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곡 3

by 권영순

제기동 집은 우리 오 남매가 사춘기를 거쳐 대학생 시절을 보내고 사회인이 되기까지의 추억을 오롯이 간직한 곳이다. 나 역시 초등학교 6학년부터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임용되기까지의 시간을 제기동에서 보냈다. 오 남매가 자라는 동안 나름의 흑역사들도 만만치 않게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피식 웃음을 흘릴 추억 또한 넘치게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제법 시간이 흐른 뒤 제기동 집 근처를 일부러 지나가 본 적이 있다. 우리가 살던 집은 오래전 철거되고 넓은 도로로 바뀌어 있었다. 수없이 드나들었던 정겨운 골목도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이상한 곳에 와서 길을 잃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은 것을 가져갔지만 우리들 기억까지 가져가진 못한 모양이다. 아직도 그 집의 세세한 곳까지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재현해 낼 수 있으니 말이다.


녹이 슬어 삐꺽거리는 철 대문을 열고 골목을 나서 조금만 내려오면 우물가 건너에 작은 슈퍼가 있었다. 거긴 내 친구네 집이기도 했다. 큰오빠가 결혼을 하고 조카 여경이와 인하가 연년생으로 태어났다. 여경이는 남자 아이라 비교적 조용한 편이었다. 오랫동안 아기가 없던 집안이 여경이로 인해 활기가 생겼다.

여경이와 제기동 집의 어렴풋한 기억 중 하나는 오목을 두던 풍경이다. 할아버지와의 내기에도 연전연패였는데 어린 조카에게도 연전연패하는 일 때문에 어찌나 민망했는지. 오목을 두면서 훈수는 물론 어린아이답지 않게 물러주기까지 했는데도 결과는 별 차이가 없었다. 그 시절부터 나는 여경이의 뛰어난 지력을 인정했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하는 막내보다 더 재수 없는(?) 인간의 탄생이라고 속으로 혀를 찼다.

지금은 베트남 한국섬유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노력도 많이 했겠지만 영어와 일어 중국어 거기다 베트남어까지 몇 개 외국어를 구사해서인지 대체 불가능한 수준인 모양이다.


조카딸 인하는 우리 집안에 드물게 태어난 여자애라 더 특별하게 느꼈다. 타고난 활기와 애교로 곧 가족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시작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외모보다 우리를 더 열광시킨 건 상상을 초월하는 엉뚱함이었다.

인하가 걷기 시작하면서 가끔 집에서 사라지는 일이 생겼다. 굳이 먼 곳을 찾으러 다닐 필요도 없었다. 내 친구네 가게 아이스크림 통 앞에 손가락을 빨며 홀린 듯 서 있을 가능성이 컸으니까. 지금처럼 차량 통행이 잦으면 기겁을 했겠지만 당시는 차량 통행이 별로 없어 다행이었다.


어느 날은 아이스크림을 물고 집에 왔길래 제 엄마가 어디서 났느냐고 물었더니 슈퍼 아저씨가 줬다고 했단다. 가게에 가서 물어보니 꼬마 아가씨가 손가락을 빨며 아이스크림 통 앞을 벗어나지 않고 한참을 서 있어 보다 못해 하나 줬다고 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아이스크림을 지금은 거들떠도 안 보니 거기에도 세월의 흐름이 있나 보다. 사람의 행동이나 마음을 완전히 바꿀 정도로 긴 시간의 흐름이.

지금은 제주에서 여고 과학교사로 열일을 하며 재직하고 있다.


아현중에 임용된 첫 해 겨울이었다.

