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몽>을 쓴 서포 김만중은 유복자로 태어난다. 대대로 쟁쟁한 재상과 학자를 배출한 집안에 태어났지만 이미 가세는 많이 기울어진 상태였다. 그의 어머니 윤 씨도 명문가 출신이었다. 그러나 아들 둘만 가진 양반가 과부가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던 시대였다. 서포의 어머니는 당시 유일한 돈벌이 수단인 베짜기로 아들 둘을 키워냈다. 형제가 어렸을 때는 책을 빌려 필사해서 직접 가르쳤다. 다행히 두 아들은 모두 뛰어난 실력으로 관직에 올라 중요한 보직을 맡아 승승장구했다. 큰아들은 당시 왕이었던 숙종의 장인으로 부원군에 이르렀다. 둘째인 서포 역시 당대 빼어난 학자며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다. 두 아들을 훌륭하게 성장시킨 서포의 어머니는 천수를 누리며 잘 먹고 잘 사셨을까?
대학에 입학해 서포에 대해 공부하던 나는 그 어머니의 말년에 대해 안타까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람의 일생에서 초년이나 중년의 고생은 노년의 추억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말년에 고생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포는 하필 가정 문제 해결에 젬병이었던 숙종 때 정계에 진출한다. 때문에 경륜과 학식이 높더라도 피해 갈 수 없었던 당파 싸움의 희생자가 되어 유배지를 전전한다.
그의 대표적인 소설 <구운몽>의 집필 동기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벽지로만 귀양 다니는 아들 걱정에 눈물 마를 날 없던 늙은 어머니를 위해 <구운몽>을 썼단다. 아들의 효심 또한 만만치 않다. 나는 서포에 관련된 공부를 하면서 우리 엄마를 많이 생각했다. 손가락 마디마다 상처가 그칠 날이 없고 발바닥이 갈라져 피가 나도록 노력하신 엄마의 노동도 서포의 어머니 못지않으셨다.
서포의 어린 시절 어머니 윤 씨는 봇짐장수가 툇마루에 펴놓은 책 앞에 형제가 다가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걸 본다. 그 순간 베틀에서 짜고 있던 삼베를 가위로 싹둑 잘라 당장 그 책을 사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당시 사람의 손으로 짜야하는 삼베는 고가에 팔렸다.
우리 엄마는 어떠셨을까?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식이 배우겠다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서포의 어머니처럼 값의 고하를 막론하고 바로 행동하셨다.
우리 오 남매는 모두 엄마에게 일종의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다. 엄마는 웬만한 집안의 대소사에 대한 결정에 대해서는 아버지 의견에 따르시는 편이셨다. 그러나 자식의 학업과 관련된 문제에서는 결코 양보나 타협을 하지 않으셨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 시간이 지나면 후회하지 않을 결과가 있다고 믿으신 것 같다. 그러니 그런 혹독한 시간도 감내하신 게 아닐까? 우리들은 지금도 엄마가 아니었으면 모두 대학을 다니는 건 꿈도 못 꾸었을 거라고 말한다. 왜 대학을 나오신 아버지보다 여학교를 중퇴하신 엄마의 영향력을 더 강하게 느끼는 걸까?
나 역시 살아오면서 경제적으로 힘든 상태에 처한 적이 있었다. 아들들 문제로 힘겨운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아무리 힘들어도 엄마의 제기동 시절과는 비교 불가하다는 깨달음이었다. 내가 하는 고생은 손가락 마디마디가 변형되고 발바닥이 다 터져 피가 나올 정도의 노동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경제적인 상황이 긴박해서 두통으로 어지러울 정도 역시 아니었다.
엄마가 딸인 나를 끝까지 공부시키신 이유는 적어도 본인과 같은 노동과 경제적인 어려움을 감내할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장 크셨을 것이다. 그래서 딸이 중학교 선생이라는 사실을 얼마나 자랑하시는지 알기에 내 직업에 대한 자존감이 그렇게 높았던 게 아닐까? 때로 교육 현장에서 내 자존감을 갉아먹고 눈물을 삼키게 하는 일 앞에서도 그렇게 당당하게 견디고 열심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나갈 수 있었다. 그런 엄마의 후원을 누가 외면할 수 있는가? 이게 딸인 내 본심이다.
엄마가 처음으로 자신의 생일을 챙기신 해가 있었다. 집안의 어른이신 할머니까지 돌아가신 이듬해였던 것 같다. 큰 아들은 결혼을 했고 나는 임용고시에 합격해 교사로 임용되었다. 셋째는 그렇게 원하던 서울대에 합격해 입학했다. 며느리도 들인 데다 줄줄이 집안에 좋은 일이 생겼으니 그해 생일은 그냥 지나가지 말라는 시장 주변 이웃들의 권유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안방에서 생일상에 앉아 음식을 드시던 주변 친구 분들이 인사를 하는 내게 갑자기 엄마 생신 축하 노래를 한 곡 청하셨다. 흔한 ‘해피 버스 데이’가 아니라 다른 곡으로 말이다. 새내기 교사로 대중 앞에 서는 일에 제법 뻔뻔해지고 있기는 했지만 지금 기억해도 많이 당혹스러워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갑자기 닥친 일이라 선곡이 문제였다. 그래도 할 수 없이 엄마의 생일에 노래를 한 곡 불렀다.
