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나는 할머니가 끓여주시던 된장찌개보다 맛난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없다. 텃밭에서 갓 캐낸 감자와 금방 따온 호박을 넣어 끓여주시던 된장찌개. 그 구수한 맛은 입에서 살살 녹았다. 별 다섯 개를 받았다는 음식점도 가 봤지만 그런 고소하고 특별한 풍미는 찾을 수 없었다. 손수 담그신 된장만 풀어 넣었는데도 색깔부터 남달랐다. 뽀얀 황갈색에 맛과 향 모두 일품이었다. 손맛의 진수를 맛봐서일까? 결혼을 하고 살림을 하면서 된장찌개를 수없이 끓여봤지만 할머니의 맛을 살릴 수는 없었다. 엄마가 주신 맛난 된장으로도 쉽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맛을 아예 포기하고 산다. 아마 추억의 손맛일 거라고 나를 납득시키면서. 아직도 쪽진 머리에 자그마한 체구를 동동거리시며 우리 끼니를 준비하시던 사거리 시절 할머니의 모습이 어렴풋이 그려진다. 된장찌개 하나로도 우리의 미각을 만족시켜 주시던 푸성귀 가득한 시골 밥상과 함께.
할머니에게 맡겨졌던 삼남매가 할머니의 속을 썩여 몹시 혼난 적은 없었을까? 기억나는 게 없다. 할머니는 입찬 소리할 기회를 놓치는 분이 절대 아니셨는데?
오남매가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할머니는 너그러운 분은 아니셨다는 게 공통 의견이다. 심지어 아버지의 가장 큰 단점도 바로 할머니의 좁은 소견을 닮으신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다. 나만해도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속좁은 소견을 보일 때가 많았다. 할머니의 까탈스런 성격을 놀랄만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남매 때문에 힘든 일이 생기면 말로도 힘들게 하실 수 있었을 텐데? 아무리 더듬어 봐도 그런 기억이 없다. 그러고 보니 그때 이것저것 많이 참은 건 오히려 우리가 아니라 할머니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 시절 내가 가장 미안한 일을 저질렀던 사람은 셋째다. 바로 이 사건 때문이다. 그날은 겨울의 초입이었다. 한낮 햇살은 제법 따뜻했다. 그 시절 겨울이 오면 학교에서는 전교생에게 숙제를 내주었다. 당시는 석탄으로 교실 난방을 했다. 석탄에 불을 붙이려면 솔방울이 필요했다. 솔방울은 불이 쉽게 붙는 데다 화력이 좋다. 우리는 겨울 초입이면 학교에서 배부한 자루를 하나씩 받았다. 그 자루에 솔방울을 가득 채워 학교에 제출했다. 소사 아저씨는 그걸 받고 도장이 찍힌 작은 종이를 주셨다. 그 종이를 담임선생님에게 내야 숙제가 완성된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은 우리는 솔방울도 직접 따서 학교에 가져가야 했다.
셋째와 나는 우리 산에서 솔방울을 따 자루에 담고 있었다. 셋째는 제법 높은 소나무에 올라가 한참 솔방울을 따 내렸다. 나는 바닥으로 떨어트리는 솔방울을 주워 자루에 담는 역할이었다. 아직 어린 우리가 자루 두 개를 채워야 하니 그 일이 쉬운 건 아니었다. 제법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한창 정신없이 자루를 채워 갈 무렵이었다. 면사무소가 있는 비봉 중·고등학교에서 사거리로 내려오는 신작로에서 아이들 비명소리가 떼창처럼 들렸다. 오후 늦게 수업을 마치고 하교하던 6학년 여자 아이들의 비명 소리였다. 십여 명이 한꺼번에 신작로를 달려 내려오며 ‘문둥이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당시 우리들에게 공포의 대상은 문둥이였다. 그 소리는 나를 패닉에 빠지게 했다. 나는 다급하게 셋째에게 빨리 나무에서 내려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허둥지둥 나무에서 내려오자 우리는 자루도 버려둔 채 집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집에 와서야 셋째의 바지가 피로 흠뻑 젖어 있는 걸 발견했다. 나무에서 급하게 내려오다 가지에 허벅지가 찢긴 모양이었다. 그걸 느끼지도 못하고 도망쳤던 것이다.