조카 여경이와 둘이 달고나 뽑기를 하다 제자에게 걸려 민망한 꼴을 연출한 적이 있다. 종암 국민학교 교문 근처 햇볕 잘 드는 담벼락 아래에는 달고나 뽑기를 파는 아저씨가 상주했다. 국자에 설탕과 소다를 넣고 끓여 넓적한 판에 붓고 별모양 등을 찍어 모양대로 실수 없이 떼어 내면 하나 더 뽑게 해 주었다. 일명 뽑기다. 물론 하나 더 뽑을 일이 거의 없는 게 함정이지만. 그 정도로 어려웠다. 무엇보다 뽑기는 당시에도 불량식품의 대명사였다. 거기서 어린 여경이와 쪼그리고 앉아 뽑기를 하는데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제자에게 걸렸다. 부임한 학교가 제기동과는 거리가 먼 아현동이라 마음 놓고 했는데.

그 탓에 입막음을 위해 제자에게 먹을 것으로 회유(?)했다. 다행히 소문은 나지 않았다. 중3이었던 그 남학생 녀석의 능청맞은 놀림이 지금도 선하게 떠오른다.


제기동을 떠나기 전 우리 집은 여러 변화가 생겼다. 나는 학생에서 교사로 다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집안 경제의 심각한 변화에 민감하지 못했다. 내가 초임 발령을 받은 학교는 일명 귀빈로로 불리는 마포대교 주변이었다. 1981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대통령은 유독 해외 국빈 방문을 좋아했다. 무엇보다 수시로 귀빈로를 오가며 학생들을 동원해 태극기를 흔들며 환송받기를 즐겼다. 토요일 일요일도 동원되는 학생들 인솔을 위해 교사들이 시간과 관계없이 출근을 하거나 퇴근을 미뤄야 했다. 그때는 초과 근무나 휴일 근무 수당도 없었다. 밤늦게 근무해야 할 일이 생겨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에 근무하던 5년은 이런 유형의 근무를 수시로 했다.


연좌제로 큰오빠가 국립대 전임강사 발령에 문제가 생긴 것처럼 나도 임용될 때 문제가 있었다. 3월 초에 발령을 받았는데 두 달이 지나가도록 발령장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신원조회에 걸렸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나에 대한 보고가 수시로 교장을 통해 정보기관에 보고되었다는 사실도. 추측이 아니라 직접 교장에게 불려 가 들었으니 합리적 의심이다.


아버지의 일 년도 안 되는 청년 시절 과거는 수십 년이 지난 뒤 자녀들의 삶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두 달 가까이 월급도 없이 근무만 했던 억울함도 어디 가서 하소연하기 힘든. 임용이 취소될까 봐 오히려 전전긍긍했다. 사회에는 다양하고 엄청난 변혁이 일어나던 때였음에도 이런 문제는 사람들을 옥죄기 위한 수단으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사회 곳곳에 드리웠던 연좌제의 그늘이 없어지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앞에서 나는 엄마가 어떻게 수원 상회를 운영하고 얼마나 힘들게 집을 마련하셨는지 이야기했다. 그렇게 힘겹게 얻은 수원 상회와 제기동 집이 모두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된 이유는 대충 이렇게 알고 있다. 막내 외삼촌이 경영하시던 양동사라는 이름의 제본소를 어떤 연유인지 아버지가 인수하게 되었다. 외삼촌이 거래처와 함께 공장을 아버지에게 넘긴 것이다. 외삼촌은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힘겹게 사는 우리 엄마를 위해 무언가를 해 주시려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외삼촌이 잘못 본 것이 있다. 우리 아버지는 장사를 하던 사업을 하던 그 일에 적절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거다.


제기시장에서 수원 상회를 운영하실 때도 두 분의 다툼은 아버지의 답답한 고집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았다. 엄마는 나름 이재에 밝은 편이었다. 세상의 변화에도 민감하셨다. 단골손님들도 엄마가 자리를 비우고 아버지 혼자 계시면 물건을 사러 왔다 그냥 갈 정도였다. 엄마가 새벽시장을 굳이 다니신 이유도 물건을 보는 안목이 아버지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좋은 채소들을 보는 엄마의 안목에 놀랄 때가 많았다. 그냥 눈으로 보기만 해도 더 맛있는 채소들이 구분되신다고 해야 할까?


