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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애벌레들의 도약대

- 사거리를 떠나 제기시장 통으로 -

by 권영순

우리는 사거리를 떠나 서울로 왔다. 내가 5학년 때였다. 마음은 새로운 환경 그 어떤 것도 감당할 수 있었다. 부모님이 그곳에 계셨기 때문이다. 그 하나만으로도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었다.


과연 그랬을까?


사거리 시절의 기억은 내게 무엇을 남겼을까? 나는 직장을 다니며 두 아이를 키운 워킹 맘이었다. 자녀 양육이 힘든 건 분명하다. 그런데도 가족이 떨어져 사는 건 아니라는 믿음은 왜 생겼을까?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홀가분하게 직장 생활을 하는 동료들을 봐도 전혀 부럽지 않았다. 몸은 홀가분하고 편할 수 있다. 돈도 더 절약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내가 양보할 선택지가 아니었다.


우리를 서울로 데려올 즈음 엄마는 장사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는 상태였다. 외할머니가 일찍 병으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엄마는 여학교 졸업을 마치지 못하셨다. 하던 공부를 마칠 기회를 갖지 못하셨지만 본래 아주 영민한 분이셨다. 그 영민함이 수완이 필요한 장사에도 적용되었다고 본다.


우리가 뱅골에 살 때는 시골 농지를 팔아 작은 아버지에게 돈을 대신 것 같다. 두 오빠를 맡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중에는 아버지도 서울로 올라가셨다. 그러나 자꾸만 두 분이 땅을 팔아 서울로 올려 보내는 것에 엄마가 의구심을 가지신 듯하다. 엄마는 결국 우리 셋을 두고 서울로 올라가시는 결단을 내리셨다. 엄마가 서울에 열어 놓은 가게에 와 보니 말 그래도 엉망이었단다. 영화표에 다방이나 술집 출입 전표가 가게에 즐비할 정도였다고. 장사가 얼마나 뒷전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고 하셨다.

우리 아버지는 그런 걸 즐기는 타입이 아니시다. 누구보다도 전형적인 샌님이라고 할 정도로 고지식하시다. 그러니 누구 문제일지는 너무 뻔했다.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우리 부모님은 많은 걸 포기하셨다. 공동체에서 받던 각종 혜택과 지주라는 여유로운 처지까지 한꺼번에 버리셔야 했다. 게다가 지금 돌아보면 우리 셋을 데려오는 것 자체가 엄마에게는 엄청난 각오가 필요했다고 본다.


우리는 사거리를 떠나 제기시장 통에 있는 작은 방을 세로 얻어 모여 살게 되었다. 어린 셋이 서울을 오가는 지난한 2년 정도의 시간을 마치게 된 것이다. 바쁜 부모님 때문에 전학을 위한 각종 서류조차 큰오빠가 했다고 한다. 셋째 담임이 전근을 가서 그분 도장을 찍으러 큰오빠가 제법 먼 학교까지 찾아갔다고 하는 걸 보면.


봉황이 날고 갈매기 드나들던 곳을 떠나 서울로 오면서 우리가 맞닥트린 세상은 어떤 곳이었을까? 경

기도 화성에 있는 비봉 국민학교에서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종암 국민학교로의 전학은 나의 세상에도 확연한 변화를 주었다.


비봉 국민학교를 다닐 당시 나는 있는 집 딸이었다. 공부를 잘하던 오빠들 덕에 일단 권가네 딸로서의 네임 덕도 상당히 있었다. 국민학교 2학년 때 학교 대표로 화성군 어린이 동화구연대회를 나갈 수 있었던 것도 그 영향이 있었다고 본다. 적어도 학교에서 차별을 당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사거리에 살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을 오가며 얻은 서울에 대한 자잘한 지식 덕에 비봉 국민학교에서 우리는 나름 동경의 대상이었다.



서울 변두리에서 기다리는 삶이 과연 우리가 꿈꾸던 삶이었을까? 부모님이랑 같이 지낼 수 있다고 모든 게 다 좋아졌을까? 부모님은 화성 땅을 정리해 서울 변두리에 자리를 잡는 데도 어려움이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부모님은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우리를 데려오기 위해 부모님은 그 흔한 전셋집 하나를 구할 형편도 안 되셨다.


