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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2

제기동 시절

by 권영순

과거를 회상하다 보면 어느 한 지점에서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 일이 있다. 마치 이 시에 나오는 지은이의 마음이 된다고나 할까?


겨울밤 박용래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 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제기동 시절 우리들 낮의 일상은 학교 다니랴 부모님 돕기 같은 집안일에 전투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겨울밤은 지금 돌아봐도 그리움이 한가득이다. 뱅골 이상으로 마치 고향집 같은 느낌이다. 바람도 우리 집 마당에 터를 잡고 잠을 잘 것 같은 길고 긴 겨울밤. 밖에는 소리도 없이 눈은 내려서 쌓이고. 골목에는 매서운 바람 소리를 타고 '찹쌀떡~ 메밀묵~'을 외치는 청량한 울림이 간간이 들려왔다.


당시 우리 형편은 메밀묵을 마음껏 사 먹는 것조차 사치였다. 가끔이지만 전기밥통의 따뜻한 밥을 커다란 양푼에 퍼 넣고 장독에서 김장 김치를 꺼내 송송 썰어 넣어 차가운 메밀묵과 함께 비벼 먹던 기억이란! 참기름 몇 방울의 고소한 향기를 음미할 시간도 없이 순식간에 양푼이 비워지는 마법이 거기에서도 일어났다. 다들 수저를 놓지 못하고 아쉬워하던 모습이 지금도 머릿속에 그려진다. 당시 우리 식구 수를 생각하면 메밀묵 한 두 모를 사 누구 코에 붙이겠는가? 먹성이 장난 아닌 남자애들이 넷인데! 그냥 침만 삼키며 메밀묵 먹기를 포기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기에 지금껏 아쉬운 모양이다.


나는 제기동 시절 할머니와 놀이를 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할아버지와는 달랐다. 가끔 오목도 두고 민화투도 했다. 손녀딸과 머리를 맞대고 하는 이런 시간을 할아버지도 싫어하시지는 않은 것 같다. 할아버지는 제기동 시절 서울살이의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셨던 것 같다. 그 답답증으로 인한 치매 증상을 보이셨다. 우리들은 집을 찾지 못해 어디선가 헤매고 다니시는 할아버지를 찾으러 다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정신이 좋은 내가 놀이에서조차 백전백패를 당했다면 이해가 될까? 학교를 전혀 다녀본 적이 없는 할아버지에게 새삼 존경심이 생기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할아버지는 드물게 머리가 좋은 분이셨다. 거의 맨몸으로 시작해 가산을 일으키고 나중에는 지주 소리를 들을 정도가 된 데는 그 좋은 머리가 일조했을 것이다.

나는 오 남매의 공부 머리를 엄마 쪽 유전이라고 자주 생각해 왔다. 우리 외할머니는 왜정 때 드물게 신식 교육을 받으신 분이셨다. 거기다 성격이 활달하고 생각도 트인 분이셨다고 엄마는 입버릇처럼 이야기하셨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할아버지의 유전자도 우리에게 상당히 영향을 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향해 탁 트인 할아버지의 사고방식은 우리 아버지의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덕분에 경제적 어려움 속에도 오 남매는 모두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이런 발전적인 유전자를 나는 조카들과 내 아이들도 물려받았을 거라고 믿는다. 드물게 훌륭한 우리 할아버지의 성품과 함께.


우리들은 모여 앉을 기회만 생기면 여러 놀이를 했다. 일명 ‘짓고 땡’이라고 부르는 화투 놀이도 그중 하나였다. 놀이라고 해도 게임에는 보상이 있어야 하는 법! 그렇다고 돈을 걸었던 건 아니다. 우리는 땅콩에 흰 설탕을 입힌 알사탕을 나누어 가졌다. 내 기억에 그 사탕을 사는 건 대부분 형편이 넉넉한(?) 큰오빠였다. 좀 웃긴 소리지만 사실 그 당시부터 큰오빠는 우리들의 물주 담당이었다. 심부름은 막내 담당이듯이.


