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포리 산에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가 정착을 결심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벽돌이나 철골 등이 들어간 집을 지을 수는 없었다. 녹지였기 때문에 건축 허가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농장을 관리할 관사 정도로만 지어야 했다.
정식 주택은 아니라도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에 필요한 것은 많다. 집과 창고를 짓고 비닐하우스에 원두막 설치까지 마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그 과정에 애를 많이 쓴 사람은 작은 오빠였다. 큰오빠의 돈도 많이 들었다. 두 오빠 덕에 엄마와 아버지는 화성 구포리에 그런대로 번듯한 내 집을 가지게 되셨다. 아버지가 끌고 다니실 차도 작은 오빠가 마련해 드렸다. 아버지는 그 차로 직접 기르신 농산물 판매나 공주 등 지방도 다니시고 동네 사람들과 놀이도 가셨다. 스타렉스였기에 여러 사람이 함께 탈 수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어느 날 구포리 집에 가 보니 오디오 기기와 노래방까지 완비되어 있었다. 조용필 시디와 노래 테이프도 있었다.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는 조용필이다. 엄마를 위한 배려에 가족들 모임까지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도 가끔 그곳에서 조용필의 ‘한 오백 년’을 들었다. 조용필 노래를 따라 부르시던 엄마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장손자 여경이가 유치원 때 소풍을 가서 일이다. 장기자랑 시간에 부른 노래는 조용필의 ‘고추잠자리’였다. 그 이야기는 공주에서 여러 사람들 입에 회자되었단다. 제법 알려진 한문과 교수 아들이 소풍 가서 부른 노래가 뭔지 아느냐고? 가족의 영향력이 아니었을까? 조손이 같은 가수를 좋아하니 얼마나 보기 아름다운가.
엄마가 부지런히 이것저것 들이면서 모양을 갖춰갔다. 그러나 내가 아쉬워한 것은 다른 면이었다. 적어도 창고와 집의 위치가 바뀌었으면 좋았을 것 같았다. 땅은 우리 땅이었다. 우리가 서울에 살 때 허락도 없이 산소를 쓴 모양이었다. 그 산소에 붙여 집을 지어 마음이 안 좋았다. 왜 그런 결정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아버지 의사가 그대로 반영되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산소를 옮겨달라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집 아래 있는데도 그들은 그 산소를 끝까지 옮기지 않았다. 30년 동안.
나중에 그곳이 수용되어 보상을 받는다고 하니 바로 이전했다.
밤이 되면 민가에서 좀 떨어진 곳이라 아주 적막했다. 물론 근처 인가 여기저기 불빛이 있고 신작로도 멀지 않았다. 다행히 먼 일가가 집 아래에 ‘왕재봉’이라는 번듯한 한정식을 차리고 들어왔다. 택지가 수용되어 보상을 받아 녹지에 주택을 지을 수 있었단다. 집은 인천이라고 했다. 그 집에는 발레를 하는 딸이 있었다. 그 아이가 우연히 밤을 주우러 우리 산으로 들어왔길래 말을 걸어 본 적이 있었다. 예중에 다닌다고 했다. 보통 사람과 걸음걸이가 달라 물어봤더니 구김살 없이 대답해 주었다. 발레를 하는 사람들은 춤추듯이 가볍게 걷는다. 그 여학생은 고등학교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고 했다. 엄마가 나중에 전한 말에 의하면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단다. 너무 안타까웠다.
주변에 만만한 음식점이 없어 우리들은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에 그 집에서 가족 모임을 가졌다.
큰오빠는 “ ‘왕재골’은 사거리 슈퍼 둘째 딸이 하던 거야. 내 초등학교 여자 동창 동생인데 나중에 언니한테 넘겨 그 사람이 하다가 말았어.” 라며 가게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인근 비봉면사무소만이 아니라 안산이나 반월 방향으로 지나가던 차량들도 그 집에 꽤 드나들었던 기억이다. 그러나 딸의 죽음으로 정신적 타격을 받아서인지 주인의 발걸음이 줄어드는 모양새였다. 가게는 주인의 사랑을 잃어서인지 점차 쇠락해 갔다.