‘방 하나 있는 건물인데 조그만 부엌이 있었어. 맞은편에 찐빵 가게가 있었는데 거기 찐빵을 자주 사 먹었어. 엄마가 사주셨는데 10원에 10개 정도였던 것 같아. 나는 명절 때 엄마가 선물로 권총을 사주셨는데 어린 마음에 마치 서부 영화에 나오는 총잡이가 된 느낌을 갖곤 했어. 아직도 그 장난감 권총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어. 그래서 지금도 명절에는 장난감 권총을 사야 할 것 같은 욕구가 생기곤 해. 또 다른 기억은 방학 숙제로 양치질을 해야 한다고 부엌에서 며칠 치 양치질을 몰아서 하던 기억이 있어. 그리고 당시는 국민학교가 2부 제라 오전 내내 동네 애들과 땅따먹기를 하거나 옆 동네 애들과 돌싸움을 전쟁처럼 하기도 했어. 겨울에는 셋째 형을 쫓아다니며 구슬치기나 딱지치기를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해.’


막내의 기억이다. 조부모님 두 분은 사거리에 두고 와야 했다. 아직 연로하신 두 분까지 함께 살아갈 거처를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부모님 옆이라 좋다고 생각했다.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사거리 집에 덩그러니 남으신 두 분은 일요일 늦은 밤이라도 돌아오지 않을 우리들을 보내고 어떤 하루하루를 보내셨을까? 모두 떠나보내고 난 뒤 빈 둥지를 지키고 계셨어야 할 두 분을 그려보면 이제야 미안하기도 하고 그립기도 한 마음이 든다.


우리는 나름대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도 힘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빈부의 격차는 심각했다. 그걸 제기시장 통으로 옮기고 난 다음에야 더 심각하게 느꼈다.

우리 집은 상당히 많은 농지를 팔아 겨우 서울에 가게 하나를 냈다. 제기시장 통에 작은 방이 딸린 집도 간신히 구했다. 그 건물은 내 기억에 무슨 시장 관리사였던 것 같다. 막내 말대로 방하나 부엌 하나 있는.

부모님은 제기시장 수원 상회에 딸린 작은 방에서 숙식을 하셨다. 시장 관리사였던 방은 중학생인 오빠 둘이 공부를 하도록 구해 준 공간이었을 것이다.


뱅골에서 우리는 다른 집 아이들에 비해 철저한 위생 교육을 받았다. 양치질하기나 몸을 씻는 것도 정기적으로 이루어졌다. 대부분 아버지의 감시 아래 철저하게 말이다. 뱅골에 살 때 엄마는 내 머리를 자주 감겨주셨다. 나를 거꾸로 들고 머리를 감겨 주실 때 엄마의 감촉이 아직도 생생한 이유다. 여자는 얼굴보다 피부가 고와야 한다는 말도 자주 하셨다. 추운데 씻기 싫다는 나를 달래며 하신 말씀이다. 날이 추워지면 따뜻하게 데운 세숫물을 대야에 떠서 안방에 들여 주실 정도로 열심이셨다.


아침마다 동네 한 바퀴를 뛰고 돌아온 다음 우물가에서 우리들은 학교 가기 전에 모두 양치질을 했다. 소란을 떨며 양치질을 하던 그 기억이 지금도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넓은 공간에서 어른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하던 우리는 시장 통 쓰레기장 주변으로 이주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빠들을 위해 얻어준 건물 주변은 제기시장에서 나오는 각종 쓰레기를 모으는 곳 옆이었다. 여름이 되면 쓰레기 썩는 악취와 벌레가 들끓었다. 당시 중학생이던 큰오빠는 그 악취로 인한 고통을 엄마에게 종종 호소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엄마는 그런 곳에서 자식을 키워야 하는 것에 죄책감을 가지셨던 것 같다. 엄마가 맹모삼천지교까지 아셨던 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의 심각성은 충분히 알고 계셨다.


우리가 살던 시장 통 근처에는 넓은 정원이 딸린 현대식 건물이 있었다. 무슨 국회의원인가를 하는 사람의 집이라고 했다. 상당한 규모의 2층 집이었다. 담을 죽 따라가며 골목이 길게 이어져 있을 정도였다. 나는 철책 사이로 가끔 그 집 정원을 들여다봤다. 아마 그 무렵부터 자신도 모르게 빈부격차의 심각한 문제를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한 것 같다.