딱딱하고 거칠거칠한 흰색 표면을 어금니로 깨물면 고소한 땅콩이 씹혔다. 달달함과 고소함이 믹스된 그 알사탕은 당시 많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분유로 만든 분필 모양의 과자 이상으로 나는 그걸 아주 좋아했다. 분유는 옥수수 가루처럼 미국에서 구호물자(?)로 들어온 거라고 했다. 이 대목에 어떤 죽일 놈이 구호물자를 빼돌려 자기 주머니를 불렸나 싶어 괜히 사 먹었다 싶기도 하지만.


판이 거듭될수록 내 알사탕이 줄어든 기억은 많다. 나중에는 거의 남은 게 없었다고나 할까? 형제들과 어떤 게임을 하던 나는 가장 먼저 손을 털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거의 예외가 없었다. 더 이상 게임에 참가할 사탕이 없어서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가장 많은 알사탕을 쓸어 갔을까? 특별히 기억나는 게 없는 걸 보면 이런 게임에서 누군가 사탕을 독식하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분명 그 게임에도 집요한 암투와 머리싸움이 치열하게 있었던 건 맞는 것 같은 데.

지금 돌아보면 각종 먼지와 손때가 가득했을 그 사탕을 욕심내거나 아쉬워할 일은 아니다. 특히 홀짝을 했을 때는 손때가 더 절었을 텐데. 그런 건 안중에도 없이 서로 눈에 불을 켜고 한 개라도 더 따겠다고 했으니. 그냥 다들 너무 어린 탓이었을까? 철도 없고.


제기동 집은 처음 우리가 이사했을 때 방이 세 개에 마당이 넓은 집이었다. 나중에 세를 들이기 위해 엄마는 마당에 방 2개에 부엌을 들였다. 목욕탕과 장독대도 만들었다. 대신 마당에 있던 수돗가가 사라졌다. 아직 줄줄이 학교를 다니던 우리들은 위 채 가운데에 있었던 내 방에 자주 모여들었다. 그곳에 모여 앉아 작은 담요를 깔고 했던 ‘짓고 땡’과 오목이나 바둑알 치기의 추억! 그리고 게임에 지지리도 운도 실력도 없던 나! 게임도 실력이라고 말하기에는 자존감 문제가 걸려 있으니 나는 운으로 매듭짓고 싶다.

땅콩에 하얀 설탕을 입힌 알사탕의 추억! 요즘 같은 겨울밤이면 생각나는 아련하고 그리운 기억이다. 학원이나 과외로 시간을 보내는 대신 우리들은 이런 남매들의 시간을 자주 가졌다. 어른이 된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미소 짓게 하는 추억으로 남아 다행이다. 비록 가진 것 모두를 탈탈 털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놀이만 한 것은 아니었다. 유학을 전공한 큰오빠에게 <논어>를 배우기도 했다. 작은 교자상 하나를 펴고 오 남매가 모여 앉아 공부하던 시절. 우리는 막내만 빼고 줄줄이 두 살 터울이다. 오빠가 이 강의를 할 때는 이미 대학들을 다니고 있었다. 전공은 다 달랐다. 전공 영역이 완전히 극과 극이었다고나 할까. 그런데도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요일은 하루를 정했던 것 같다. 우리들이 학교 공부와는 무관한데도 이 형제 수업에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왜였을까? 자기 공부 시간이나 개인 일정들도 빠듯했는데 말이다. 우리들은 그 시간을 즐긴 것 같다.

당시 학교는 주입식 수업이 대세였다. 아마 그런 수업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우리 모두 공자의 특별한 제자가 될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공부 방식은 단순했다. 큰오빠가 먼저 논어 한 구절의 뜻을 풀고 그것에 얽힌 이야기를 곁들인다. 그리고 한 명씩 돌아가면서 그 구절에 대한 자기 생각을 이야기한다. 이야기가 주제에서 벗어나도 무슨 문제가 있을 리 없었다. 같은 사건도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전공한 문학은 더하다. 작품을 읽는 사람 마음대로 해석해도 맹점만 두드러지지 않는다면 아무 무리가 없다고 본다.


