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기동 시절 이야기
친구 중 한 명은 성에 페스탈로치를 붙여 불렸다. ‘천생 선생’이라는 걸 누구나 인정했다는 의미다.
학교는 2월 중에 봄방학이 있다. 새 학기 학사 관련 업무들이 이 시기에 이루어진다. 그 해 내 업무는 교무 기획이었다. 덕분에 봄방학 내내 학교를 나가 신학기 관련 업무를 하고 있었다. 페스탈로치라 불리던 친구 역시 성적 관련 전산 업무를 마무리하러 거의 학교를 나왔다. 방학이라 학교 식당도 하지 않아 매일 점심을 매식으로 때워야 했다. 학교 업무를 추가로 한다고 무슨 점심 값이나 수당을 주지도 않던 때였다. 하루는 이 친구가 학교 식당에서 부침개와 수제비를 해 먹자고 제안했다. 이것저것 손이 갈 게 불 보듯 뻔한데 무슨 부침개냐며 그냥 사 먹자고 하는 데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각종 재료를 마련해 학교로 가지고 온 친구 혼자 수제비에 부침개까지 하게 하는 게 미안해 결국 팔을 걷어 부쳐야 했다.
“아니, 엄마가 해주는 밥이나 먹고 학교나 다녔을 거 같이 생겼는데 부침개를 왜 이렇게 잘하는 거야?”
친구 말 그대로다. 한두 번 해 봐서는 이런 솜씨가 나오지 않겠지. 무엇보다 어른 10여 명이 먹을 부침개를 그렇게 능숙하게 부치는 건 거의 고수라는 의미???
내가 집안일 하나 돕지 않고 자랐을 거라 착각한 이유가 있다. 당시 근무하던 학교는 국어 교사만 15명 정도였다. 그런데 학교 행사에 필요한 쓰기 관련 업무는 각종 이유로 나에게 몰빵 되었다. 교장님의 축사나 회고사, 졸업생 답사, 재학생 송사에 퇴직하시는 분의 고별사 등 각종 ‘사(辭)’자 종류는 당연히 내 일거리였다. 업무가 많은 교무 쪽 교사들은 학교 신문이나 교지 일은 빼주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그 일조차 내 업무였다.
툭하면 고개 쳐 박고 가정통신문 인사말 등을 쓰는 나를 질리게 봤으니 부엌일을 모를 거라는 오해가 가능했을 것이다. 본인이 쓰기와 거리가 먼 수학 교사라 더 그런 착각을 했을 수도 있다.
나는 일 년에 제사만 열몇 번인 집안 고명딸이라며 전이나 부침은 가벼운 일이라고 코웃음을 쳤었다.
우리 집은 식구만 아홉 명이었다. 가사도우미들을 구해도 식구들이 많아 힘들다며 수시로 나가버렸다. 그때마다 장사에 바쁜 엄마 대신 가족들의 삼시세끼 챙기기는 나에게 떨어졌다. 그게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학교를 다니며 집안 가사를 도우려면 손과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야 한다.
남자 형제들에 비해 공부 머리가 썩 좋지는 않다는 걸 자각하고 있던 탓에 집안일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집안일에서라도 머리 나쁘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 피할 수 있는 일들까지 우직할 정도로 했으니 말이다.
조부모님들은 우리 오 남매의 사생활에 대해 잔소리를 하신 적이 없다. 물론 우리들은 다른 집 아이들에 비해 특별히 말썽을 부리거나 공부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집안일 돕기도 다른 집 아이들보다 열심히 한다고 느끼셨을 것이다. 그 흔해 빠진 뺀질이들이 없었다.
엄마는 우리들 교육비로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셨지만 집에서 어떻게 생활하든 크게 걱정하지 않으셨다. 근거가 있다. 우리 집은 제기시장 상인들 자녀 중에서도 특출한 학업 성적을 자랑했다. 자식들의 학업 성취에 대한 엄마의 만족도가 아주 높았던 이유다. 그걸 은근히 자랑스러워하셨다. 본인의 고생을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정도였다고나 할까.
우리 할아버지는 뱅골에서도 사랑에 손님 들이는 걸 즐겨하셨던 분이다. 할아버지는 세 사람만 모여도 한 사람은 선생이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집에 누가 드나들어도 손자들의 친구라면 일체의 잔소리를 하시는 일이 없었다. 손자 친구들의 출입을 번잡스럽게 생각하시는 일은 꿈에도 하지 않으셨다. 할머니 역시 객식구가 수시로 드나들어도 별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엄마가 집에서 살림만 하셨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 조부모님들이 집에 계셨지만 손자들이 아무리 소란스럽게 굴어도 입도 뻥끗하지 않던 분들이다. 손자의 친구들에게도 불편한 언사를 하실 리 없었다. 종일 와서 먹고 놀아도 그저 사람 사는 집에 사람이 드나드는 걸 당연하게 여기시는 분위기셨다.