‘쓰레기장이 나도 생각나는데. 거기는 내 놀이터였어. 인근에 병마개 공장이 있어 나는 그 병마개들을 모아서 놀기도 했어. 옆 벽돌공장에서 찍어낸 벽돌을 적치해 말리는 공간이 있었는데 여기는 간이(?) 화장실이기도 했어. 소변은 기본이고 대변본 흔적이 곳곳에 널려 있어 사실상 야외 화장실 같은 공간이었지. 애들 놀이터이기도 했고. 학교를 들어가기 전에는 모래 더미에서 놀기도 했는데 땅강아지가 많았던 것 같아. 그때는 더러움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어. 손을 씻지도 않아 겨울에는 부르트고 갈라져서 피가 나와 아팠던 기억이 많아. 지금 생각하면 가난이 운명처럼 받아들여졌던 것 같아.’


우리는 집에 화장실이 없어 돈을 내고 시장 근처 공중 변소라는 곳을 다녔다. 씻을 공간이 만만치 않아 우리들은 정기적으로 목욕탕을 다니기 시작했다. 나와 동생들은 학교를 다녀오면 부모님이 장사를 하시는 가게 천장에 판자를 덧대 만든 다락방에서 지냈다.

‘누나는 혹시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수원 상회에 다락방이 있었지. 고개를 들기도 어려웠어. 거기에 있던 앉은뱅이책상에서 숙제를 하기도 했는데. 쥐가 다녀서 쥐똥도 곳곳에 있고. 정말 숨 막히는 시절이었던 것 같아. 엄마도 이런 환경에서 우리 형제들을 키우는 게. 마음이 아프셨을 거야. 그래서 악착같이 집을 사려고 노력하셨고 결국은 제기동 집을 200만 원인가에 사셨다고 하셨지.’

학교를 다니지 않아 많은 시간을 가게에서 보내던 막내의 기억이라 더 선명할 것이다. 나 역시 부모님이 장사를 하시는 동안 거치적거리지 않게 다락방에 올라가 혼자 놀이를 했던 기억이 선명하니 말이다.


뱅골 안방에도 다락이 있었다. 제법 넓은 다락문에는 호랑이가 그려진 민화가 붙어 있었다. 다락은 문을 열면 꽤 공간이 넉넉했다. 작은 쪽문도 있어 거기서 뒤 울안을 내다볼 수 있었다. 그 다락 아래는 부엌이었다. 그러나 제기시장 수원 상회에 있던 다락은 가게 천장에 판자를 대 만든 공간이라 아주 협소했다.

‘제기시장 주변에 살았던 집은 제기시장이 재건축되기 전 난전처럼 있었을 때 관리동 옆 건물이었던 듯. 거기 오래 살지는 않았어. 너희들 온 첫해 여름 동안인 것 같아. 곧바로 개천가에 있는 집에서 방 두 칸을 얻어 전세 살다가 할아버지 할머니 모셔 와야 한다고 제기동 집을 샀지.’

큰오빠의 기억이다. 이 말을 들으니 시장 근처 개천가에 있던 집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엄마는 시끄럽고 북적거리던 시장 통을 약간 벗어난 개천가에 집을 얻으셨다. 그 개천가를 따라 길게 판잣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개울가에 즐비하게 늘어선 판잣집에 살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당시는 도시 빈민도 많았다. 무허가 판자에 살던 사람들은 나중에 철거되면서 성남 어딘가로 쫓겨 갔다고 한다. 그 당시 중·고등학생이던 두 오빠는 학교를 다녀오면 곧장 가게로 달려갔다. 밀린 채소 배달을 돕기 위해서였다.


나는 뱅골에서 농사일을 해 본 적이 없다. 집안일도 마찬가지였다. 뱅골 다른 집은 아이들에게 농사일을 많이 시켰다. 우리는 공부를 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가졌다. 아버지는 오빠들에게 그 촌에서 담임선생님에게 과외까지 시키셨다. 서울에 있는 5대 공립중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런 여유 있는 시절은 모두 지나갔다. 우리 모두 현실을 조금씩 배워갔다고나 할까?


