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기동 시절
어느 날. 작은 오빠가 새끼 오리 두 마리를 집으로 데려왔다. 노란색 오리였다. 동대문 시장에서 샀다고 했다. 병아리와 비슷한데 부리 모양이 완전히 달랐다. 주둥이가 납작했다. 병아리는 헤엄을 치지 못한다. 오리들은 대야에 물을 담아 넣어주니 신나게 헤엄을 쳤다. 발에는 앙증맞은 물갈퀴도 있었다. 너무 신기했다. 우리 모두 오리에 매료되었다. 하루 종일 오리만 보고 있어도 좋을 정도였다.
안타깝게도 오리들은 오래 생존하지 못했다. 아직 이른 봄. 날씨는 찬 기운이 남아 있었다. 오리들을 마당에다 재울 수 없어 방에 재우기로 했다. 나는 작은 오빠에게 그 오리들을 내가 데리고 자겠다고 사정했다. 잠버릇이 나보다 더 고약한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불은 솜을 두툼하게 넣어 만든 솜이불이었다. 극세사 같이 가벼운 이불이라도 겨우 손바닥만한 새끼 오리들은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솜이불은 무게가 상당했다. 사춘기를 막 지나가는 우리들에게도 이불은 무거웠다. 자다 보면 이불은 이리 차이고 저리 차였다. 만약 내가 데리고 잘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오리들은 더 오래 생존할 수 있었을 지도.
그 새끼 오리들은 어찌 되었을까?
솜이불과 발길질에 며칠 만에 죽고 말았다. 내 생각에 발길에 차여 이리저리 피하다 솜이불에 깔려 압사당한 것 같다. 그러게 나랑 자게 놔두지! 물론 살아서 잘 자랐더라도 집안에서 키우기에 골칫거리가 될 가능성이 높았겠지만.
더 이상 집에서 오리를 구경한 적이 없으니 또 오리를 사 온 적은 없는 것 같다. 하긴 그 비극을 겪고도 오리를 사 온다면 정상이 아니겠지. 아무리 반려 오리라도. 우리 집 같은 조건에서 오리나 병아리를 기른다는 건 욕심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혈기가 넘치는 남자 형제들이 우글거리는 서울 좁은 집에서 무슨 동물을 키우겠는가?
사실 남자 형제들은 넘치는 에너지를 어쩌지 못했다. 놀이를 빙자한 싸움도 잦았다. 그걸로 사춘기의 과도한 호르몬 문제를 해소한 것 같다. 특히 베개 싸움은 너무 잦았다.
나중에 교사가 되고 학생들을 인솔해 수련회나 수학여행을 가면 거기서도 베개 싸움은 흔한 일이었다. 눈만 돌리면 어느새 베개 난타전이 일어났다. 남학생들 방은 성한 베개가 없을 정도였다. 가끔은 담임교사가 숙소 관계자들에게 불려 가 문책성 책임 추궁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아니, 잘못은 학생이 했는데 왜 선생이 추궁을 당해야 하는지???
베개를 휘두를 때 날리는 먼지나 솜들은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엄마가 어렵게 사 들인 물건이나 가재도구들이 깨지고 부서지는 거였다. 우리 집 가재도구들은 제 자태를 온전히 지키고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장롱에 붙어 있어야 할 거울이나 마루 창문의 유리창. 심지어는 텔레비전 상자를 씌운 유리마저 산산조각이 났다. 모두 베개 싸움으로 장렬하게 전사했기 때문이다.
제기동 집이 아주 낡거나 부실한 주택은 아니었다. 그러나 벽이 얇아 집안은 외풍이 센 편이었다. 벽이 얼마나 얇은 지 알 수 있는 일이 있다. 옆집에서 우리 집 안방 벽에 붙여 무슨 공사를 했다. 내 생각엔 우리 집 담벼락에 붙여 지하실을 판 것 같다. 공사 시작 얼마 뒤 어느 저녁 무렵이었다. 식구들이 안방에 모여 앉아 저녁을 먹는데 장롱 뒤쪽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물이 밀어닥쳤다. 안방은 순식간에 물바다가 되었다. 안방에 기거하시던 할머니만이 아니라 다들 놀랐다. 장롱 같은 가재도구부터 안방에 있었던 물건들 모두 물벼락을 맞은 것이다.
하지만 벽의 두께가 얇아 그런 일까지 벌어진 모양이라며 복구만 해 달라고 한 뒤에 그냥 넘어갔다.