폐업 후 한동안 비어있던 그곳은 누군가에게 팔렸는지 '정오'라는 이름으로 재개장했다. 이름을 바꾼 초기에는 조경 등 주변 시설도 제법 많이 꾸며 보기 좋았다. 그네 등도 설치하고 매화나무 등도 심었었다.
그러나 토지가 수용될 무렵 지붕재는 삭아 떨어져 나가고 황폐해져 시간의 흐름만 여기저기 보였다. 주인이 관리하지 않는 집이 어떻게 소멸되는 지를 절감할 뿐이었다.
우리 집은 방 하나에 거실과 주방이 딸린 소형 주택이었지만 컨테이너 생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나는 두 아들을 데리고 컨테이너에서 잠을 자 본 적이 있다. 집을 짓기 전 겨울이었다. 막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 둘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 가기 위해 사거리로 버스를 타러 나섰다. 굳이 눈길을 나서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둑해져 가는 눈길을 조심조심 어린 둘을 데리고 걸었다. 과거 상엿집이 있던 근처에 가로등 하나가 불을 환히 밝히고 서 있었다. 가로등 불빛에 눈발이 이리저리 나부끼며 떨어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쏟아지는 눈에 비봉에서 사거리로 내려오는 도로는 차들로 꽉 막혀 있어 언제 집에 도착할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흩날리는 눈발에도 마음이 이렇게 따뜻해지다니. 환한 가로등 아래에서 주변 눈밭을 뛰어다니는 두 아들을 보며 ‘이 순간도 나쁘지 않구나, 이것도 추억이 되겠구나.’ 싶어 한참을 서 있었다.
아들 둘이 어릴 때는 구포리 산에 자주 데려갔다. 특히 여름방학이 되면 많은 시간을 거기서 보냈다. 서울 우리 집의 비좁은 공간 때문이기도 했지만 두 분만 계시니 자주 다니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곳은 내 고향이었다. 신작로 맞은편으로 보이는 왕재봉 주변 산과 들은 내가 다니던 비봉국민학교와 과거 우리 논이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땅들 대부분이 우리 땅이었다. 엄마는 그 땅들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할아버지에게 죄송해서 일부라도 되찾기를 간절히 바라셨다. 그 소원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시골에는 일이 늘 산더미였다. 내 추억을 곱씹을 시간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나와 달리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어린 시절 추억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서울과는 다른 시골의 정취 덕분에 정서적으로 좋은 영향도 만만치 않게 받았을 테고.
막내는 부모님이 가꾸시던 구포리 산의 정경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봄이면 산은 온통 꽃동산이었지. 개나리, 진달래가 피고 지면 배꽃이 하얗게 뒤덮였어. 발그스레한 복사꽃이 지고 나면 여름에 개 복숭아가 열리고. 약간 더워지는 6월이 되면 밤꽃이 하얗게 피어 아버지의 잔소리를 기억나게 했는데. 이제는 모두 추억 속에 묻혀 버렸네. 아마 엄마가 꽃과 새를 키우며 살고 싶다는 소망을 노년에 이루신 것을 아버지에게 고마워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지금은 들어.’
다 표현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구포리 산의 봄 정경을 연상할 수 있지 않을까? 개 복숭아가 열리는 복숭아나무는 큰오빠 친구인 원구 오빠가 사다 심어준 거라고 했다. 원래는 좋은 품종이었단다. 그러나, 거기서 열리는 열매는 개 복숭아였다. 먹기에 애매한 수준이었다. 오 남매 모두 복숭아를 좋아하는 데도 아무도 그 복숭아를 노리지 않았다. 수돗가 주변에 심어 물도 풍부한데 열매는 영 시원찮았다.
배 역시 작은 오빠의 품평대로 중국 사람들이 기르는 돌배 수준이었다. 상품 가치가 거의 없을 정도로 작았다. 그래도 맛은 달고 시원했다. 엄마는 그 돌배를 갈아 김치에 넣으셨다. 김치의 시원한 단맛이 그 돌배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 엄마를 보고 자라서인지 나도 열무김치를 할 때면 배를 많이 갈아 넣는다. 배를 넣지 않으면 김치의 완성도가 떨어질 거라는 강박 관념까지 있다. 그렇게 보면 요리 방법도 계승되는 게 맞는 것 같다.