야채 배달을 도우려다 보니 남자 형제들은 일찍 자전거 타기를 배웠다. 큰오빠는 힘든 자전거 배달로 고대와 언덕이 많은 곳을 다니다 보니 체력이 좋아졌다는 소리를 했다. 결국 부모님만 고생하신 건 아니었다. 서울 살이에 오남매의 고생도 시작된 거였다.


나는 학교를 다녀오면 가게에 딸린 다락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인형 옷 그림을 직접 그려 가위로 오리는 작업을 주로 했던 기억이다. 인형도 인형 옷도 직접 만들어 가지고 놀았다. 다행히 동화책들도 조금씩 읽을 수 있었다. 그 당시 내가 제일 좋아하던 책은 <소공녀>와 <빨간 머리 앤>이었다. 책이 친구였다. 같은 책을 수십 번 다시 읽었다. 친구를 사귀기보다 책에 빠져 든 이유 중 하나는 학교에서 있었던 사건 때문이기도 했다.


전학 온 그해 5학년 말이었다. 그날따라 날씨가 좋지 않았다. 바람이 차고 쌀쌀했다. 늦가을에 전학을 갔으니 아마 초겨울이었을 것이다. 나는 주번이었다. 나와 주번을 같이 아이는 어디로 갔는지 나 혼자였다. 청소 당번들까지 모두 학교를 떠난 뒤에도 교실에서 뭔가를 했다. 아마 청소 뒷정리였을 것이다. 당시는 신발주머니가 없었다. 대신 복도 입구에 신발장이 있었다. 교실 정리를 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해 신발장에서 신발을 찾던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발장이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찾아도 내 신발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하고 다른 반 신발장을 찾아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는 규율이 엄격했다. 실내화를 신고 운동장에 나갈 수 없었다. 동동거리며 신발을 찾아다니다 설마 하며 쓰레기장으로 갔다. 거기 버려진 내 신발이 있었다. 더러운 신발을 신발장에 둘 수 없다고 지껄이던 반 여자애들이 떠올랐다. 그 애들이 신발을 쓰레기통에 가져다 버린 모양이었다. 쓰레기장에서 더러워진 신발을 찾아 울며 돌아온 나를 보고 엄마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사람들의 얄팍하고 못된 성정이 드러나는 건 언제일까?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드러난다. 그리고 나는 그런 성정과 행동도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항상 선한 뒤끝도 분명히 있다고 하셨다.

선생님이 되고 난 후 나는 우리 반에 전학 오는 아이들을 더 꼼꼼히 챙기려고 했다. 힘들어하는 일은 없는지 주의 깊게 관찰했다. 아마 그때의 경험이 큰 이유였을 것이다.


아현 중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첫 부임지였던 만큼 나 역시 새내기였다. 지금 돌아보면 임용고시 합격이 나에게 부여한 것은 그냥 학교에서 일할 취업 자격일 뿐이었다. 교사로서 업무를 제대로 아는 것도 없었고 무엇보다 경험이 전무했다. 솔직히 아현중에서의 5년은 교사로서의 기본 경험을 쌓는 시간이었다는 게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아현중은 남녀공학이었다. 그러나 말만 남녀공학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는 남녀 학생이 공부하는 건물까지 뚝 떨어져 있었다.


2학년 여학생을 맡은 해였다. 당시 한 학급 인원은 70명이었다. 어느 날 우리 반에 전학생이 왔다. 교무실에서 여학생을 인계받아 교실로 향하며 그 애의 얼굴을 살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얼굴이 밀랍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교과서와 출석부를 한 손에 모아들고 슬그머니 손을 잡았다. 괜찮다고 웃어 보여도 별로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아 살짝 걱정이 되었다. 지나치게 긴장한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마침 1교시가 우리 반 수업이라 조회를 겸해 여학생을 소개하고 수업을 시작했다. 여학생은 간신히 자기 이름만 모기소리만큼 작게 이야기하고 고개만 숙여 인사를 했다. 키가 작아 맨 앞자리에 앉혔다. 수업을 하면서 보니 여학생의 얼굴은 갈수록 창백하다 못해 금방 울 것 같았다. 걱정스레 바라보던 내 눈에 교탁 앞으로 흥건하게 흘러오는 물기가 보였다. 그 순간 알아차렸다. 극도로 긴장한 여학생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내 눈길을 따라가던 옆자리 여학생에게 얼른 눈짓을 했다. 그리고 체육복을 들고 양호실로 전학생을 데려가라고 살짝 일렀다.