창문도 지금처럼 이중창이 아니었다. 방문들은 미닫이 문이었다. 문들은 겨울의 찬바람을 막아주기에 어설플 정도로 부실했다. 틈새로 바람이 숭숭 밀려 들어왔다. 게다가 툭하면 유리를 깨 먹으니. 집안에 바람이 마음대로 드나들 조건이 차고 넘친 것이다. 나중에는 엄마도 수리를 포기하셨다. 겨울이 되면 깨진 유리 대신 창호지를 바르는 땜질로 견뎠으니 어떤 상황인지 상상이 되지 않을까?
지금도 기억난다. 안방에는 엄마가 큰맘 먹고 들여놓은 장롱이 있었다. 그 당시 유행하던 자개가 박힌 장롱이었다. 그 장롱이 집에 들어올 때는 제법 큰 전신 거울이 달려 있었다. 베개 싸움으로 거울이 깨진 뒤 우리가 제기동 집을 떠날 때까지 엄마는 새 거울을 달지 않으셨다. 깨진 거울 자리에는 베니아 판이 드러난 채 오래 방치되었다. 나중에는 원래 그 모양이었던 것처럼 익숙해졌다. 원래 거울이 없는 장롱인가 싶을 정도였다.
아들 둘만 키워본 나도 아는 게 있다. 아이들이 한창 혈기왕성할 때는 살림살이나 가재도구를 온전히 지키기 힘들다는 걸 . 특별히 아이들이 때려 부수지 않았는데도 ‘뭔가 남아나는 게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자주 있었다.
지금도 난 결혼할 때 비싼 살림살이를 마련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말린다. 애들이 태어나 살림을 부수는 나이가 지나면 마련하는 게 낫다고 말이다. 아들 넷을 키운 우리 엄마는 어떠셨을까? 엄마는 그 시절 '늙으면 새 기르고 꽃이나 가꾸며 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이런 꿈을 꾸신 이유를 굳이 논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뭘 가꾸고 꾸미고 할 수도 없이 그냥 하루하루 전투적으로 살기도 바쁘셨을 테니.
그런 와중에도 우리들에게 가끔 동물이 들어와 함께 살았다. 우리들이 기른 동물들 중 기억나는 게 있으면 알려달라는 공지에 대한 막내의 답이다.
‘혹시 누나 기억날지 모르겠는데. 제기동에서 기르던 조그만 하얀 강아지가 있었는데. 어느 날 안 보여서 찾아보니 쥐약을 먹고 죽었더라고. 그래서 나는 묻어준 줄 알았는데. 그 죽은 강아지로 보신탕을 만들어 식구들이 개장국을 먹었어. 나는 처음에 무슨 닭죽인 줄 알았는데 먹고 나니 나중에 개장국이라고 하더라고. 너무 놀랐지만 이미 목구멍으로 넘어간 강아지가 생각나 기분이 이상하더라고. 이후 직장 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보신탕을 즐겨 먹었지만 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피하려고 했어.’
조카들은 쥐약 먹고 죽은 개를 보신탕을 만들어 나눠 먹었다는 말에 다들 놀랐다는 반응이다.
‘내 글 안 봤네. 그 강아지 우리가 안 먹었어. 그런 말을 했다면 너를 놀리려고 한 걸 거야.’
큰오빠의 말이다. 당시 유행하던 강철수 만화에나 나올 법한 데다 모두가 귀여워한 강아지를 먹을 만큼 우리 식구들이 비정하지는 않았다. 개장국을 했다면 엄마가 하셨을 텐데. 엄마는 적어도 우리들 마음에 상처를 줄 정도의 일을 하시는 분은 아니셨다. 아무리 고기가 귀한 시절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우리가 자라던 시대는 아직 반려견이라는 개념이 미미하던 때였다. 심지어 개나 고양이에게 특별한 이름을 붙이지도 않았다. 물론 서양식 이름이 있는 개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쫑쫑 메리 해피- 같이.
고양이는 냥이 거나 야옹이 아니면 나비였다. 흰색 털을 가진 개는 백구라고 부르는 게 대세였다. 우리 할아버지는 그 강아지가 흰색 털을 가졌다고 백구로 부르셨다. 우리는 멍멍이(?)로 불렀던 것 같다. 외할아버지 이야기에 나오는 호랑이에게 먹혔다는 개 이름도 백구였다.
지금처럼 개들에게 사료를 먹이지도 않았다. 사람이 먹다 남긴 잔반을 처리하는 가축의 개념이었다. 권정생의 동화 ‘강아지 똥’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되지 않을까. 당시 집에서 기르던 개들은 처음부터 잔반을 처리하다 나중에는 여름 보양식인 식용견이 된다. 길거리에 나다니던 개들이 개장수에게 소리 소문도 없이 끌려가 사라지는 이유이기도 했다. 우리 집에서 기르던 개 한 마리도 그렇게 사라졌다.
