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밤새 찬바람이 불었다. 대지는 꽝꽝 얼어붙었다. 바람이 얼마나 매서운지 골목에 연해 있는 창문이 쉴 새 없이 덜컹거렸다. 누가 잡아서 흔들어댄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창문을 열어 골목을 내다보았다. 설핏 내린 싸라기눈이 바람결에 이리저리 날리는 게 보였다. 창가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다 바람 소리에 걱정이 되어 자꾸 밖을 내다보았다. 새벽시장을 가셔야 하는 엄마 걱정이었다.
엄마는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경동(청량리) 시장이나 용산 시장을 가셨다. 안방 문이 열리고 철로 만든 쪽대문 소리가 삐걱댄 다음에는 골목을 지나가는 엄마의 자박 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찬 겨울바람을 막을 옷이라고는 털스웨터와 목도리에 간편복인 몸빼가 전부였다. 털스웨터는 구멍이 숭숭 뚤려 말만 털이었다. 거의 방한이 되지 않았다.
잘 사는 집 사람들은 당시에도 양모로 만든 코트를 입고 다녔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는 언감생심이었다. 옷에 돈을 쓸 여유가 없었다. 특히 엄마 당신이 입을 옷을 마련하기 위해 쓸 돈은 필요 경비 맨 아래에도 끼지 못할 정도였다. 추우나 더우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 년에 쉬는 날이라야 다섯 손가락 정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악착같이 돈을 버신 이유는? 말해 무엇하랴.
나는 아직도 찬바람이 불며 골목골목에 내려 쌓이던 그날 밤의 싸라기눈을 기억한다. 지금도 가끔 제기동 집 방에서 그 새벽에 내다본 창밖 풍경을 떠올린다. 방풍은 잘 되지 않더라도 내 방바닥 아랫목은 연탄을 아끼지 않아 뜨끈뜨근 했었다.
오남매들이 지독하게 공부라는 걸 하게 된 배경에는 눈앞에 보이는 엄마의 무한 고생이 있었다. 물론 엄마는 자신의 고생을 알아주는 자식들이 있어 고생스럽지 않았다고 하셨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들 생각은 많이 달랐다. 엄마의 고생은 두고두고 죄책감을 가질 정도였다. 우리들의 겨울은 따뜻한 기억이 제법 많다. 그것에 비해 엄마의 겨울은 말 그대로 사투에 가까웠다. 칼바람이 부는 골목을 지나 꽤 걸어야 새벽 버스를 타는 정거장이 있었다. 종암 국민학교 후문 쪽을 지나 곧바로 내려가면 고려대학교 공과대학 인근에 있는 버스 정류장이었다. 그 부근에서 엄마는 날마다 새벽 버스를 타셨다. 지금 누구나 겨울이면 입는 두툼한 패딩은 구경하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그냥 털실로 짠 스웨터가 유일한 방한복이었다. 겨울 칼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그걸 여미신 채 다니셔야 했다.
엄마는 자주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용산이나 경동 시장으로 가는 새벽 버스를 타실 때 꼭 맨 앞좌석에만 앉으신다고.
당시 버스들은 냉난방 설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출입문이 있어 더 추운데도 맨 앞을 고집하신 이유에는 강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직접 내게 해 주신 이야기다.
- 자식들이 누구보다 앞에 서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라고. -
생선 한 마리를 사도 그 가게에서 가장 크고 싱싱한 놈으로 고르셨다. 돈을 더 주더라도 자식들에게 먹일 것을 싸구려 허드레로 사지 않았다고 하셨다. 자신은 시장에서 온갖 사람을 상대로 야채를 팔거나 추위로 고생을 해도 자식만은 남들에게 대접받는 자리에 우뚝 서기를 바라는 그런 염원. 내가 부모가 되니 엄마의 심정이 더 이해가 된다.