그 상처는 생각보다 깊고 컸다. 지금처럼 정형외과에 데려가 상처를 치료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저절로 아물었다. 아무 치료도 받지 않았다. 하다못해 고약조차 바르지 못했다. 여학생들이 진짜 문둥이를 보고 도망친 것인지도 확실치 않다. 사실이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무슨 장난을 치다 자기들끼리 호들갑을 떨었다는 데 더 무게가 실린다. 그걸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내 다그침에 동생만 다친 건 아닌지? 그 사건에 대해 아직도 동생에게 제대로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사거리 시절을 돌아보면 이런 판단 미숙이 자주 생겼던 것 같다. 셋째가 다친 일도 할머니에게는 마음의 상처가 되셨을 터였다. 옛날부터 애 본 공과 새 본 공은 없다는 말이 있다. 할머니는 우리를 먹이고 입히고 학교를 보내는 것도 힘겨우실 나이였다. 가스레인지도 청소기도 세탁기도 없던 때였다. 나무 장작으로 불을 때서 밥을 하고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써야 했다. 더구나 학교를 다녀보지 못하셨으니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줘야 할지 거의 모르셨을 것이다. 무엇보다 나이가 이미 고령이셨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막내는 너무 어려 엄마가 서울로 데려가셨다고 생각했다. 막내와의 기억이 너무 희미해서다. 나에게 사거리 시절은 기억하기조차 힘겨운 시간이었다. 일부러 꺼내 본 적이 없다. 의식 아래로 꾹꾹 눌러 놓은 이유는 되돌아보기 너무 괴로운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부모와 떨어져 살아야 하는 상황으로 인해 거의 멘붕이었다. 게다가 조부모님은 이런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모르셨을 것이다. 그런 경험이 전무하셨기 때문이다.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인 우리가 떼를 쓰면 더 속수무책이셨던 것 같다.
우리는 서울을 오가기 위해 차비가 필요했다. 서울에서 사거리로 올 때는 엄마가 차비를 주셨다. 그건 확실히 기억난다. 그러나 다시 서울을 가기 위한 차비는 어떻게 마련했을까? 가끔 그 시절이 떠오르면 나는 그것도 의문이었다. 두 분에게는 현금 수입이 거의 없으셨다. 사거리에서 버스를 타면 용산역에 도착했다. 용산 역에서 고대 앞까지 가는 버스를 어딘가로 걸어가 타야 했다. 어린이 요금을 냈더라도 돈은 제법 들었을 터였다.
토요일 학교를 다녀오면 우리는 서울을 가려고 기를 썼다. 그 과정에서 할머니나 할아버지의 괴로움이나 불안에 대해서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러니 토요일만 되면 두 분을 졸라 여비를 마련했을 것이다.
서울 오가기의 대장은 내가 아니었다. 사실 난 좀 겁쟁이였다.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린 셋째가 대장이었다. 그때 셋째는 여덟 살에서 아홉 살이었다. 더구나 나와 막내까지 데리고 다녔다. 셋째는 같이 가지 못할 일이 생기면 혼자서도 서울을 잘도 오갔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부모님 속도 어지간히 썩였다. 특히 그 시절 엄마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을 정도였다. 엄마는 꽤 오랫동안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옷 사 입히고 차비 줘서 보내면 용산 역까지 갔다 울면서 되돌아와 엄마의 억장을 무너지게 했다고. 그 나이 우리에게는 엄마가 세상의 전부였으니 당연하긴 하지만
그런 우리에게 조부모님의 걱정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꽤 오랫동안 당시 엄마를 생각하며 미안해했다. 구포리 산으로 부모님이 낙향하신 다음에도 형편이 되기만 하면 오갔던 이유에도 그 시절의 미안함이 컸다.
오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 되돌아보니 이제야 조부모님 두 분에게도 정말 죄송하다. 이제야 두 분의 감정이나 처지를 헤아리게 된 것이다. 늦었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두 분이 우리를 직접 데리고 서울을 오갈 형편은 아니었다. 서울은 노년의 두 분에게도 낯선 곳이었다. 아직 어린 우리를 서울로 보내고 두 분이 얼마나 불안해하셨을지 지금은 그림이 그려진다. 하도 졸라대니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서울로 보내주시기는 했다. 전화도 없었던 시절이다. 그냥 잘 갔으려니 하셔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돌아올 때가 되면 버스가 지나갈 때마다 눈 빠지게 기다리셨을 터다.
