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기동에 집이 생기다
조정래의 소설 <정글만리>를 읽으면서 제기시장 주변을 떠돌던 우리 오남매의 처지와 비슷한 모습을 발견한 적이 있다. 중국의 개혁정책으로 농촌에서 도시로 밀려든 농민공들의 삶이랑 우리 가족의 모습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서였다. 물론 우리의 처지는 그들과 비교할 수 없다. 우리 집은 오 남매를 공부시킬 수입이 부족했지 먹고 살 걱정까지 할 처지는 아니었다. 그래도 비좁고 불안정한 거처로 마음 놓고 공부할 여건이나 장소조차 없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제기동 시절을 돌아보았을 때 누가 가장 힘들었을까?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엄마는 우리들의 거처를 마련하고 시부모님을 모셔 와야 한다는 강박감에 잠을 못 이루셨다. 어찌 보면 엄마의 삶은 의무와 의무의 연속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 시대 여성들의 숙명이었다. 엄마의 힘겨운 시간은 서울살이 이전부터였다. 이십 대 초반에 종부의 삶을 시작하면서 이미 만만치 않은 어려움을 겪으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 오 남매의 학비로 인한 엄마의 싸움은 제기동에 이르러 겨우 초반전이었다.
시장 통에 정착할 당시 우리 가족은 마음만 멘붕이 아니었다. 엄마가 제기동에 집을 마련하기 전까지 온 가족이 서울 변두리 시장 통을 떠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성 구포리 사거리에서 서울을 오가며 벌이던 우리 셋의 채근이 엄마에게 더 강한 의지를 갖게 했을까? 우리 부모님 두 분은 의무를 소홀히 생각하는 분은 아니셨다. 부모로서만이 아니라 자식으로서도. 사거리에 계신 우리들 조부모님도 모셔오기 위해 말 그래도 전력을 다하셨던 건 분명하다.
엄마는 어느 날부터 장사가 조금 한가해지는 시간만 되면 집을 보러 다니셨다. 장사하실 때 쓰는 앞치마를 그대로 차고서였다. 잠시라도 짬을 내 종종거리며 집을 보러 다니시던 엄마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제기시장에서는 엄마가 파는 채소가 손님들에게 입소문을 타고 있었다. 장사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간 것이다. 손님들은 엄마가 파는 채소와 각종 부재료의 품질들을 인정하면서 일부러 수원 상회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농사를 지어 본 경험과 종부로서의 시간이 도움이 되셨을 것이다. 그걸 장사 수완이라 하는지는 모르겠다. 같은 식재료라 해도 음식의 맛을 내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 부분에서 엄마는 남들과 다르게 타고난 솜씨가 분명 있으셨다. 물론 신용도 철저히 지키셨다. 특히 고대 학교 식당을 운영하시던 그 할머니는 엄마의 절대 고객이셨다.
당시 우리 가족은 함께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절실하게 돈이 필요했다. 그러나 은행은 멀고 먼 유리천장이었다. 부자들은 은행을 쉽게 이용했다. 회사원들도 가능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자영업에 특별한 재산이 없었던 우리에게 은행은 그림의 떡이었을 것이다. 은행이 원하는 담보가 우리에게 있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내 기억에 이 무렵부터 엄마는 손쉽게 현금을 당겨올 수 있는 일수를 쓰시기 시작하신 것 같다. 집을 마련하기 위한 돈 200만 원도 일수로 얻으셨던 게 아닐까 싶다. 일수는 매일 일정한 원금을 이자와 함께 갚는 조건이다. 사실 그건 피 말리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돈을 구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했다. 당시 200만 원은 쉽게 구할 수 없는 거액이었다. 그 정도의 돈을 빌리기 위해 엄마는 시장 안에서 일수놀이를 하는 사람들에게 제법 신용도 쌓으셨을 것이다.
은행을 이용하기 힘든 시장 상인들은 푼돈을 모아 일명 번호계라는 것도 하셨다. 집과 우리들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엄마는 할 수 있는 방법 모두를 동원한 거나 마찬가지셨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총력을 기울이신 것이다.
제기동에 집을 마련한 시기는 1970년 그즈음이었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 제기동 집에서 종암 초등학교를 다닌 기억이 확연하니 맞을 것이다. 아마 6학년 여름이나 가을 무렵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교사로 임용되어 1년 지나서까지 제기동 집에서 보냈다.
가족 이야기를 쓰면서 제기동에서 살았던 시간을 계산해 본 적이 있다. 제법 긴 시간을 보낸 것 같은데 따져보니 10년 조금 넘는 기간이었다. ‘겨우 그 시간이었나?’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제기동 집은 그만큼 우리들의 추억이 오롯이 담겨 있는 곳이다. 성장기의 대부분을 보냈으니 말해 무엇하랴.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었던 그 집은 사실 엄마의 피땀이 만들어낸 인간 승리의 표상이었다. 물론 우리의 학비와 생활비를 위한 엄마의 고군분투는 겨우 시작 단계였지만 말이다. 그즈음이었다. 엄마가 두통약을 수시로 삼키는 걸 목격하게 된 것은. 우리 오남매는 엄마에게 죄책감이 섞인 부채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은 우리에게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채찍이 되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
지금 돌아보면 제기동 시절 고생은 부모님 한정이 아니었다. 누구랄 것 없이 몸과 마음이 모두 고달팠다. 그러나 우리 가족 모두가 미래라는 시간을 향해 열심히 준비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가끔 부모님 모르는 사이에 우리들의 일탈인 듯 일탈 같은 일탈 아닌 시간들도 있었지만 말이다.