우리 집에 그렇게 자주 오빠 친구들이 드나든 이유를 나는 마음이 편해서였다고 생각한다. 부자는 아니라도 누구 눈치 안 보고 먹고 놀다 자고 가기도 할 수 있는 친구 집이 바로 우리 집이었다.
큰오빠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겨울에 태어난 뱀띠다. 작은 오빠는 양띠다. 사람마다 태어난 해에 따라 타고 나는 기운이 다른 모양이다. 나는 자주 그런 걸 느꼈다. 큰오빠 친구들은 정적이고 조용한 성품들이셨다. 작은 오빠 친구들은 잡기에 유별나게 능했다. 당연히 우리 집에 놀러 와 시간을 보내는 방식도 달랐다.
큰오빠 친구들은 제목대로 대부분 잠룡들이셨다. 용띠들은 아니지만 미래에 용이 될 출중한 능력들을 가지고 계셨다. 그분들은 따로 만날 약속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냥 발 가는 대로 우리 집에 와서 책을 보거나 혼자 바둑을 두었다. 나는 바둑이라면 오목이나 좀 둘까 하는 정도다.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분(나보다 적어도 5~6세 연상이니 이렇게 말한다)들은 몇 시간이고 바둑판 앞에 앉아 하 세월을 보냈다. 세월을 낚았다는 강태공이 따로 없었다.
기본적으로 식구가 많으니 누가 와서 같이 식사를 해도 거의 표시가 나지 않았다. 손님이 아무리 많아도 숟가락 하나 더 놓으면 된다는 계산법을 나는 그때 배웠다. 다행히 우리 집에 드나드는 분들은 먹성이 좋았다. 식사 시간이 지나 찬밥 밖에 없어도 괜찮았다. 찬밥에 김치를 총총 썰어 기름 조금 넣고 볶아줘도 남기지 않고 먹어 치웠다. 김치볶음밥이라고 이름까지 붙여 생색을 내는 데도 그걸로 한 끼를 기꺼이 때웠다. 계란이라도 하나 부쳐 올려 주면 고마울 지경이었다. 여름엔 수제비나 국수같이 대충 뭐라도 해서 주면 그냥 고맙게 먹고 갔다고나 할까.
엄마가 고대 식당 할머니에게 배워 오신 김치볶음밥에는 양파가 많이 들어간다. 지금도 나는 김치볶음밥에 다량의 양파를 넣는 습관이 있다. 그 시절 찬밥에 김치만 넣기 미안해 양파를 대량 넣어 맛을 냈기 때문이다. 내가 만들어 놓고 맛을 봐도 애매한 간편식들을 식구들은 물론 오빠 친구들도 군소리 없이 먹어주었다.
나는 음식 맛을 특별히 내거나 새로운 음식을 배우려는 의지가 거의 없다. 부엌에 들어가면 바로 감칠맛 나는 먹을 것이 나오는 마법은 엄마 한정이라고 생각한다. 부족한 재료도 엄마의 손을 거치면 별미로 거듭났다.
내 아들 둘은 할머니의 김치 맛을 구별한다. 그 탁월한 감칠맛을 흉내 낼 사람이 지금도 존재할까? 저절로 아쉬움이 생긴다. 제주에서 과학교사로 재직하는 조카딸 인하조차도 누가 맛난 음식을 만들었다고 하면 할머니 맛에 가깝다는 표현을 쓴다. 맛있는 음식의 표지가 할머니라는 의미다. 나는 먹는 것에 별난 관심을 가지는 타입이 아니다. 어디 책에서 소개하는 특별한 음식이 있다면 한 번 먹어볼까 하는 정도의 관심. 그냥 그 정도다. 그러니 내가 만드는 음식이 누구의 미감을 자극해 황홀한 맛을 내는 경지에 이르는 건 불가능하다. 아마 결코 이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순식간에 십여 명의 부침개를 해치울 수 있는 능력은 어디에서 왔을까. 간단하다. 연습이었다. 그것도 타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우리 집을 드나드신 분들은 모두 남자들이다. 어째 언니 한 명 데려오는 능력들도 없었는지? 당시는 중학교에도 남녀공학이 거의 없었다. 지금과 정반대다. 생각하면 그 시절 교육 당국은 촌스러운 사고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 남녀가 한 학교에 모여만 있어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우리 집도 여자라곤 나 혼자니 누가 주린 배를 채워주겠는가. 결국 그걸 순리로 받아들인 내가 집에 있는 재료로 되지도 않은 음식을 해 내올 수밖에.