단골들은 엄마의 물건을 말 그대로 믿었다. 제사만 십 수번에 해당하는 종가 집 맏며느리의 각종 레시피도 엄마의 장사 강점이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레시피를 손쉽게 찾을 수 없던 시절 엄마의 손맛과 입담은 손님들을 매혹시켰다. 입맛이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손님들도 엄마를 많이 좋아하셨다. 그게 엄마의 장사 비결이었다.

물건을 사러 오는 손님들을 대할 때도 엄마는 기민하게 대처하셨다. 물건을 꼭 살 사람인지 아닌지를 파악하는 능력이나 소통 역시 아버지는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시는구나 싶은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직접 장사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런 장면을 수시로 목격했다. 심지어 다른 곳으로 갔던 사람도 결국 되돌아와 엄마의 물건을 사는 걸 말이다. 우리가 봐도 아버지는 그런 소양이 부족하셨다. 그냥 공무원이나 연구원 아니면 학자 등 혼자 하는 일을 해야 할 사람이 엉뚱하게 혼란의 시대에 원치도 않고 소양도 없는 장사와 사업에 내몰려야 했다고 보는 게 적절할 것이다.


오 남매가 얻은 교육의 기회를 100으로 본다면 나는 80 이상을 엄마가 제공했다고 본다. 엄마 자신의 능력과 확고한 자녀 교육에 대한 신념 덕분에 우리는 모두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덕분에 사회에 나가 꿀리지 않고 독립적인 삶의 터전을 만드는 게 가능했다.


나는 무슨 돈으로 외삼촌의 제본소를 인수했는지는 잘 몰랐다. 큰오빠는 양동사를 인수하기 위해 뱅골 집과 남아 있던 논밭을 정리한 걸로 알고 있었다. 아마 그랬을 수도 있다.


그 와중에 제기시장은 재래시장에서 커다란 단독 건물로 재건축되었다. 수원 상회 역시 밝은 지상에서 지하처럼 어둑한 곳으로 이사해야 했다. 그 수원 상회와 제기동 집이 어느 순간 모두 남의 손에 넘어가고 있었다는 걸 나는 잘 몰랐다. 아마 제본소에 들어가는 자본 마련과 운영비에 엄마의 안타까운 노력과 결실들이 허무하게 사라졌음을 짐작할 뿐이다.

이런 와중에 무슨 돈인지 엄마는 사기도 당하셨다. 뱅골 시절 한 동네 살던 친인척 중 한 명이 엄마에게 돈을 빌려가 끝내 갚지 않은 것이다. 그 돈을 받기 위해 많이 노력하셨지만 결국 조금도 돌려받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은 이런 경우 적절하려나.

제본소 운영은 들인 노력과 투자에도 완전히 빈손이 되었다. 외삼촌이 제본소를 아버지에게 넘기실 때 흑자를 내는 게 아니었던 건 분명하다. 손을 털고 싶으나 적당한 사람이 없어 조금 쉬운 아버지에게 넘겼다고 보는 게 내 짐작만은 아니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책임을 온전히 외삼촌에게 지우기에 무리가 있다는 걸 나는 아버지만 잘 이해하지 못하셨다고 본다.