큰오빠나 막내가 그 강아지를 기억하는 이유는 유별나게 예쁜 외모도 한몫했을 것이다. 나는 그 강아지가 진돗개의 사돈의 팔촌 정도는 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귀여운 외모에 애교도 많은 데다 사람도 잘 따랐다. 그런 강아지가 쥐약을 먹고 괴로워하는데. 눈뜨고 봐 줄 수가 없었다. 당시는 아픈 개나 고양이를 데리고 동물병원을 간다는 개념도 없었다. 동물병원이 있는지 조차 모르던 시대였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심지어 우리들이 아파도 그냥 참았다. 어디가 아프다고 병원에 가지 않았던 것이다. 건강보험이 없던 시절이니 보통 서민들은 병원비를 감당하기 벅차 했다. 아파도 죽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니 강아지가 죽어가도 그걸 지켜볼 수밖에. 그게 큰오빠나 막내에게는 엄청난 트라우마였나 보다. 아직도 기억하는 걸 보니.
에드가 엘런 포우는 미국 추리소설가다. 그는 환상적인 공포 소설의 창시자다. 그의 대표작인 <검은 고양이>를 소개하기 위해 나는 학생들에게 내가 길렀던 고양이 이야기를 먼저 해 주었다. 그 고양이는 내가 직접 길러 본 첫 동물이었다.
어느 날 엄마가 우리 가게 단골 아줌마를 따라가 보라고 하셨다. 그 집에는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새끼 고양이들이 오글거렸다. 단골 아줌마는 가출했던 암컷이 새끼를 배서 돌아왔다고 하셨다. 그중에 한 마리를 집으로 데려왔다. 눈도 뜨지 못한 녀석이었다. 나는 녀석에게 우유를 먹이고 내 방에서 키웠다. 지금처럼 새끼 고양이 전용 영양식이나 도구를 구할 수도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어디에 가야 그런 것을 구할 수 있는지도 몰랐다. 근 한 달은 우유만 먹였다. 점차 내가 먹는 것들을 조금씩 덜어 주었다. 나중에는 생선살이나 우유가 섞인 빵도 먹였다. 녀석은 곰보빵이라고 불리던 소보로 빵을 좋아했다. 소보로 빵은 학교에서 돌아올 때마다 버스정류장 근처 빵집에서 샀다. 간식용으로 빵을 사다 저녁이면 고양이랑 나눠 먹었다.
당시 나는 엄마가 세를 들이기 위해 지은 아래채 방에서 기거했다. 그 방은 골목으로도 창문이 하나 있었다. 창문 옆은 바람이 잘 통한다. 나는 책상과 의자를 창가에 놓고 공부했다. 연탄을 때던 시절이라 방바닥이 아주 차지는 않았다. 그때는 침대가 없어 방바닥에 요를 깔고 잤다, 녀석은 나와 잔정이 들어서인지 낮에는 마음대로 돌아다니더라도 잠은 꼭 내 방에 들어와 잤다. 미닫이 방문은 앞발을 이용해 간단히 열었다. 다행이었다. 아니면 문을 박박 긁어대며 매일 밤 단잠을 깨웠을 텐데. 우유도 간신히 먹던 녀석이 점점 자라더니 밤 외출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반드시 돌아온다고 믿어서인지 나는 별 걱정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안채 방들 앞에는 쪽마루가 있었다. 햇살이 좋은 날이면 나는 쪽마루에 앉아 책도 읽고 간식도 먹었다. 어느 날이었다. 마당엔 돗자리를 넓게 펼치고 누룽지를 말리고 있었다. 누룽지로 뻥튀기로 튀겨 먹으면 훌륭한 간식이 되기 때문이었다. 시끄러운 소리에 옆 눈으로 살피니 참새들이 떼를 지어 누룽지를 쪼아대고 있었다
.
순식간에 그 일이 일어났다. 분명히 내 옆에서 반쯤 졸고 있던 냥이 녀석이 참새를 한 마리 물어다 내 옆에 놔주는 것이었다. 안마당에 널어놓은 누룽지를 콕콕 찍어 먹으며 갈취하고 있던 참새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갔다. 졸지에 비명횡사한 참새를 선물 받은 나는 좀 당혹스러웠다. 참새의 목을 정확히 물어서인지 잠시 펄떡거리던 참새는 금방 축 늘어졌다. 고양이의 생리를 잘 모르긴 했지만 천적이 쥐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혹시 이 녀석에게 쥐를 선물 받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가 떠올랐다. 유럽을 순식간에 폐허로 만들었다는 쥐가 옮기는 그 병 페스트!
