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구초심[首丘初心].
‘여우도 죽을 때는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둔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 이 말을 빗댄다. 제기동 시절에 나는 부모님도 고향을 그리워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조부모님에게 했던 실수를 한 것이다. 심지어 안양에서 구포리 산으로 이주해 살 생각을 하시는 걸 알았을 때 의아해할 정도였다.
부모님은 전쟁터 같은 서울에 살면서 자식들의 학비 마련에 올인하셨다.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할 틈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할아버지 유산 마지막 조각을 터전으로 삼아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대부분의 가산이 이미 남의 손으로 넘어가 남부끄러울 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용기를 내신 것이다. 심지어 그곳을 그렇게 애써 가꾸려고 노력하실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일구셨던 전답을 일부라도 찾았다면 금의환향은 아니라도 면목은 있었을 텐데. 거의 빈손이 되어 돌아오시는 우리 부모님을 고향에 살고 있는 일가친척 누가 기꺼이 맞이할 것인가? 그런 의문이 있었다.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부모님 뒤에는 어디에 내놓아도 번듯하게 장성한 자식들이 다섯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엄마와 아버지는 구포리 산에 컨테이너를 가져다 놓으셨다. 안양에서 산을 드나들다 정착을 염두에 두신 의도였다. 그때까지는 안양에 집이 있었다. 그러나 자식들이 분가하고 난 뒤 더 이상 안양에 머물 이유가 없어지셨다. 얼마 후 안양 관양동 아파트는 세를 주고 구포리 산으로 완전히 이주하셨다.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유산의 마지막 한 조각을 디딤돌 삼아 고향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두 분이 이주한 시기는 오 남매가 모두 결혼해 분가한 80년 중후반이다. 그리고 2018년까지 그곳에서 지내셨다. 중년 이후부터 노년까지의 30년이 넘는 적지 않은 시간이다.
막내는 아버지가 과천에서 국수를 만들어 파시던 기억을 갖고 있다. 노점상이었다. 엄마 역시 대치동 아파트에서 노점상을 하셨다. 아직 학생이었던 아들이 둘이나 있어서였다. 제기동 집과 가게를 남의 손에 넘기고도 여러 실패의 과정이 있었던 그 뒤의 일이다.
우리 식구가 모두 뱅골에 살 때 희미하지만 구포리 산에 원두막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수박밭이 있었던 기억이다. 조상님들의 묘소도 있어 나름 잡목 숲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산은 방치되었었다.
구포리 산을 개간할 때 아버지를 괴롭힌 것은 아카시아 나무였다. 뿌리가 구천까지 뻗어 있다는 아카시아는 땔감으로도 사용하기 힘든 잡목이었다. 가시가 있어 손을 찔리거나 다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카시아는 원래 우리나라 산에 주종으로 심었던 나무가 아니었다.
왜정 때 수탈은 다양한 곳에서 이루어졌다. 그중 산에 있던 수십 수백 년 된 나무를 각종 개간이나 전쟁 물자 명목으로 마구 베어갔다. 울창한 숲은 그렇게 사라졌다. 산들은 황토 흙을 드러낸 민둥산이 되었다. 민둥산은 여름이면 각종 물난리를 불러왔다. 치수의 문제가 심각해지자 조림 사업으로 쉽고 빠르게 자라는 아카시아를 산에 심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카시아 전설이 왜 그런 질긴 인연의 대상으로 이야기되었는지 나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어디선가 불쑥불쑥 솟아나는 아카시아 나무를 없애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셨다. 덕분에 구포리 산에서 아카시아는 찾아볼 수 없는 나무가 되었다. 아버지의 인간 승리였다.
잡목은 아카시아만이 아니었다. 산딸기나무도 쉽게 주변을 점령했다. 우리 산과 경계를 둔 곳에 산딸기나무가 꽤 있었다. 어느 여름. 장화를 신고 그곳에 들어가 산딸기(복분자)를 땄다. 양이 제법 많았다. 씨앗이 많아 그냥 먹기에는 애매했다. 산딸기에 설탕을 넣고 잼을 만들었다. 두 아들과 조카딸 정후는 여름을 즐기는 물놀이를 하고 난 다음 식빵에 산딸기 잼을 발라 허겁지겁 먹었다. 그 모습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산딸기 넝쿨이 우거지면 사람들 출입이 힘든 곳이 된다. 그러니 뱀들의 서식지로 적당할 수밖에 없다. 뱀을 만날까 봐 걱정하면서도 그날 거둬들인 산딸기는 맛과 향이 일품이었다.
