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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골 시절 소소하게 기억나는 이야기들 2

by 권영순

(2) 소소하게 남은 이야기들


내가 뱅골에 살았던 기간은 10년 남짓이다. 그 시간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자세히 떠올릴 수 있는 이유가 뭘까? 나는 휴전이 되고 5년 뒤에 태어났다. 전쟁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모두가 힘들어했을 시기였다. 사람들은 오랜 시간 한 마을에서 나름 질서를 유지하며 살았다. 그런 사람들이 갑자기 이념으로 인해 싸우고 할퀴고 심지어 죽고 죽이는 일도 있었다고 들었다. 이념이 뭔지도 모르던 사람들이었는데. 우리 마을에도 사연이 없는 집이 없을 정도다. 사람들은 그 상처와 아픔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지금도 어렴풋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대보름날의 풍경이다. 그날은 동네 남자 어른들이 흰색 두루마기까지 차려입고 마을 한가운데 있던 야산으로 모여들었다. 대보름의 이 행사는 마을의 오랜 전통이었다. 달이 떠오르는 동쪽을 향해 절을 하던 어른들의 모습은 경건 그 자체였다. 자연을 경배하며 살아가는 소박한 사람들이었기에 사람들 사이에 불필요한 적대감이나 피해의식으로 다투는 일도 적었다. 공동체의 도덕률로 판단해서 그것이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할 때만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모두가 협력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썼다. 누군가에게 생긴 어려움에 너와 내가 따로 없었다는 의미다.


내 친구였던 남복이 엄마가 아기를 잃는 일이 생겼다. 남복이 동생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은 것이다. 우리는 집 앞에 서서 남복이 아버지를 비롯한 동네 어른들이 멍석으로 둘둘 만 무언가를 지게에 지고 산으로 올라가는 걸 지켜보았다.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평토장을 한다는 건 그때 알았다. 천하에 둘도 없는 불효라 생각해서 무덤에 봉분을 만들지 않아 평토장이라고 한다는 것도. 둥근 봉분 표시가 없으니 나중에는 어디에 자식을 묻었는지도 알 수 없다고 했다. 큰오빠는 구포동 고개 넘어가는 솔숲에 ‘애청’이라고 불리던 곳이 있다고 했다. 어쩐지 그 고개를 나는 상당히 무서워했던 기억이다. 거기서 밤이면 여우 울음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부모보다 먼저 죽은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

이 의미는 물론 나이가 들어서야 제대로 이해했다. 하지만 나는 어린 나이에도 남복이네 일을 통해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는 의미를 희미하게나마 깨달았다고 생각한다.


후일 제기동에 살 때 시내로 나가는 버스 정류장은 고려대학교 공과대학 근처에 있었다. 그 주변이 원래는 산이었는데 사람들은 그곳을 애기능이라고 불렀다. 그 의미를 알게 된 것은 더 나이 들고서였다. 일찍 죽은 왕손들을 묻은 장소라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고급스러운 주택들이 꽤 많이 들어선 편이었는데 그런 안타까운 역사가 있던 곳이라니.


더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날 때도 있었다. 우리 옆 동네 아이가 우물에 빠져 죽는 일이 생긴 것이다. 부모가 농사일을 하러 간 사이 혼자 있던 아이들에게 가끔 그런 일이 생긴다며 어른들은 안타까워하셨다. 한동안 그 우물은 폐쇄되었다. 식수를 뜨러 멀리 다녀야 해도 몇 년 동안 사용을 금지했다. 아무도 먹을 수 없게 볏짚을 잘게 썰어 우물에 잔뜩 넣어두었다. 심지어 뚜껑까지 덮어 수년 동안 열지 못하게 했다.


나는 전염병을 막기 위한 위생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사람의 편리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 무엇인지. 죽은 아이에 대한 예의와 사고를 겪은 부모에 대한 배려다. 거기에 이런 사고를 또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도 있었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우리는 편리함보다 어려운 일을 당한 이웃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야 함을 그런 사건을 통해 저절로 배웠다.


