하던 동물들 이야기가 잔잔하게 펼쳐져 금방 몰입했다. 내가 읽은 책 중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밖에는 보슬거리는 빗소리가 들렸다. 캣타워에서 내려와 슬그머니 옆에 붙는 고양이 나리의 보드라운 털을 책 속 담비 털 대신 쓰다듬으며 한 권을 순식간에 읽었다.
화성군 구포리가 고향인 나에게 이 책은 향수를 자극했다. 여우, 청설모, 너구리, 담비, 고라니 들에 얽힌 설화들은 물론 과학적인 연구와 해석까지 곁들여 순식간에 읽혔다. 혼자 잠을 자야 하니 지나치게 자극적인 책을 피해 가져왔는데 이렇게 즐겁게 읽히다니. 청설모가 귀여운 다람쥐를 죽여 없앴다는 잘못된 속설도 풀었다. 어린 시절 그 많던 여우는 어떻게 사라졌는지 고라니가 왜 이렇게 우리나라에만 번성하는지 알 수 있었다.
동물들에 별 관심이 없더라도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내용이 쉬워 중학생 정도부터는 누구나 읽어도 가독성 높은 책이지만 전달하는 내용의 깊이는 폭넓고 다양해 상식도 상상력도 넓힐 수 있어서다.
<팔도동물열전>은 추석 명절 준비의 정신적 육체적 피로와 고양이 돌보미로 비 오는 날 외박 아닌 외박 시간을 보내게 된 심리적 허기를 따뜻하게 채워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