아버지는 잡목을 제거한 자리에 밤나무와 과실나무들을 심으셨다. 특히 셋째의 처가 공주에서 사돈을 통해 구하신 밤나무는 밤 맛이 기가 막혔다. 밤고구마보다 더 달았다.
그 밤나무에 들인 아버지의 노력도 장난이 아니었다. 안양 등지 한약방에서 한약재로 사용하고 남은 찌꺼기들을 구해 나무 주변에 뿌렸다. 거름 중에서도 아버지는 그것을 최고라고 생각하셨다. 약 밤이라며 밤 맛을 자랑하셨다.
아쉽게도 그중 많은 밤나무가 태풍 곤파스에 쓰러졌다. 나중에 가보니 아버지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밤나무의 피해는 심각했다. 우람했던 밤나무들은 뿌리 채 뽑혔거나 쓰러져 있었다. 회생 불능의 나무들이 뒤엉켜 있는 광경은 처참했다. 결국 밤나무 대부분을 베어버려야 했다.
아버지가 느끼신 상심은 훨씬 크셨을 터였다. 남편은 밤나무들 피해가 심한 이유를 과영양이었을 거라고 진단했다. 한약재로 인한 영양 과다로 나무들이 웃자라 땅에 뿌리를 깊이 뻗지 못해 이런 피해가 생겼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지금 돌아보니 태풍 곤파스로 피해를 입었을 때 아버지 나이는 이미 80이 넘으셨다. 다시 밤나무를 심어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최소 5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아버지가 구포리 산에서 밤 농사를 지으실 무렵부터 제기시장 수원 상회 집 딸에서 밤 농장 집 딸로 바뀌어 살았다. 판매처가 애매한 밤을 아버지는 주로 자식들에게 맡기셨다. 그러나 자식들 역시 아버지처럼 이재에 밝은 편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처한 위치들이 남에게 돈을 받고 밤을 팔기에는 애매했다. 솔직히 그런 주변머리가 없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에게 용돈처럼 돈을 드리고 밤을 가져다 가까운 지인들에게 선물로 돌렸다. 엄마가 자식들에게 돈을 받는다며 난리를 부리셔도 소용없었다. 농사에 들어가는 각종 비용에 생활비 등도 부담하는 자식들에게 엄마는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셨다.
지금 돌아보면 밤 농사에 가족들의 각종 노력 동원도 만만치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에는 구포리 산으로 접근하는 도로가 많지 않았다. 차로도 왕복 네다섯 시간이 소비되었다. 토요일이면 일을 도우러 오지 않는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억지로 집을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화성 구포리 산에 가서 하는 일이 나에겐 직접 경험이 되기도 했다. 그 경험 중 열무 밭 잡초를 뽑던 일은 청소년 선도 방송 ‘마음의 문을 열고’ 원고에 활용한 적도 있다.
- 아버지의 명으로 열무 밭 잡초를 뽑다 힘이 들어 다음 주에 와서 나머지를 뽑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돌아왔다. 다음 주 가보니 지난번 뽑은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잡초가 무성했다. 설마 한 주일 사이에 그렇게 많은 잡초가 번성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경험을 예화로 들며 일의 마무리를 미루지 말라는 교훈을 담은 내용이었다.
나이가 들어 은퇴를 하면 귀농을 해 볼까 하던 꿈을 접은 이유는 간단하다. 두 분이 구포리 산에 계신 동안 수없이 그곳을 드나들며 충분히 느끼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전원생활이 싫은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노동에 적합한 체력이나 타입이 아니라는 확신이 생겼다. 농사는 기본적으로 체력 싸움이다. 그런 체력과 인내심은 아버지 정도의 강단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건 아닐까? 수시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 기억이 떠오른다. 큰오빠가 대학원을 가야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 허락의 말은 이랬다. 아무리 큰오빠를 둘러봐도 교수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아 허락하신다고. 큰 오빠는 책을 잡으면 주로 밤을 새워 읽는 타입이다. 당연히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잦았다. 아버지의 그 판단은 확실히 신의 한 수였다.