설 명절이 되면 엄마는 가래떡을 해다 거의 산더미만큼 쟁이셨다. 가래떡은 냉장고가 후진 덕에 드럼통에 물을 채워 보관했다. 대보름까지 그건 우리의 주식이자 간식이었다. 떡국으로만 먹은 것이 아니다. 수시로 연탄불에 구워 조청을 찍어 먹었다. 쌀가루도 잔뜩 빻아서 부꾸미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셨다. 만두도 엄청난 양을 만들었다. 다만 만두는 하루 이틀 만에 우리들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두 오라버니 친구들이 올 때마다 떡국이나 부꾸미를 만들었다. 우려 둔 사골 국을 떠다 떡국을 끓이는 것도 많이 해 보니 저절로 손에 익게 되었다. 장독에 보관했던 차가운 동치미 국물과 배추김치에 떡국이나 부꾸미를 곁들여 먹던 시절. 그것으로 추위를 뚫고 우리 집으로 향했던 분들의 배는 제대로 채워졌을까. 교복 하나 걸쳤거나 방한이 제대로 되지 않은 옷들 밖에 없던 시절인데.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조차 고맙게 생각했을 거라 믿는다. 방풍이 제대로 되지 않아 황소바람이 들어오는 방이라도 연탄을 때는 아랫목은 언 몸을 녹일 만큼 따뜻했을 것이다. 거기에 마음 맞는 친구의 환대와 최소한이라도 배를 채울 수 있는 먹거리가 있었으니.
아버지를 보내드리는 장례식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코로나 여파로 일 년 전에 보내드린 엄마와는 달리 간소하게 장례식을 치렀다. 나만해도 친구들에게 거의 연락을 하지 않았다. 부고가 마음의 부담만 주는 민폐가 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런 자리인데도 우리 집을 드나들던 오빠의 오랜 지기들은 굳이 수원 빈센트 병원까지 문상을 왔다. 큰오빠도 퇴직을 했으니 당연히 동갑인 그분들도 퇴직을 하실 나이셨다. 나는 장례식장 입구 흡연실을 지나다 그야말로 그 오빠 중 한 분을 수십 년 만에 보게 되었다.
그분은 길지 않지만 내 생애 유일한 수학 과외를 해 주신 적이 있었다. 이종 사촌인 재영이와 그 오빠의 여동생과 함께 셋이서. 우리 학비에도 전전긍긍이신 엄마가 굳이 내 수학 성적을 걱정하시면서 과외까지 시키신 이유가 있다.(나는 엄마가 내 과외비를 부담했다고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 그런데 큰오빠는 두 군데서 전액 장학금을 받게 되어 형편이 어려운 친구에게 주고 대신 우리들의 과외를 부탁했단다.) 당시는 예비고사를 거쳐 대학별 시험이 따로 있었다. 문제는 국영수에 한 과목이라도 과락이 있으면 다른 과목 성적이 아무리 우수해도 탈락이었다는 점이다.
유별나게 내가 수학을 못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리고 깨달은 건 수학의 기본이 되는 시기를 내가 놓쳤다는 데 있었다. 그 시기가 바로 사거리 시절 3년간이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5학년까지 나는 공부에 완전히 손을 놓았다. 엄마 찾아 삼만 리 하던 시기니 공부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당시는 하루하루 내 감정 다스리기에도 힘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감정적인 혼란에 빠져 있던 사거리 시절은 수학의 기초를 닦는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사실 수십 년 만에 부딪친 사람과 무슨 대화를 하겠는가? 내 기억에 당시 그 오라버니는 대학교 3학년이셨다. 무엇보다 성균관 대학교의 총학생회장에 출마해 당선되신 것으로 기억한다. 공부만이 아니라 학교생활도 몹시 바쁜 분이셨는데도 우리들의 과외를 맡아 주셨다. 문제는 지지리도 내 수학 성적이 오르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여름 방학이 되어 그 오빠는 성균관대 학생들을 인솔해 그 어딘가로 농촌 봉사활동을 간다고 했다. 그리고 꼼꼼한 성격답게 우리에게 대학노트 한 권 분량의 수학 문제를 잔뜩 내주고 풀어놓으라며 약간의 협박성 멘트를 남기셨다.