대걸레로 여학생의 소변을 처리하는 모습을 우리 반 학생들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긴 한숨을 쉬고 나는 십 년도 더 전의 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같은 반 여학생들이 가져다 버린 내 신발과 그걸 쓰레기장에서 찾아 울며 맨발로 돌아왔던 이야기였다. 우리 반 아이들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국민학교 5학년 때 일이니 이미 십 년도 더 전의 일이라며. 내가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는 아이들에게 이런 당부를 했다.

-오늘 전학 온 친구는 평생 오늘의 사건을 잊지 못할 것이다. 아마 악몽으로. 그러나 그걸 이해심 많은 너희들이 바꿔줄 수 있다. 긴장하면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그 실수를 너희들이 이해하고 너그럽게 받아준다면 오늘 전학 온 친구도 평생 너희들을 잊지 못할 거다. 그리고 너희들을 진정한 친구로 받아들일 거다. 나는 오늘의 이 사건이 밖으로 나가 여러 사람이 알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난 아직도 낡고 허름하다고 내 신발을 쓰레기장에 가져다 버린 애들의 심술을 잊지 못하고 있다. 한때는 나도 낡고 허름한 신발을 신을 수밖에 없는 어려운 가정의 아이였다. 그러나 지금은 선생님이 되어 너희들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다. 오늘 전학 온 여학생이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될지 우리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너희들은 좋은 친구 한 명을 만들 기회가 생겼다. 나는 오늘 전학 온 친구가 오늘의 일을 악몽으로 기억하기 원치 않는다. 무엇보다 전학 온 첫날 긴장해서 생긴 친구의 실수를 말없이 덮어주고 친구로 받아주기를 원한다. 그게 내 부탁이다. 그래 줄 수 있을까? -

소문이 아주 안 날 수 있을까 걱정했던 건 기우였다. 한창 별 볼일 없는 것으로도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사춘기 소녀들이다. 그러나 3학년으로 진급해서도 복도를 지나가다 보면 환한 얼굴로 친구와 팔짱을 끼고 수다를 떠는 그 여학생을 가끔 볼 수 있었다. 그 사건이 오히려 전학생의 친구 사귀기에 좋은 영향을 끼친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여학생들 사이 소문이 악의적으로 번지는 걸 비교적 자주 목격한 나는 속으로 정말 놀랐다. 말을 잘했던 건 아닐 것이다. 당시 아현중은 마포 달동네 아이들과 사립인 경기와 유석국민학교 출신들이 섞여 있었다. 같은 교실 안에서도 빈부 격차가 심각한 학교였다. 그냥 우리 반 학생들의 공감 능력이 뛰어나고 마음씨 고운 아이들이었다는 생각이다. 말하고 싶어도 입 꾹 다물고 친구의 허물을 덮어준 그 학생들에게 나는 지금도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고 전하고 싶다. 지금은 50대 후반의 아줌마들이겠지만 분명 공감 능력이 뛰어난 자녀들을 키우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아픈 만큼 성장하는 것도 내겐 분명히 있었다. 가난한 전학생으로 학교에서 받은 차별의 상처는 제법 컸다. 그걸 극복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중학교에 들어가 완전히 다른 친구들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종암 국민학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전학생으로 떠돌았다. 시장 통에 있는 다락방에서 나만의 시간을 가지는 걸 더 선호했다. 이런 아픈 기억들이 우리 오 남매 모두에게 얼마간은 있었다고 생각한다. 가난으로 인해 비슷한 설움들을 겪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시절은 우리 모두에게 나비 애벌레의 고치 속처럼 캄캄한 어둠이었다. 모두 화려한 날개를 펼쳐 하늘로 날아오르기 전의 상태였다. 그 어둠은 길고 힘들었다. 그러나 우리 오 남매는 각자의 상처를 극복했다. 노력을 도약대 삼아 더 높이 뛰어올랐다. 지금 이런 여유로움으로 돌아볼 수 있게 성장했다. 터널 같은 어둠을 뚫고 자유로운 비상을 한 우리 오 남매에게 나는 뜨거운 마음으로 박수를 쳐준다. 모두 힘들었지만 잘 견뎠다고! 모두 대단하다고!

서울.jpg 우리는 한 동안 서울에서 아주 낯선 이방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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