기우가 아니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얕은 수면에 들어 있던 나는 미닫이 방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고양이가 발로 문을 미는 소리였다. 내 머리맡에는 녀석을 위해 남겨 둔 곰보빵이 비닐 포장지에 들어 있었다. 평소에도 포장지를 뜯어 빵을 먹었기에 머리맡에서 들리는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철석같이 빵 먹는 소리라고 믿었다. 고양이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많이 먹으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내 이불속으로 고양이를 끌어들여 안고 잠이 들었다. 보송보송한 털이 그날따라 더 부드럽고 아늑했던 기억이다.
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머리맡에 놓아둔 안경을 손으로 더듬거렸다. 안경다리 대신 뭔가 길쭉한 검은 털이 손에 잡혔다. ‘이게 뭐지?’ 손에 잡힌 물체를 잘 보기 위해 가까이 들여다보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뱅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우리들은 학교에서 별별 과제를 다 받았다. 그중 가장 싫었던 과제가 있다. 쥐를 잡아 꼬리를 잘라 가져 가야 하는 숙제였다. 한 마디로 쥐꼬리는 내게 낯선 물체가 아니었다는 거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자 안채에서 셋째가 내 방으로 달려왔다. 무슨 엄청난 일이 생긴 줄 안 모양이었다. 고양이가 먹다 남긴 쥐의 머리와 꼬리를 보더니 손으로 집어 창문을 열고 골목으로 휙 던져 버렸다. 별거 아니라는 듯. 손까지 탁탁 털었다.
사건을 일으킨 고양이는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이미 마실을 나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날은 이불을 뜯어 빨고 방을 다 소독하다시피 하며 말 그대로 난리를 피웠다. 그날로 고양이는 내 방에서 퇴출당했다. 문고리를 잠가 다시는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이다. 매일 밤, 마실에서 돌아와 방문을 긁던 고양이는 곧 가출해도둑 냥이가 되었는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뒤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우리 집에 항의를 하러 오셨다. 제수용으로 장독대 위에서 말리던 생선을 이 집 고양이가 털어갔다는 항의셨다. 죄송하다고 했지만 다시 고양이를 방에 들여 재우는 건 안 될 일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쫓겨나 잠자리를 잃은 그 녀석이 마음에 걸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내 충격이 너무 커서 야박하게 굴 수밖에 없다는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양이에게 너는 집 고양이니 내가 주는 음식물만 먹고 절대로 쥐를 먹으면 안 된다는 약속을 받아 낼 수도 없고.
한 계절이 흘러 초여름이 되었다. 그날 밤은 조금 더웠다. 바람이 통하라고 골목 쪽 창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나는 무시무시한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탐정 소설을 보고 있었다. 살인 장면이 너무 리얼했다. 내가 가진 상상력 게이지가 저절로 높아졌다. 그때였다. 무심코 창밖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소름이 돋았다. 골목 맞은편 집 담장에 고양이 한 마리가 올라앉아 나를 보고 있었다. 어둠 속이라 고양이 눈에 켜진 불이 작은 헤드라이트처럼 보였다. 언제부터 나를 보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놀랐다. 물론 내가 기르던 고양이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늦은 밤 혼자 공포 소설을 읽다 눈에 불을 켠 고양이를 본다면?
그 이야기를 너무 실감 나게 한 모양이다. 아직 어린 1학년들은 거의 열광 수준이었다. 내 이야기보다 더 무섭고 재미있다는 말에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는 도서관으로 달려가 <검은 고양이>를 서로 빌리려고 아우성을 쳤다. 책을 읽히기 위한 미끼 이야기로 활용했지만 그날 밤 나의 공포도 상당했던 건 사실이다.
다행히 조부모님들은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별말씀이 없으셨다. 아무리 시끄럽게 떠들고 왁자하게 다툼을 벌여도 야단을 맞거나 혼이 난 기억이 없다. 조부모님들은 우리들의 시끄러운 싸움이나 다툼에도 손주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셔서 그저 예쁘게 보신 게 아닐까? 다행히 주변에서도 우리 집에 시끄러워 못 살겠다는 민원을 제기한 적은 없다. 우리 집 위치가 골목 입구라 왁자한 소리들이 다른 집에 영향을 덜 주었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