수학은 지지리 못해도 입은 살아있던 난 ‘자기는 놀러 가면서 숙제는 많이 내준다’고 꿍얼거렸다. 그때 얼마나 매섭게 자신은 놀러 가는 게 아니라 농활이라며 우리를 혼내시던지. 돌아와 큰오빠에게 농활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는 데 엿들어 보니 놀러 간 게 아무래도 맞았다. 또 혼날까 봐 속으로만 툴툴대고 말았지만. 그런 추억으로 얽혀 있다 보니 이미 환갑이 지난 나이에도 여전히 내게는 어려운 오라버니셨다. 청년에서 노년으로 건너뛴 시간의 흐름이 그 오라버니의 얼굴에도 있었다. 별로 할 말이 없던 나는 의례적으로 퇴직을 하시고 요즘은 뭐하고 지내시느냐고 물었다.
- 나 석좌 교수야! 아직도 학교에서 프로젝트 맡아서 해. -
사실 나는 대학의 임용 제도나 승진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대외적으로 지명도가 있고 학교에 어느 정도 기여도가 인정되면 퇴직할 때 다 해 주는 게 석좌교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아! 석좌 교수요?’라며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큰오빠도 퇴직을 한 뒤 명예 교수가 됐다는 소리를 얼핏 들었기 때문이다.
- 얘 봐! 얘 봐! 성대 석좌 교수는 딱 두 명뿐이야! -
나는 순식간에 과거로 회귀했다. 싸가지를 밥 말아먹은듯한 중2들도 쥐락펴락하던 육십 넘은 전직 교사에서 지지리도 수학을 못하는 여고 2학년생으로. 오래된 열등감과 자괴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오빠가 한 정말 중요한 말을 그 순간 흘려들었다.
- 내가 왜 너희 집에 그렇게 자주 간 줄 아니? 배가 고파서였어. -
나는 그 순간 중요한 기회를 놓쳤다. 가난으로 힘들었던 시절에 받을 수밖에 없었을 상처에 대한 위로와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금도 명문 상아탑에서 쌓아 올리고 있는 높은 성과에 대한 경외 어린 칭찬의 기회를.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데다 오래된 열등감까지 더해진 내 실수였다. 나는 단순히 이렇게 생각했다. 코로나 와중에도 불구하고 굳이 아버지의 장례식장을 찾은 이유가 그거구나!
작은 아들의 연극영화과 진학이 확정된 얼마 후 일이다. 남편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배창호 감독을 만나러 갔다. 작은 아들이 입학한 학교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었기 때문이다. 건대 근처에서 만나 배 감독이 어린 시절을 보낸 뚝도 시장과 뚝섬 주변을 함께 산책하다 오래전 인사를 들었단다. 어려운 시절 과외비를 받으면 자신들에게 사줬던 자장면에 대한 인사를. 울산 촌구석에서 올라와 남편도 학비와 생활비를 과외비로 충당하던 시절이었는데도 친구들보다는 형편이 나았단다. 그때 남편도 고등학생이었다. 고등학생이 과외를 해 생활비를 벌어 친구들에게 자장면을 수시로 샀다니. 동창회에 나가면 판사나 의사가 된 친구들에게 그런 인사를 들었다고 했을 때는 흘려들었는데. 수십 년 후 아들의 은사가 될 친구를 만나 해야 했던 부탁의 무게가 갑자기 헐거워지는 걸 느낄 정도였다나.
너나없이 먹을 것조차 부족할 정도로 가난했던 학창 시절. 우리 집도 넉넉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고픈 배를 안고 가면 밥은 굶지 않을 수 있던 곳이었다. 그렇게 드나들었던 그분들은 대부분 유수한 학자로 명망 있는 교수님들로 성장하셨다. 우리 집에 가장 자주 오셨던 분은 세계일보 주필을 거쳐 사장까지 역임하셨다. 생계가 어려워 중학교 때부터 통일교 재단에서 자란 분이셨다.
얼마나 다행인가? 적어도 우리 집이 부족하지만 잠시라도 쉬었다 갈 수 있는 안식처가 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것도 어쩌면 우리 부모님 두 분이 베풀어주신 은덕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나는 얼마나 베풀고 살았나 하는 반성이 저절로 된다. 우리 오 남매의 성장 뒤에는 이런저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의 어려운 친구조차 선대 하신 부모님의 베푸심 덕이 분명 있을 텐데. 그 그늘에서 나고 자란 나는 과연 얼마나 그런 걸 본받고 살고 있나 싶은 자괴감이 살짝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