제기동 집은 시장과 거리가 제법 있었다. 빨리 걸어도 20분은 걸렸다.
‘제기동 집은 아마 69년에 구했을 거야. 그 집은 처음엔 안방 마루 건넛방 쪽방 부엌으로 된 집이었어. 마당이 넓고 담이 낮은 동남향 집이었는데 앞이 트인 집이야. 두어해 지난 뒤에 엄마가 마당에 증축을 했어. 방을 빌려 주려고. 두 집이 더 들어와 살았어. 수돗간 위에 장독대도 만들고. 그 바람에 집이 좀 갑갑해졌지.’
큰오빠의 이 설명을 들으니 그제야 집을 증축한 기억이 났다. 골목길 입구에 있어서 앞이나 옆이 막혀 답답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방이 5개였다. 안채와 사랑채 독립된 목욕탕과 화장실이 있어 제법 규모 있는 집이었다. 부엌도 2개였다. 목욕탕과 화장실이 있는 건물에는 계단을 올라가 장독대로 사용하는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 올라가 바라보면 주변 풍경이 제법 멀리 펼쳐졌다. 근처에 불이 난 적이 있었는데 우리 집을 덮칠까 봐 겁을 내며 장독대에서 바라보던 기억도 난다. 당시에는 2층 건물도 드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막 사춘기를 시작하는 내게 나만 쓸 수 있는 방이 생겼다.
‘제기동 기억? 나는 너무도 많은데. 일단은 제기시장에서 장사하셨던 분들. 종암 국민학교, 그리고 제기동 우리 집, 만화 가게, 고대와 하얀 집 등 납품 처와 자전거 배달을 하던 기억들, 돈내고 tv를 보러 갔던 그 집, 요괴인간 마린보이 타이거 마스크와 같은 만화영화, 새벽에 청량리 시장을 다니던 엄마 기억, 사과 궤짝을 부셔서 종아리를 때리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 연탄가스에 중독되었던 기억, 제기동 집 장독대에서 이불을 깔고 자던 기억 등등’
‘우리 집 수원 상회 맞은편은 방앗간, 그 옆은 닭 집, 생선가게. 시장 통로에 유료 화장실이 있었어. 우리 가게와 친한 시장 상인은 쌀집인 경기상회 아저씨, 그리고 내 친구 엄마였던 옷 가게 아줌마와는 엄마가 친했지. 떡집과도 잘 지냈고. 과자가게에서 자주 샀던 종합 선물세트도 기억이 새록새록하네. ABC 과자 기억 나. 엄마가 항상 고마워했던 고대 구내식당 할머니도.’
막내의 기억이다. 우리들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도 크게 불행하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시장 통이라고 해도 제기동은 서울이었다. 뱅골과는 다른 문화가 있었다. 누가 뭐래도 서울은 신문물의 최전선이었다. 우리들의 서울 이주 직전 텔레비전 방송이 공중파를 타고 사람들에게 보급되었다. 뱅골에서는 라디오를 가진 집도 별로 없었다. 라디오조차 마음대로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뱅골 우리 집 정도에서나 라디오 수신도 가능했다. 나는 뱅골 안방에서 뒤 울안으로 나가는 쪽문을 열어놓고 라디오 어린이 프로를 들었다. 사거리에서도 라디오의 각종 연속극을 들으며 상상력을 키웠다. 지금도 라디오를 즐겨 듣는 건 그때의 영향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내가 중학생이 되어서야 우리 집에 텔레비전이 생겼다. 시장 통에 살 때 만화 영화 시간이 되면 우리들은 그걸 볼 수 있는 집으로 갔다. 입장료 비슷한 돈을 내고 그 집 마루에서 텔레비전을 봤다. 제기시장 근처 개천가에는 뚝방을 따라 판잣집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그 무허가 판잣집들은 전국 곳곳에서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온 사람들이었다. 나중에 그들은 성남으로 이주시켰다고 한다. 소문만 들었지 정확히 언제 판잣집들이 철거되었는지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더러운 물이 흐르는 개천을 따라 줄지어 있던 판잣집들 모습은 지금도 선명하다.
뚝방 주변 어느 집이 우리들이 텔레비전을 보던 곳이었다. 그 집은 만화가게도 같이 했다. 아이들은 푼돈을 가지고 만화 영화 시간만 되면 그 집 마루로 모여들었다. 그곳은 나도 자주 갔다. 만화만이 아니라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여로>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 드라마를 보며 남이 볼세라 몰래 눈물을 훔치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난다. 심지어 눈물을 흘리다 또래 남자애의 놀림을 받은 적도 있다. 그런 추억 때문인지 아직도 슬픈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눈물이 날까 걱정부터 한다. 소심하게 마음껏 울지도 못한다. 감정 표현을 숨겨야 했던 어린 시절의 병폐가 꽤 오래가는 게 아닌가 싶다. 감정 표현에 열려 있지 않았던 사회 관습은 그 당시 어린이의 행동 방식에도 영향을 끼친 것 같아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