서울을 가는 차비를 우리는 어떻게 마련했을까.
할머니는 뒤 울안에 닭장을 짓고 닭을 기르셨다. 그 닭들이 낳은 달걀을 팔아 우리의 차비를 마련해 주셨단다. 막내는 사거리 가게에 짚으로 엮은 달걀 묶음을 가지고 가면 돈으로 바꿀 수 있었다고 했다. 달걀은 낳는 족족 그곳에 팔려갔단다. 그게 우리들의 차비였다. 두 분은 달걀 하나 먹어보지 못하셨을 테고.
‘개구리는 닭에게 가장 맛있는 먹거리야. 나는 개구리를 잡으러 논둑을 뒤집고 다녔어. 개구리를 잡아 나뭇가지나 철사에 줄줄이 꿰어가지고 할머니가 키우던 닭장에 넣어주었던 기억이 생생해.’
막내의 기억이다. 지금도 논길을 걸을 일이 생기면 그때 그 수많은 개구리들이 떠오른다. 우리가 내딛는 발걸음마다 논으로 뛰어들던 그 개구리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농약을 사용하면서 개구리들도 더 이상 생존하기를 거부한 게 아닐까?
우리들은 두 분의 유일한 단백질 공급원을 빼앗았으면서도 아무 죄의식도 없었다. 그냥 우리 감정이 더 중요했으니까. 우리들이 서울을 오가는 걸 바라보시면서 두 분은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어린 나이에도 대견하다고 느끼셨을까?
나는 지금도 가끔 사거리에서 서울을 오가던 그 어느 날의 기억에 대해 꿈을 꾼다. 용산에서 제기동을 가는 버스까지는 제대로 탔다. 문제는 내릴 때 생겼다. 고대 앞에서 내려야 하는 데 그걸 놓치고 만 것이다. 다음 정거장은 미아리였다. 당시는 한 정거장의 거리가 꽤 멀었다. 세워달라는 소리도 못한 채 우리는 꼼짝없이 미아리까지 갔다. 제기시장과 고대 앞을 물어물어 걸어서 부모님을 찾아왔다.
남루한 차림의 아이들 셋이 제기시장의 부모를 찾아가던 그 오래된 기억은 지금도 가끔 나를 눈물짓게 한다. 이제는 당시 할머니의 안쓰럽던 마음까지 읽혀 더 눈물이 어룽거린다. 이 시를 가르칠 때마다 왜 가슴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눈물이 꺼내져 콧날이 시큰거리고 눈물이 핑글거리는지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엄마 걱정 - 기형도>
사거리 시절 우리들은 할머니의 속사랑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두 분은 우리의 마음을 이해하고 서울을 오가게 허락해 주셨다. 그 시절 우리는 가난하고 마음은 더욱 힘들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도 우리는 어떻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우리가 사람 구실 하며 살 수 있을 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두 분이 큰 사랑이 있어서였다. 지금 할머니가 계시면 더 잘해 드릴 수 있는데. 사십 년 전 이별해 지금은 뵐 수조차 없어 더 안타깝고 그립다. 이제라도 그 시절 두 분에게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나마 표현할 수 있어 다행이다.
사거리 시절은 우리에게 삶의 굴곡 중 하나였던 건 분명하다. 하지만 삶의 깊이를 만들어가는 시간이었다. 살다보면 지치고 힘든 시간도 수시로 다가온다. 조부모님 두 분의 존재는 우리가 지쳤을 때마다 큰 사랑의 그늘이 되어 잠시라도 쉬게 하고 앞으로 나가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그걸 이 나이가 되어서야 아프게 깨닫는다.
돌아보니 나에게 사거리 시절은?
눈시울은 자꾸 붉어지고 어룽거리는데 툭하면 배 아프다는 손녀에게 ‘엄마 손은 약손이다. 슬슬 내려가라.’며 배를 쓰다듬으시던 할머니의 손길과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아 너무 그리운 시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