대부분의 나날은 평범하디 평범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봄이면 너른 들과 밭에 씨를 뿌리고 여름 비바람에 곡식들을 길러 가을에 거둬들였다. 그렇다고 모두가 편안한 건 아니었다. 가정 경제를 짊어져야 할 어른들을 일찍 잃은 집의 가난은 심각한 문제였다. 나는 지금도 우리 텃밭 끝 아랫집에 살던 그 가족을 기억한다. 아이들 아버지는 일찍 죽고 엄마가 남의 집 일을 해 주며 근근이 살아가던 탓에 그 집 아이들은 속옷을 입을 수 없었다. 평소에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가난이었다. 그것이 여자 아이들의 고무줄놀이에서 불거졌다. 펄럭거리는 치마 사이로 맨살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철없는 아이들의 놀림에 울고 집으로 가던 그 집 딸은 나보다 두 살 어렸다. 가난은 그 애의 미래도 갉아먹었다. 농사지을 남자 어른이 없어 머슴으로 들인 30대 초반의 남자와 아이를 낳고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고1 여름방학 때였다. 옛 절친 남복이를 보러 뱅골에 갔다 그 애를 우연히 마주쳤다. 누군지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학교를 다닌다면 중학교 2학년이어야 하는 데. 도저히 14살이라고 볼 수 없는 아줌마가 있었다. 돌이나 됐을까 싶은 애까지 업고 있었다. 처음에는 저 아줌마가 왜 피하나 했다. 나중에야 누군지 알고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모른다. 동네에 남아 있는 친구의 말은 더 경악스러웠다. 그 애 엄마가 떠밀어서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면 아동 청소년법에 걸릴 일이다. 가족을 위한 희생이란 명분이 그런 식으로 이용되다니. 지금도 안타깝기만 하다.


그렇다고 뱅골 마을 사람들이 남의 어려움을 나 몰라라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덕분에 우리들은 요람기 시절을 풍요롭게 보낼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인생을 관통하는 사람의 도리와 예의. 정의나 양심 같은 것들에 대한 기본교육이 이루어졌다. 물론 각종 놀이를 겸한 체력단련과 협동심 기르기도 있었다. 나 역시 다른 아이들처럼 널뛰기, 고무줄놀이를 줄기차게 했다. 주변 자연을 활용한 소꿉놀이나 공기놀이도 했다. 까마중이나 뱀딸기같이 먹어도 문제가 없는 것들은 소꿉놀이 재료로 자연스럽게 배웠다.


아무리 여러 번 알려줘도 진달래와 철쭉을 구별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산과 들에서 나오는 먹 거리에 대해 서울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보다 아는 게 더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교육 그 이상이 마을이라는 공동체에서 자연스러우면서도 나름 체계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나에게 뱅골이 소중한 추억의 장소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우리 논은 대부분 왕재골에 있었다. 왕재골은 세종의 큰형이었던 양녕대군이 내려와 살았기에 붙여진 지명이다. 근방에 전주 이 씨가 많이 사는 데 모두 그 후손이라고 한다. 우리 집 왕재골 논은 규모가 제법 컸다. 버스 정류장으로 두 개 정도에 걸쳐 있었다. 가을이면 셋째와 막내랑 그곳으로 새를 쫓으러 종종 다녔다. 돌아올 때 동네 어른들을 만나 인사를 하면 ‘새가 너희를 쫓겠다.’며 웃으셨던 기억이 난다.


나는 농촌에서 자랐지만 거의 농사일을 배우거나 거들지 않았다. 농사일 거들기로 기억나는 건 이거 하나다. 아버지는 당시 드물게 하우스 농사를 지으셨다. 일본어로 된 책을 보시고 시험 삼아 하신 것 같다. 사거리 근처에 있던 밭에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오이를 심으셨다. 구포리 산 주변이다. 그걸 수확할 때 오이 나르는 걸 돕는 정도가 농사일 거들기였다. 언젠가 내가 비닐하우스가 있던 밭을 가리키며 거기서 기른 오이를 날랐다고 하자 남편이 코웃음을 쳤다. 그게 무슨 농사일 돕기냐고. 겨우 오이 몇 개 날랐을 텐데!


그러나 나보다 다섯 살 많은 큰오빠는 아버지가 농사일을 제법 시키셨다고 말했다.

- 난 초등학교 6학년 때 겨울 둘째와 함께 언 논에 객토도 해 봤어. 산에서 리어카에 흙을 날라 논가에서 거적에 담아 퍼 나르는 일이야. 오이 따기는 수도 없이 해 보고. 인천으로 팔러 가는 것도. 야목까지 리어카를 끌고 가 기차에 싣고. -

그 말을 듣고 보니 정신없이 바쁜 농사철에 나는 오히려 걸림돌이었던 기억이 났다. 왕재골 논은 뱅골 집에서 거리가 제법 있다. 그 논으로 새참을 나르던 엄마를 따라다녔다. 유치원이 없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도 엄마의 뒤를 그냥 따라가는 게 아니었다. 울퉁불퉁한 논둑길은 엄마의 뒤를 따라 걷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 길을 엄마 치마를 잡고 앞서 걷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한 번은 마음이 바쁜 엄마가 울며 고집을 부리는 나를 논둑 어디에다 떼 놓고 가셨다. 나는 어른들이 새참을 다 드시고 그릇들을 챙겨 되돌아올 때까지 혼자 악을 쓰며 울고 있었다.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나도 참 어지간했구나 싶다.

