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오빠 친구들은 바둑 대신 기타를 치며 뚱땅거렸다. 할머니는 기타 소리를 그렇게 표현하셨다. 그래도 시끄럽다며 인상 쓰는 식구는 없었다. 덕분에 오가는 친구들의 마음은 편했을 거라 생각한다. 작은 오빠 친구들은 재주 많은 손오공들이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엄마의 견제가 만만치 않았다. 민망할 정도로 상당했다. 작은 오빠는 경동고등학교를 다닐 때 밴드부였다. 부모님은 천자문을 3살에 좔좔 암기하던 둘째 아들의 남다른 비상함 때문에 기대가 컸던 만큼 걱정도 많으셨다. 잡기에 더 많은 시간을 쓴다는 걱정을 하셨던 모양이다. 부모님 입장에서 그 문제는 친구 관계가 원인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친구들과 놀며 공부를 등한시한다는 우려를 자주 하셨으니 말이다.
우리 엄마가 가장 좋아하시던 가수는 조용필이다. 작은 오빠는 가수 조용필의 몇 년인가 후배였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 조용필 때문에 경동고 밴드부도 당시 고등학교들 중에서는 상당한 수준이었다나? 대학을 가겠다고 밴드부를 탈퇴할 때는 배신자라며 몽둥이찜질을 당했다고 알고 있다. 학교 동아리 탈퇴도 매 맞고 나와야 했다니. 지금은 이해가 안 갈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맞은 걸 문제 삼아 학교를 뒤집고 난리를 부리는 부모들이 없었다. 당장 우리 가족만 해도 밴드부에서 탈퇴시켜 준 것만 감지덕지했으니 말해 무엇하랴.
그 잠룡들과 손오공들은 제기동 우리 집을 어떻게 기억할까? 아마 나는 나름 따뜻한 추억으로 기억할 거라 믿는다. 사십 년 시간이 흐른 지금. 모두 왕성한 사회생활을 마치고 은퇴해 한숨 돌릴 여유가 생기셨을 터. 잠재된 능력들을 눈부시게 발휘하셨을 분들에게 제기동 우리 집이 고운 추억으로 남으셨기를.
두 동생은 중고교 시절에 친구들을 거의 집으로 데려오지 않았다. 오라버니들은 내가 동생이니 친구 뒤치다꺼리를 시켜도 별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동생들은 그래도 누님이니 눈치가 좀 보이지 않았을까.
셋째는 어렸을 때부터 주로 밖에 나가 놀았다. 초등학교 때는 동네에서 딱지나 구슬치기로 반지의 제왕 급 등극을 하며 나다녔다. 그때부터 우리는 셋째가 좀 별나다고 느꼈다. 더구나 내 위로 오빠 둘은 운동 능력이 부족(아버지는 우리들의 체육 성적 때문에 상심하실 정도였다)한 편이다. 하지만 셋째는 행동방식이 좀 남달랐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여가 시간 대부분을 학교 운동장에서 공차기로 보내기 시작했다. 셋째가 다니던 서울사대부중은 집에서 아주 가까웠다. 그러니 굳이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와 놀 일이 없었을 수도 있다. 경동 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취미 생활은 수학 문제 풀기와 축구였다. 초등학생 시절 딱지나 구슬치기 기술이 수학적인 재능과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수학에 대한 과신은 서울대 입시에서 고배를 마시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생각지도 않은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당시는 지원 대학별로 입학시험을 쳤다. 본인은 수학에 남달리 자신이 있었기에 별문제 없이 합격할 거라 믿었다. 아니 가족 모두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수학 1번 문제가 잘 안 풀리자 거기에 매달린 나머지 다른 문제를 풀 시간이 부족했단다. 그 일로 일 년 재수를 더했으니 안타까울 밖에.
나는 수학 없는 나라에 살고 싶다는 꿈을 꾸던 사람이다. 당연히 수학 문제 풀기가 취미인 동생을 솔직히 재수 없어한 적이 많다. 여러 가지 면에서 너무 차이가 심했다. 내가 밤새워 읽으며 재미있어하는 소설책들을 셋째는 수면용 베개로 썼다. 셋째가 하교 후에 학교에 남았다면 그건 둘 중 하나였다. 칠판을 반으로 갈라 동경대(?) 입시용 수학 문제를 누가 먼저 푸는지 친구와 겨루거나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거나.
셋째가 구한 문제들은 식을 여러 개 이용해 풀어야 한단다. 종이로는 공간이 모자라 공책이나 연습장 대신 칠판을 쓰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다나?
교복을 입고 운동장에서 매일 뛰고 뒹굴다 보니 옷의 상태가 얼마나 엉망이었을지 짐작될 것이다. 하루는 집에 와서 물걸레로 교복 바지를 슥슥 문지르더니 다림질을 하다 나에게 걸렸다. 평소엔 교복이 더럽거나 말거나 신경도 안 쓰더니. 아마 뒤늦게 사춘기가 온 모양이었다. 빨지도 않은 교복을 물걸레로 닦아 다림질까지 하면 먼지와 때가 들러붙어 번질거린다고 말려도 소용없었다.
막내는 학교에서 온갖 상장을 거둬들이는 일에 더 매진했다. 공부에 완전 재미를 붙인 것이다. 책상 서랍에 각종 대회와 시험으로 거둬들인 상장과 100점짜리 시험지를 모으면서 나름 충만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시험에서 백점을 맞는 게 낙이었다고나 할까.