아버지는 구포리 산의 토질이 특별히 좋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황토 빛이 도는 토질 때문에 영양이 풍부해 다른 곳보다 맛이 월등히 좋다고 자랑하신 것이다. 밤 맛은 아버지의 주장대로 토질의 효과가 차고 넘쳤다. 열무나 배추도 남달랐다. 아주 실하거나 크게 자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맛은 시장에서 파는 야채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월등했다.
아버지는 식물만 기르신 게 아니었다. 닭도 기르셨다. 정착 초기에는 남양 어딘가의 양계장에서 꽤 많은 양의 병아리를 분양받아 오셨다.
수돗가 아래쪽에 만든 하우스에서 병아리를 키울 때 이야기다. 그날따라 아버지가 사 오신 병아리 수가 꽤 많았다. 최소 500마리는 되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봉고차를 창고와 집 사이 공간에 주차하셨다. 거기에서 비탈을 올라가 다시 언덕을 내려가야 비닐하우스가 있다. 제법 걸어야 했다. 그때 무슨 마음인지 아들 둘이 그 병아리들을 같이 나르겠다고 나섰다. 병아리가 든 상자는 제법 무게가 나갔다. 아무리 조심해도 상자가 무거웠던 모양이다. 결국 작은 아들이 수돗가 주변 언덕배기에서 병아리 상자를 떨어트렸다. 상자에 갇혔다 풀려난 병아리들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한 박스에 50마리는 들어 있었던 기억이다. 우리 식구들은 그 병아리들을 잡기 위해 한바탕 소동을 피워야 했다. 할아버지를 돕겠다고 했다 졸지에 병아리를 떨어트려 더 놀란 건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작은 아들이었다. 그 일로 놀랐는지 방이 초등학교 교문 앞에서 파는 병아리에 눈독을 들이며 사달라던 소리가 쏙 들어갔다. 한꺼번에 많은 양의 병아리를 보니 귀여운 병아리의 모습도 그렇게 끌리는 건 아닌가 보다 하며 웃은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사다 기르신 병아리들은 어떻게 자랐을까? 물론 거의 닭이 되었다. 가끔 살쾡이 습격 사건이 있다는 말씀을 하신 적은 있다. 한 밤에 나타나 물어 간다는 소리였다. 어느 해인가는 이런 일도 있었다. 닭들이 알을 낳을 시기가 되자 산 여기저기 아무 곳이나 알을 낳기 시작했다. 닭들은 처음 알 낳은 자리를 기억했다 꼭 그곳에 찾아가 알을 낳는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그해는 구포리 산에 가면 무릎이 좋지 않은 엄마 대신 온 산을 돌아다니며 달걀을 수거해 와야 했다. 나는 닭들이 어디 알을 낳는지 잘 몰라 여기저기 헤매 다녔다. 사실 그렇게 키운 달걀이야 말로 최고로 훌륭한 웰빙 제품이 아닌가? 지금은 돈을 주고도 사기 힘든, 한동안 나는 따로 달걀을 살 필요가 없었다.
온 산을 뛰어다니며 자라다 보니 우리 닭들은 도저히 치킨용이 될 수 없었다. 그것도 비봉면에 있는 닭 집에 가져다주고 튀겨온 뒤에야 알게 되었다. 튀긴 닭은 질겨서 먹기 힘들었다. 운동량이 많은 닭들은 근육이 튼튼하다. 덕분에 우리 닭들은 토종닭으로 제법 고가에 팔려나간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 내가 삼계탕으로 집에서 끓여보니 국물이 거의 사골 수준으로 뽀얗게 우러났다. 시중에서 토종닭이라고 파는 닭에 비해 맛도 월등히 좋았던 건 물론이다.
되돌아보면 가지가지 추억들이 떠올라 마음이 더 허전해진다. 그때의 기억이 손에 잡힐 것 같은 데도 먼 과거가 된 느낌이다. 이제 구포리 산의 추억도 그곳을 거쳐 간 동물들과 함께 아스라하게 사라져 더 이상 돌아오지 않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