들밥을 광주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왕재골 논으로 내가는 엄마와 나의 모습

왕재골 논 근처에는 제법 수량이 풍부한 시내가 있었다. 태행산 자락이라 수량이 많았던 것 같다. 장마가 지면 그 시냇가에 가끔 그물을 들고 동생들과 고기를 잡으러 갔다. 고기라야 겨우 손가락만 한 버들치나 드물게 미꾸라지 같은 것들이 전부였다.

그날도 우리는 고기가 숨어 있을 만한 수초들을 골라 발로 더듬었다. 드디어 제법 큼직한 물고기가 걸렸는지 그물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셋째가 뱀장어라며 날렵하게 그물을 잡아 올렸다. 뱀장어 치고 제법 무게감이 있었다. 하지만 뱀장어가 맞는지 자세히 들여다보다 혀를 날름거리는 걸 보고 뱀이라는 걸 알아챘다. 식겁한 우리는 그물까지 내던지고 시내를 뛰쳐나와 긴 둑을 따라 도망쳤다. 그것도 어디서 들은 게 있어 개울둑을 지그재그로 내달렸다. 뱀은 목표물이 가는 방향대로 곧바로 따라간다는 소리가 기억나서였다. 겁이 나서 다시는 그 시내를 들어가지 못했다. 그물을 찾으러 가야 하나 며칠 동안 고민만 했다. 사실은 뱀이 우리보다 더 놀랐을 텐데.


봄 오는 소리 가득한 들에서 냉이와 달래를 캐고 쑥을 뜯으러 다니던 봄날. 친구들과 진달래를 꺾으러 왕재봉 주변을 휘젓고 다니던 일. 왕재봉 꼭대기 바위 위에 앉아 저 멀리 수인선 야목역을 향해 구불구불한 철로를 따라 기차가 오길 기다리던 날들. 어쩌다 칙칙폭폭 하는 소리와 긴 꼬리가 달린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꼬마 기차를 보게 되면 우리도 모르게 함성을 지르던 일. 안 뱅골 과수원 길에 풍기던 아카시아 꽃향기와 복숭아의 달달한 단내, 모내기할 무렵이면 밤마다 온 마을을 채우던 개구리울음 소리. 장마가 지면 양동이를 들고 물고기를 잡으러 뛰어가던 냇가(지금도 비 온 뒤에는 냇가로 달려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일종의 습관일까? 추억의 반추일까?) 반짝이는 햇살 아래 시냇물에서 친구들과 종일 물놀이를 하며 보내던 여름 방학. 원두막에서 먹던 수박이나 참외의 시원하고 달콤한 맛. 반딧불이 반짝거리는 해거름까지 이웃집 밀 수확을 돕고 얻어먹었던 고소하고 달달한 밀 빵. 울안 장독대 옆 꽃밭에 철 따라 피어나던 채송화. 맨드라미. 과꽃, 나팔꽃, 달리아.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이고 내내 기다리던 첫눈.


책이라고는 오빠가 서울에서 가져온 <계백장군> 한 권이었지만 그걸 읽고 또 읽던 어느 해 겨울 방학. 그 시절 생긴 백제에 대한 관심 덕분에 지금까지 한성 백제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은 곳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집 앞 텃밭을 가로질러 끝자락 집에 한겨울 밤 눈밭을 동동거리며 놀러 가던 일, 따뜻한 아랫목에 발을 넣고 듣던 어른들의 옛이야기. 화롯불에 넣어 둔 군밤이 익어가며 풍기던 고소한 단내. 겨울 눈밭을 뛰어다니던 토끼 사냥. 학교에서 돌아오면 언 손을 이끌어 장작불 앞에 앉히시던 엄마의 손길과 장작불을 헤집어 슬그머니 꺼내 주시던 따끈한 군고구마나 감자의 달큼한 맛. 윷놀이하던 어른들의 우렁찬 소리.


시간이 데려간 추억들이지만 하나하나 돌아보면 정겹고 행복한 나날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평범한 일상이 우리를 성장시키고 변화시켜 현재를 만드는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도 가끔 뱅골 시절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에 젖어드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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