막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얼마 후 일이다. 나는 청소를 한다며 막내가 모아 둔 중학교 때 시험지와 문제집 뭉치를 쓰레기로 처리했다. 막내는 그걸 다시 찾아오라며 난리를 부렸다.
교사가 된 후 전교 1등에 가깝게 공부를 잘하는 제자의 엄마들이 찾아와 하소연하는 소리를 듣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아들이나 딸의 지랄 맞은(?) 성격이 나중 사회생활을 하는 데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그때마다 웃으며 걱정 말라고 말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막내가 있었다. 내가 겪어봤기에 주장의 근거는 분명하다.
특이한 건 그 시절에도 막내는 상장이나 백 점짜리 시험지만이 아니라 뭔가를 모으기에 달인이었다. 각종 심부름으로 벌어들인 돈이나 용돈을 따로 비축(?)했다. 막내가 다닌 경희중학교는 집에서 걸어 다니기엔 만만치 않은 거리였다. 엄마에게는 꼬박꼬박 차비를 받아 챙겼다. 그리고 그 돈을 모았다. 형제들 중에 용돈이 궁하지 않은 사람은 막내뿐이었다. 그걸로 라디오나 축구공같이 제법 고가의 물품을 사들이기도 했다. 그렇게 사들인 물건이니 얼마나 애지중지했겠는가? 물건 자체를 아껴 쓰는 게 눈에 보였다.
손재주가 많아 분해나 조립을 좋아하는 작은 오빠도 막내의 물건에는 손을 대지 못했다. 잘못 만졌다 뭔 난리를 만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심지어 돈이 필요한 가족들에게 고리에 가까운 이자 놀이 비슷한 것을 했다. 가사도우미 누나에게도 그런 일을 저질렀다 엄마에게 엄청 혼나는 걸 봤으니 확실하다. 물론 들통이 난 건 우리들의 내부 고발이 아니었다. 우리 모두는 불법 대여 금고라 하더라도 그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아마 그 언니가 엄마에게 월급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어쩌다 알게 되신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하니 막내가 놀라며 반론을 제기했다. 막내의 기억은 나와 완전히 달랐다.
자신은 고리대금업을 한 게 아니라 오히려 형들에게 갈취를 당했다는 주장이었다. 그 말도 상당히 일리가 있다. 특히 용돈이 무한대로 필요했던 작은 오빠의 갈취가 심했단다. 모두 부족한 용돈을 쓰는데 급하면 그중 돈이 있을 듯한 막내를 거의 윽박질러 돈을 빌려가고 갚지 않을 수는 있었다고 생각된다. 말만 빌려가는 거지 돌려달란다고 쉽게 돌려줄 돈도 없었던 시절이니 말이다. 막내의 주장도 나름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이 문제로 다들 모였을 때 갑론을박이 있었다. 막내가 흥분해서 작은 오빠를 향해 '그때 형이 그랬잖아?' 하는데 작은 오빠의 침묵으로 보아 확실히 막내의 주장이 맞는 것 같다는 확신이 생겼다.
내 두 아들 중 막내의 비축 성향을 많이 닮은 녀석은 큰아들이다.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꼼꼼해서 막내를 많이 닮았다고 생각해 왔다. 아직 발군의 실력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가까운 미래에 자산가가 될 자질이 엿보인다고나 할까. 막내가 공무원의 길을 가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대단한 자산가가 되었을 거라고 난 지금도 믿고 있다.
막내의 친구들이 우리 집에 드나들기 시작한 것은 대학에 입학한 뒤이다. 막내가 서울대에 입학한 뒤에는 종종 친구들이 집에 등장했다. 그 무렵은 방배동을 거쳐 큰오빠가 공주대학교로 발령이 나자 남은 가족들이 안양 관양동의 작은 아파트로 이사한 시기였다. 작은 오빠마저 부산으로 발령이 나면서 본격적인 가족 해체가 시작되었다. 나는 교사 3년 차를 지나갈 때였다.
우리 집에 오는 학생들 중에 여학생도 있었다. 집에 사람이 없으면 베란다를 넘어 들어오기도 했다. 열쇠가 없을 때 그렇게 들어가면 된다고 막내가 가르쳐 준 모양이었다. 다행히 우리 집은 아파트 1층이었다. 막내 친구들은 심지어 관악산을 넘어 우리 집까지 걸어왔다. 말하자면 산을 타고 친구 집에 놀러 왔다고나 할까. 버스비도 아낄 겸 운동 삼아 그 방법도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80년대 초 서울대 생들의 가정형편도 몹시 어려웠다. 그래서인지 가끔 엄마가 집에 해 놓은 반찬이 통째로 없어지는 일이 생겼다. 막내에게 나중에 물어보면 혼자 자취하는 친구에게 가져다줬다고 했다. 엄마는 야단도 못 치셨다. 진간장 하나 놓고 밥을 먹는 친구들을 보면 뭐라도 가져다주고 싶은 마음이 왜 들지 않겠는가? 막내도 겉만 까칠하지 속은 물러 터졌다는 걸 식구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지방에서 올라와 자취를 하며 힘들게 버티는 친구들을 도우려 하지 않는다면 그건 사람답지 못한 거라고 우리는 이해했다. 그 친구들도 지금은 다들 사회 곳곳에서 자기 역할을 잘 해내며 살고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들처럼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을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