나는 이 시기 <논어> 공부를 통해 다양한 시각의 차이에도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훈련을 쌓았다고 생각한다. 가장 좋았던 건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는 거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최근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각자가 이해한 것을 자신의 현실에 적용해서 풀이하는 토론이 그 시간에 이루어졌다. 그것도 자유토론으로 말이다. 때로 난상토론으로 간 적도 있었지만 그 시간이 불편하거나 즐겁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남이 발언할 때 나와 견해가 다르다고 함부로 끼어들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남매간의 서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동양의 고전으로 <논어>가 왜 그렇게 오래 우뚝 솟아 있었는지 나는 지금도 확실히 이해한다. <논어> 속 교훈은 이천 년 전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었다. 현실의 내 문제에 적용하는 데도 무리가 없음을 깨닫는 순간이 그만큼 자주 있었다.

그 시간은 고전을 읽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내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인류의 긴 시간을 관통하며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삶의 지혜가 바로 고전에 담겨 있기 때문이라는 꼰대스러운 주장이라고 해도 말이다.



우리 부모님은 삶이 힘들고 바빠 자녀들을 돌볼 시간을 제대로 가지지 못하셨다. 그 대신 남매끼리 가졌던 이런 시간을 나는 행운이라고 거침없이 표현한다. 방 밖에는 눈이 수북수북 내려 쌓이고 칼바람이 동장군을 대동하고 기승을 부려도 괜찮았다. 우리들은 모두 맨 처음 인용한 시와 같은 서정적이면서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았으니.


그 시절 <논어> 학습은 후일 내가 토론과 논술 교사로 활동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서울시교육청 소속 교수학습 지원센터에서 논술 동영상 강의안을 심의할 때 바로 이런 토론 방식을 제안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원단원들은 가르치는 과목도 소속 학교도 모두 달랐다. 나이 역시 20대 중후반부터 40대까지 다양했다. 초년 교사부터 나처럼 중견 교사까지 경력도 차이가 많이 났다. 20명의 논술지원단원들은 강의안 하나하나를 놓고 각자의 의견을 내놓았다. 우리는 그 협의 시간을 우스개 삼아 인민재판이라고 불렀다. 자신은 최선을 다해 써 왔다고 생각한 강의안도 결점이 거침없이 드러났다. 이렇게 만들어진 동영상이니 수준이 높을 수밖에. 초등이나 고등 동영상보다 훨씬 우수한 영상을 만들 수 있었다. 비결은 바로 심의 방법의 차이였다. 심의 시간도 많이 걸리고 수정 작업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만큼 개인적으로도 심화학습이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그 시간을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고 사람들에게 자주 강조한다. 대학 시절까지 배운 지식을 우려먹는 한심한 교사였던 내가 달라진 것이다. 지적 수준을 몇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최고의 기회였다. 그런 배움의 기회는 아무나 얻는 게 아니기에 엄청난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한 달에 인문 사회 과학 예술 영역 도서를 20여 권 이상 읽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기에 눈이 돌아갈 만큼 정신없이 공부했어도 말이다.


논술의 기본 역량은 독서에서 온다. 그러나 아는 것의 뼈대를 만들어 자기 생각을 글로 표현하기 전에 논리적인 말하기로 표현할 수 있다면 나는 삶의 질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그런 기본 훈련을 나는 가정에서 형제들과 먼저 경험했다. 만화책으로 익힌 속독과 책을 끼고 사는 습관, 주제에 맞는 자기 생각을 표현하기까지. 가정의 분위기가 왜 중요한지 더 말해 무엇하랴.

70년대 동대문구 제기동 한적한 어느 골목 모퉁이. 다소 허름한 집안에서 이런 고급스러운 학문에 접할 수 있었던 나는 이것저것 행운을 많이 잡고 태어난 행운녀가 분명하다. 부잣집에서 금이야 옥이야 자랐다는 친구들의 자랑이 부러운가? 그런 친구들도 많다. 그런데, 전혀 부럽지 않았다.

남매들이 머리를 맞대고 <논어>를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집에서 자라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당연히 행운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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