고등학교에서 배운 이 노래는 가끔 마음이 울적하면 혼자 흥얼거리던 가곡이었다. 생신 노래로 적절한지 아닌지 잠시 머리를 굴린 것 같다. 당시 유행하는 가요는 가사를 끝까지 기억하지 못할까 봐 대신 이 노래를 불렀다. 내가 불러드린 노래는 <님이 오시는지>다.
물망초 꿈꾸는 강가를 돌아
달빛 먼 길 님이 오시는가.
갈 숲에 이는 바람 그대 발자췬가.
흐르는 물소리 님의 노래인가
내 마음 외로워 한 없이 떠돌고
새벽이 오려는지 바람만 차오네
백합화 꿈꾸는 들녘을 지나
달빛 먼 길 내님이 오시는가.
풀물에 배인 치마 끌고 오는 소리
꽃향기 헤치며 님이 오시는가.
내 마음 떨리어 끝없이 헤매고
새벽이 오려는지 바람이 이네
바람이 이네
나는 엄마에 대한 고마움을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았다. 그런 내가 엄마의 생일에 노래를 불러드린 것은 이게 유일하다. 부모의 생일을 거의 의무로 알고 지냈으니 당연하긴 하다. 그러나 그 일이 지금에 와서 마음에 사무칠 정도일지는 몰랐다. 노래를 가만히 들으시면서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남들이 뭐라고 해도 딸을 대학에 보내고 선생님까지 만들었으니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셨을까.
우리들은 나날이 성장하고 사회에서 자기 자리를 만들어가는 시기였지만 엄마의 당시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막내 삼촌이 하시던 제본소를 아버지가 맡으시면서 수원 상회는 엄마 혼자 운영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가게 운영은 물론 가족들 부양에 대한 책임을 전부 엄마에게 넘기셨다. 게다가 아버지는 툭하면 엄마에게 ‘집안 식구들은 네 식구. 공장 식구들은 내 식구’라고 하셨다. 이미 오래전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도 딸인 내게 하소연하신 엄마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엄마가 그 말을 하실 때 섭섭해하시던 어조와 한숨 소리까지 기억할 정도로. 엄마가 얼마나 많은 걸 보듬어 안고 참아 가며 사셨는지….
더 나중 일이다. 한 번은 엄마와 우리 집에서 가족 드라마를 함께 본 적이 있다. 여운계 씨가 나이 든 엄마 역이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여운계 씨가 마지막 생일을 가족과 함께 보내면서 노래를 한 곡 한다. 여학교 때부터 즐겨 불렀다는 멘트와 함께 부르던 노래는 <메기의 추억>이었다.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매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물레방아 소리 들린다 매기 아 매기 희미한 옛 생각
동산 수풀은 없어지고 장미화는 피어 만발하였다
물레방아 소리 그쳤다 매기 내 사랑하는 매기야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매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물레방아 소리 들린다 매기 아 내 희미한 옛 생각
지금 우리는 늙어지고 매기 머린 백발이 다 되었네.
옛날의 노래를 부르자 매기 내 사랑하는 매기야 내
사랑하는 매기야.
그 장면을 보시면서 엄마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도 가족들 앞에서 저런 노래를 불러봤으면 좋겠다고. 무심한 딸은 그 부러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는 했다. 그냥 말없이 앉아 있었다. 적어도 그 순간 엄마에게 그 노래를 가르쳐 드리겠다는 말이라도 했어야 했다. 엄마에게 <매기의 추억>은 여학교라도 끝까지 다닌 사람들만 부를 수 있는 수준 높은 노래였다. 본인처럼 중간에 그만두는 일 없이 말이다.
가족들이 모였을 때 오래 자식들 기억에 남을 노래 하나 불러본 적이 없다는 것에 대한 쓸쓸함을 담은 말이었는데. 부러움 담긴 그 마음을 분명 내가 읽은 것 같은 데 영민한 엄마에게 그 노래를 가르쳐 드릴 생각은 왜 하지 못했을까? 그게 어려운 일은 분명 아니었을 텐데. 이미 돌아가신 뒤에 이런 것까지 후회가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사람들이 부모님을 여의면 마음으로든 글로든 다양한 사모곡을 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힘들고 괴로운 일이 생기면 왜 나를 낳았냐며 앙칼진 소리로 부모에게 원망도 할 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닥치는 어려움을 무엇으로 극복할까? 고난을 오히려 도움닫기로 생각하는 진취적인 사람들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을까?
우리 오 남매도 살아오면서 갖가지 고난에 맞서야 했다.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래로 씩씩하게 나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우리들의 엄마가 있었다. 자식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고 깊은 사랑으로 헌신한.
그런 엄마를 부모로 가진 우리야말로 진정한 행운아들이다. 그저 우리들에게 이런 엄마를 주셔서 신에게도 고맙고 감사하다. 우리 엄마 용인 이 씨 이순상 여사님! 아직은 엄마를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핑그르르 돌고 가슴이 일렁거려도 그 은덕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