제본소를 운영할 때 가장 혹사를 많이 당한 사람은 작은 오빠였다. 지금도 막내는 그 일에 대해 아버지에게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큰오빠는 결혼을 한 데다 대학원을 다니고 곧 여기저기 출강을 하면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어 끌어다 일을 시키지는 못한 것 같다. 아직 대학생인 작은 오빠는 아버지의 성화를 이기지 못해 제본소에 자주 불려 가 힘든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기동 집을 떠나 서초동 꽃마을로 이사를 올 때 다행이었던 일은 조부모님 두 분이 타계한 뒤였다는 거다. 우리들 역시 하나씩 취업을 했다. 가족들이 굶주릴 정도의 위기에서도 조금씩 벗어났다. 엄마는 서울고등학교 근처 꽃마을로 이사를 결정하셨다. 대가족이 살만한 공간을 비교적 저렴한 서초동 전셋집에서 찾으신 것이다. 그리고 대치동 청실 아파트 근처에서 혼자 야채 노점상을 시작하셨다. 가족의 생계가 아직은 엄마의 손에 많이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사 갔을 당시 서초동은 지금과 같은 초현대적인 강남의 모습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비닐하우스가 산재해 있었다. 신축 건물인 그 집 이층에 산 기간은 그렇게 길지 않다. 큰 오빠 가족이 공주 장기로 단칸방을 얻어 독립을 했기 때문이다. 공주 읍내도 아니고 깡 시골로 들어가 버스로 출퇴근을 해야 했던 그 어려운 시절의 모습을 뭐라고 말하겠는가? 다만 국립대 전임강사로 부임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을까? 오빠의 독립에 도움을 줄만한 여윳돈도 아버지의 사업 자금으로 날린 탓이었다.


우리 오 남매는 독립 자금 일부라도 집에서 지원받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오 남매 모두 보증금도 거의 없는 사글세로 살림을 시작했다. 그 당시 이런 게 아무리 대세였다고는 하지만 조금 여유 있게 출발하는 친구들을 보면 부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아버지의 경제에 대한 이해와 능력 부족에 안타까움이 남은 건 아니다. 그냥 아버지의 삶도 만만치 않았다는 건 이해가 된다. 다만 그걸 엄마에게 떠넘기듯 실패의 책임을 지우고 심지어 마음의 상처를 주신 잘못을 지금은 아실까?

치매와 기력 부족으로 엄마는 마지막을 요양병원에서 마치셨다. 이미 많은 것을 잊으신 상태였는데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잊지 못하고 계시는구나 싶었던 날이 있었다. 아버지의 말에 깊은 상처를 입고 계셨던 것이다. 본인 연령대의 다른 분들은 한글도 계산도 일본어도 전혀 모르는데 그렇지 않은 자신을 아버지가 평생 무시했다고 원망하셨다.


나도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힘들게 내 자리를 지켰다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눈물까지 흘리며 큰 소리로 하소연하시던 잔상 때문에 요양병원 면회를 마치고 돌아오며 내내 우울했던 기억이 지금도 가끔 떠오른다.


가르시아 로르카 지음 제목 모름

은빛 백양나무들이

물 위에 고개를 숙이고 있네.

그들은 다 알지만 결코 말은 하지 않으리.

연못의 백합은

자신의 슬픔을 외치지 않네.

모든 것이 인간보다 고귀하도다!

별빛 반짝이는 하늘 앞 침묵의 지식은

꽃과 벌레만이 소유한 것.

노래하기 위해서 노래하는 지식은

중얼대는 숲들과

바닷물만의 것.

대지의 생명에 대한 깊은 침묵은

장미 덤불에 활짝 핀 장미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

우리는 우리 영혼이 안에 가둬둔

향기를 자유로이 풍겨야 하리!

우리 모든 것이 노래고

빛이고 선함이어야 한다.

우리 활짝 가슴을 열고

검은 밤 앞에서

불멸의 이슬로 자신을 채워야 하리!

우리 육체를 불안한 영혼 속에

잠들게 해야 하리!

저 너머의 빛을 보지 않게 눈을 가려야 하리.

우리 가슴의 그늘을

자세히 바라보고

사탄이 뿌린 별들을 솎아내야 하리.

우리는 항상 기도하고 있는

나무처럼 되어야 하리.

영원 속에 자리 잡은

물길 속 물처럼 되어야 하리.

슬픔의 발톱으로 영혼을 파내어

별 가득한 수평선의 화염이

들어오게 하여라!

좀먹은 사랑의 그림자에서

어머니같이 자애롭고 고요한

여명의 샘물이 솟아나리.

도시들은 바람 속에서 사라지리.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께서

구름 위를 지나시는 모습을 보게 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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