고등학생이 된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엄마가 새벽시장에 나가는 시간에 일어나 불을 켜고 책상에 앉았다. 다소 늦긴 했지만 내 성적이 수직으로 상승한 시기는 그때부터다. 남자 형제들도 학비가 저렴한 대학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그렇게 굳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번 돈으로 공부한다면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나도 기초가 부족해 영어나 수학에 고득점을 내지는 못했지만 암기와 이해를 중심으로 하는 과목은 점차 자신감을 회복해 갔다. 나중에는 책 한 권의 암기도 어렵지 않았다. 대학에 가서는 고등학교에서 익힌 암기 능력과 속독이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다.
우리들에게 암기는 익숙한 단어다. 당시만 해도 학교 공부는 주로 이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심지어 우리 집에서조차 이 방식이 지배적이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영어 교과서를 몽땅 암기하라고 강조하셨다.
큰오빠는 중학교 1학년 영어 선생님으로 아버지의 방식을 고수하는 분을 만났다고 했다. 그 선생님의 별명은 ‘미친개’였다. 그분은 영어 교과서를 몽땅 암기시키셨다. 수업시간에 아무나 지적해서 암기를 못하고 더듬거리면 커다란 손으로 바로 매타작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너!’라는 지적을 당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경험을 여러번 했단다. 지적 순간 무의식적으로 줄줄 나오게 암기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나.
그 선생님 덕분에 영어 교과서를 몽땅 암기했다고 했다. 지금이라면 무자비한 폭력 교사로 당장 교단에서 내려와야 할 일이다. 하지만 덕분에 영어로 해야 할 고생을 안 할 수 있었다는 게 큰오빠의 고백이다.
아버지의 방법을 온전히 받아들인 사람은 막내다. 중학교 영어 교과서 3권을 몽땅 암기해 날 놀라게 했다. 그 덕분에 고학년이 되어서는 영어에 고생을 하지 않은 것 같다. 막내는 대학에 입학해 선배에게 1:1로 배운 일어, 고등학교 제2 외국어로 배운 독어까지 3개 국어에 나름 출중한 실력을 쌓았다. 나는 그게 많이 부러웠다. 내가 석사 과정을 밟으면서 영어 시험 통과에 들인 노력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아마 암기 능력이 부족했으면 석사 학위를 받는 것도 힘들었을 것이다.
엄마의 고생은 장시간 노동만이 아니었다. 오남매 학자금 마련을 위해 엄마는 나름 아이디어를 짜내고 본인의 노동력을 활용하여 수익을 만드는데도 노력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더 큰 이익을 낼 수 있는 일을 꾸준히 찾으셨다. 나는 자주 엄마의 장사 머리에 대해 놀랐다. 단순히 수완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수완은 손님에게 불이익을 준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엄마의 경우는 그게 아니었다. 예를 들어 각종 조개를 사다 까서 파셨다. 또 무에 물을 들여 단무지도 만들어 파셨다. 손이 조금 더 가면 적어도 2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을 꾸준히 찾으신 것이다. 가끔 엄마의 손을 잡고 들여다보면 조개를 까느라 부르트고 상처난 손이 안쓰럽기만 했다. 장사를 하며 종일 뛰어다니느라 발바닥은 쩍쩍 갈라져 피가 나는 일이 잦았다. 발바닥 통증이 장난 아니게 심해져야 겨우 안티푸라민이나 글리세린을 사다 바르셨다. 거기에 평생 엄마를 따라다녔던 만성 두통까지. 두통이 얼마나 심하셨으면 하루에 두통약(사리돈)을 몇 개씩 삼킬 정도였다.
지금도 그 시절을 돌아보면 오 남매의 엄마로 살기가 얼마나 힘드셨을까 안타깝기만 하다.
좋은 부모의 조건이 뭘까? 나도 부모로 살면서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자식이 많으니 엄마는 나보다 더 이런 질문을 자주 하셨을 것이다. 자식들 문제로 원치 않는 선택 역시 수없이 하셨을 것이다. 그래도 어떤 것이 자식의 앞날을 위해 더 비전이 있는지에 대한 노력은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아무리 상황이 힘들어도 우리의 학업을 중단시키지 않으신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우리들의 학비 문제로 아버지와 다툼도 잦으셨다. 나만 열심히 노력한다고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도 엄마의 도전은 항상 자식들의 앞날과 비전에 있었던 건 분명하다. 그걸 위해 희생하고 노력을 마다하지 않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